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36화 (465/686)

14권 10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0)

백검회의 모습은 특이했다.

서른 명가량의 인물들이 모두 날카롭게 날이 선 예기를 뿜어내며 산속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딱히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려는 마음도 없는 듯했다.

얼굴은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으나, 행동의 느낌이 상당히 거칠었다.

자세히 보니 입고 있는 검은색 무복도 꽤나 더러워진 사람들이 많았다.

옷자락이 잘리고 구겨진 모습.

일부는 붕대를 감고 있기도 했다.

‘싸움을 끝낸 분위기인데? 어디서 오는 거지?’

소호는 그들의 기세와 분위기를 보고 백검회가 방금 전에 누군가와 싸움을 끝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이 서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으로 볼 때 싸움은 동쪽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호가 안력을 집중해 살피자 동쪽에서 가늘고 긴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밥 짓는 연기가 아니야.’

소호는 잠시 고민했지만, 백검회를 쫓기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럇. 가자!”

히히힝-.

소호는 말에 박차를 가해 연기가 나는 방향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길이 끊겼다.

관도는 끊겼고, 연기가 나는 쪽은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나무들로 빽빽하게 가려져 있는 지형이다.

그런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코를 찌르는 냄새가 있었다.

소호는 미간을 좁히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화전촌? 산채?’

소호는 문득 얼마 전에 교어채에서 보았던 일을 떠올렸다.

폐허가 된 공간. 그곳에 남은 수많은 시신과 참상들이 지금도 눈만 감으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신이 타는 냄새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여기서 기다려.”

소호는 투레질을 하는 말을 인근 나무에 묶어둔 채 신법을 전개해서 빠른 속도로 산을 타고 올랐다.

연기가 나는 곳까지는 본래대로라면 반각이면 도착할 거리였으나, 집혼기를 잃고 내공의 일부가 금제된 지금은 일각이 넘게 걸렸다.

소호는 까맣게 타 버린 시신들을 앞에 두고 제자리에 우뚝 섰다.

목책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통나무로 만든 입구는 커다란 도끼로 내리찍은 것처럼 쪼개져서 박살 났고 사방에는 병장기들이 널브러져 싸움의 흔적이 즐비했다.

바닥에 남은 수많은 발자국들이 산적들이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보여 준다.

미끄러지고 누군가에게 짓밟히며 바닥을 핏물로 진득하게 적셔 놓았다.

“화살, 창, 검, 그물…….”

소호는 주변에 남은 흔적들을 토대로 싸움의 경과를 추측했다.

산적들은 침입자에 맞서 싸웠다.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서.

화살을 쏘고, 창으로 찌르고, 그물을 던지고 검으로 싸우다가……. 최후에는 맨손으로 싸울 기세로 끝까지 항전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익숙한 광경이다.

바닥에는 피로 점철된 싸움의 흔적들이 하나의 결을 만들어 내며 안쪽으로 이어졌다.

소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런 흔적을 교어채에서도 보았다.

“주변을 포위한 자들은 그저 도망치지 못하게 막기만 했어. 이 살육은…… 한 명이 행한 일.”

주변의 흔적을 쭉 따라가던 소호의 시선이, 마침내 까맣게 타서 은은한 연기만 피워 올리는 시신 더미에 닿았다.

백여 명에 달하는 시신들이 둥그렇게 쌓여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시신의 모습들은 비교적 멀쩡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싸움의 승부는 금방 났다.

모두가 미간이나 목, 또는 심장을 꿰뚫려서 대부분 일수에 죽임을 당했다.

“신학검……!”

소호는 시신의 상흔에서 청성파의 무공을 발견했다.

사혈을 누르듯이 찌르는 검.

신학검이 분명했다.

청계라는 자가 떠올랐다.

팔다리가 길고 신학검 검술에 능한 청성의 무인이다.

청계는 집혼기에 혼백을 채우기 위해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잔인한 자였다.

“백검회……. 변함이 없구나.”

문제가 있다면, 시신 더미에서 튀어나온 손들 중 몇 개는 단풍잎처럼 작다는 점이다.

교어채 때와 똑같다.

집혼기에 혼백의 양을 채우기 위해 어린아이까지 잡아 죽이는 일.

사람의 도리를 벗어났다.

천도(天道)에 어긋난 일이었다.

‘머리로 이해는 하는데…….’

소호는 아버지의 반응을 떠올렸다.

별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

전쟁터에서는 더 심한 일도 비일비재했다는 듯, 나중에 결국 대가를 받을 거라면서 아무렇지 않았던 그 모습을 떠올렸다.

맞는 말이다.

세상은 잔혹하다.

그렇긴 한데, 눈앞에서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면 협을 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아버지.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어요. 힘이 사람을 타락시키네요. 이자들은 정도라는 것을 몰라요. 이런 식이라면 왕진과 다른 게 뭔가요?’

천도에 벗어난 자.

천벌이 필요하다.

소호는 몸을 휙 하니 돌려 뛰쳐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소호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도법을 연마하면서 굳은살이 박힌 손이다.

단단한 손바닥엔 나이테처럼 고련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예전처럼 융통무애한 진기가 끊임없이 흐르지는 못했다.

그 원인은 명확했다.

소호의 몸에 금제되어 있는 칠점법.

그로 인해 내공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탓이다.

“지금의 내가, 이길 수 있나……?”

말로 내뱉는 순간 이미 소호의 민활한 머리는 답을 계산해 냈다.

지금 그의 몸에서 쓸 수 있는 힘은 십 년 정도 되는 내공밖에 없다.

무림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일류 고수.

절정의 고수만 만나도 목숨이 위험해지는 입장이다.

물론 소호는 자신은 있다.

그의 싸움 감각.

무공에 대한 높은 이해.

그 두 가지가 있다면 가진 바 내공의 힘 이상의 힘은 분명히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불가능해…….”

백검회 무인들은 대부분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그중에는 특출한 자가 있었다.

청계.

집혼기를 가진 자.

성정이 잔혹한 만큼 지금쯤엔 얼마나 많은 혼백을 모아 강해져 있을지 짐작이 가질 않는 자였다.

지금 본 흔적만 해도 그랬다.

싸움에 이골이 난 산적들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허점을 보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일수에 목숨을 빼앗았다.

절정의 경지를 훨씬 넘어선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처럼 내공이 빈약한 소호가 상대하기엔 만만치 않은 자였다.

‘명분도 없어. 가서 따져 봤자 백검회 회주가 말했던 것처럼 도적을 잡는 데 변명이 필요하겠냐는 말만 하겠지. 협…… 협. 답답하구나. 사람들에게 협을 물으면 민초들을 괴롭히는 도적을 잡는 거라고 하겠지?’

소호는 깊게 고민했으나, 이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힘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리고 힘이 부족하니…… 하고 싶은 일을 참아야 하는 분한 경우가 생겼다.

세상은 힘이 부족하면 참아야 하는 일이 매우 많다.

소호에게는 익숙지 않은 경험이었다.

“나는…….”

요점은 간단했다.

나는 이곳에서 죽은 산적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있는가?

“…….”

소호는 스스로 던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어두운 먹구름 같은 감정이 소호를 지배했다. 그는 말문이 막힌 채 묵묵히 하산했다.

말에 다시 올라타고, 관도를 터덜터덜 걷기 시작하면서도 그의 어두운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

안휘성에서 합비로 가는 길목에는 많은 객잔들이 있었다.

전국에서 제일 화려하고 좋다는 항주의 객잔들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그래도 워낙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기에 음식도 맛있고, 잠자리도 쾌적하다고 정평이 난 객잔들이 아주 많았다.

“어서 옵쇼! 헌앙하신 공자님이시군요! 무엇을 드릴까요?”

관도객잔(官道客棧)의 문을 열고 들어간 소호는 얼굴이 동그랗고 친절한 눈매를 지닌 점소이에게 안내를 받았다.

“소면이랑…….”

“예이, 잘 시키셨습니다. 저희 집 소면이 아주 맛있지요. 또 시키실 것 있으십니까, 공자님?”

“……술.”

“네?”

“술을, 주세요.”

소호는 어두운 낯빛으로 구석진 곳의 탁자에 털썩 앉아 버렸다.

멍하니 앉아 있는 소호를 보며 당황한 건 관도객잔의 점소이였다.

“공자님, 송구하오나 술이라고 하시면…… 종류가 좀 있는데. 오량액으로 찾아볼깝쇼? 죽엽청? 아니면 좀 저렴한 백주나 화주로……?”

“…….”

“어, 음, 제가 제일 맛있는 걸로 추천해서 갖다드릴깝쇼?”

소호가 두르고 있는 분위기가 무거웠던 탓이다.

점소이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오랜 경험을 살려 재빨리 깨끗한 호리병 안에 담긴 죽엽청을 들고 나타났다.

쪼르륵-.

죽엽청을 술잔에 따르는 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연한 갈색의 술은 겉으로 보기엔 찻물과 비슷했지만, 눈으로만 봐도 느껴지는 청아함과 코끝으로 스며드는 맑은 대나무 향이 풍미를 더해 주었다.

소호는 사실 술을 잘 마시진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술을 마셔서 감각이 무뎌지는 게 소호에게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데 오늘은 망설이지 않았다.

꽉 움켜쥐었던 주먹을 쓸쓸히 내리고 포기해야 했던 경험.

왕진을 쓰러뜨리겠다는 대의를 잃고, 지금은 알량한 정의감조차 잃었으니.

“별거 아닌 일이야. 별거 아닌데…….”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쓰릴까.

소호는 묵묵히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크…….”

소호는 입안에 넣자마자 화- 하게 자극하는 술맛과, 숨을 쉴 때마다 코끝까지 새어 나오는 대나무 향을 느끼면서 감탄을 토해 냈다.

술맛이 썼다.

그런데 향긋하다.

마치 인생의 맛 같았다.

“어이쿠, 그분 참, 술을 맛있게도 먹소.”

탁.

소호가 술잔을 내려놓는 것에 맞춰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건장한 체구.

선이 굵은 외모를 지닌 자였다.

나이는 소호와 또래거나 두 어 살 많은 느낌이었다.

눈썹은 송충이처럼 짙고 콧대는 태산처럼 준엄하다. 턱선이 사내답게 각 져 있어서 수염을 기르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눈을 빛내면서 빙긋 웃었다.

꽤나 고집스러울 듯한 외모와 달리 성격이 호탕한 듯 보였다.

소호는 그가 구름처럼 가벼운 발놀림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청년은 푸른빛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허리춤에 절로 시선이 갔다.

“아, 이것 말이오?”

청년은 소호의 시선을 느낀 듯 자신의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청년의 허리엔 신기한 물건 두 개가 달려 있었다.

하나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작은 태극경(太極鏡)이었다. 사방에 건곤팔괘가 새겨져 있는 팔각형 팔괘반에 가운데에 있는 태극 문양은 오목하게 들어가서 거울처럼 반짝인다.

도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대쪽엔 또 전혀 다른 물건이 있었다.

반대쪽 허리에는 똑같이 손바닥 반만 한 작은 목탁이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작게 만들었나 싶은 목탁이 염주로 칭칭 감겨 있는 모습은 이자가 불자(佛子)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하핫, 내가 어릴 적에 부모님께서 점(占)을 잘 보는 도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분께서 그러셨답니다. 제가 귀신들이 달라붙을 상이라고. 그래서 부모님께서 하도 걱정을 하시기에 이렇게 대비책을 항상 차고 다니지요.”

그리 밝은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청년은 구김살 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귀신이 들러붙으려다가도 호탕해서 성불하겠네.’

묘한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소호는 어느새 자신의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해소된 것을 느꼈다.

“원시천존과 부처님의 신물을 동시에 지니면 두 분이 화를 내진 않겠습니까?”

“하핫! 재밌는 분이시오. 안 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만류귀종이라. 도가든 불가든, 저만 잘 행동하면 어느 한 분은 잘해 주시겠지요. 원시천존이든 부처님이든. 두 분 다 욕심이 없기로 소문난 성인들 아닙니까?”

마치 엄마가 좋든 아빠가 좋든 무슨 상관이냐며 가볍게 말하지만, 그 대상이 선계와 불계니. 꽤나 대범한 청년이었다.

“아! 인사가 늦었소. 소형제가 진정 술을 즐길 줄 아는 모습을 보니 괜히 친해지고 싶어서 왔소이다. 하남에서 온 강(强)이라고 하오.”

가볍게 포권을 취하지만, 그 속에는 명가의 절도가 깃들어 있다.

호쾌하게 빙긋 웃는 눈빛에선 소호에 대한 호의가 가득했다.

소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부드럽게 마주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먼저 인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호(虎)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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