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11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1)
“호랑이라. 범은 본래 고독하게 은거(隱居)하는 산의 제왕이니. 지금처럼 호젓하게 술을 마시는 소형제와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이다.
소호는 감탄하면서 웃었다.
“잘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느낀 바대로 말했을 뿐이오.”
“소협도 이름과 잘 어울리십니다. 풍채만 봐도 호연지기가 남다른 분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분명히 이름처럼 강한 분이겠죠?”
소호는 빙긋 웃었다.
“……하핫! 그렇게 보이오? 남아당자강이라는데, 나도 큰 꿈이 있소. 호연지기가 남다르다니 기분 좋은 말이오. 강하냐라……. 원래 무림에는 기인이사들이 모래알처럼 많다는데, 어찌 감히 강하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소?”
강은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며 움찔했으나, 이내 처음처럼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가슴을 펴자 넓고 탄탄한 가슴 근육이 옷 위로도 드러날 만큼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흠.”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었다.
“그냥,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는다고 해 둡시다.”
“하핫, 역시 호탕하시네요. 잘 알겠습니다.”
“소형제, 어떻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합석해서 술을 한잔해도 괜찮겠소?”
“예. 안 그래도 적적했습니다. 부디 함께해 주시지요.”
소호는 손을 뻗어 자리를 권했고, 강은 마다하지 않고 넙죽 건너편에 앉았다.
눈치 빠른 점소이는 곧바로 술잔을 하나 더 챙겨서 가져다주었다.
“소형제는 요즘 무림이 돌아가는 소식을 좀 알고 있소?”
“무림이요?”
쪼르륵-.
죽엽청을 술잔에 따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지금 무림은 큰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소. 그거 아시오? 무림 문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했던 흑시군이 모두 근거지를 버리고 해산하고 있다고 하오.”
“예? 그 강성하던 흑시군이 해산을 한다고요?”
“모르고 있었나 보오. 저 위의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더이다. 각 지역의 지부를 포기하고 모두 북경으로 집결하라고.”
“허어.”
강이 먼저 술잔을 양손으로 잡아 들었고, 소호도 똑같이 술잔을 들어 보인 뒤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크.”
입과 코를 가득 채우는 대나무 향은 여전히 향긋했다.
‘흑시군이 해산을 해? 대체 왜? 왕진이 죽어서?’
소호는 아까와 달리 침울한 기분이 아니라 호기심에 휩싸였다.
기분이 바뀌니 술맛도 변했다.
인생의 맛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생한 활기의 맛이 났다.
“역시 호탕하게 마시는구려. 소형제의 주도(酒道)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방금 술을 마셨는데도 술이 또 마시고 싶소. 거 기이한 재능을 지니셨군.”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네요.”
소호는 소매로 입을 쓱 닦았다.
“어떤 재능이든 재능이 있다는 건 좋은 거겠죠?”
“물론이오, 물론이오.”
강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면서 텅 빈 잔을 들어 보였다.
“더 주시겠소?”
“얼마든지요.”
소호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면서 술을 더 따라 주었다.
“그래서? 흑시군이 왜 해산을 한 겁니까?”
“황실의 지침에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아직 확실하진 않소. 사실 이건 비밀인데. 얼마 전에 천진으로 향하는 길목의 성채에서 혈사가 일어났다고 하오.”
“혈사라면……?”
“그곳에 흑시군과 금의위 수백 명이 있었는데, 떼 몰살을 당했다고 하더군.”
“아…….”
소호는 그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버지.
장기린.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피범벅이 되어 돌아왔던 왕년의 붉은 악귀.
‘아버지가 왕진을 죽였다더니. 그 과정에서 흑시군도 많이 죽었구나! 진짜 대단하시다니까……. 흑시군이 수백 명이 있는데 혼자서 싸운 거야? 그러고 이겼고?’
소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겉으로 표를 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모르는 척을 좀 해야 했다.
“그……. 크흠!”
소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레 물었다.
“흉수는 잡혔습니까?”
“잡히지 않았소. 흔적을 쫓아 보니 북경의 자금성까지 이어졌는데……. 거기서 뚝 끊어졌다고 하더군.”
“아……!”
“그런데 흉수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소. 그분은 영웅이시지. 핍박받는 무림을 구하고 홀연히 사라진 영웅이오. 흑시군이 해산되고 있는 건 분명 그분의 업적일 것이오.”
강은 흑시군을 공격한 사람을 흠모하는 듯했다.
그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는 듯 소호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그야말로 하늘의 뜻이오. 그분이 나타난 것도, 흑시군이 그동안 워낙 업보를 많이 쌓은 탓일 테지.”
강은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목탁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흑시군을 탐탁지 않아 하셨군요?”
“안 그런 사람도 있소?”
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각지에 지부를 세우고 무림 문파들을 상대로 거만을 떨던 자들이 아니오? 게다가 자리를 잡은 뒤로는 무림인들은 물론이고 관가까지 괴롭혔으니. 그들을 좋아하던 자가 어디에 있겠소?”
“옳은 말씀이십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소형제는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이오?”
“그럴 리가요. 흑시군은 분명히 해선 안 될 일들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지요.”
“역시! 내가 소형제에게 인연을 느낀 건 잘못되지 않은 것 같소.”
강은 평생의 지기를 만났다는 듯이 껄껄 웃어 댔다.
“그럼 그 ‘영웅’ 덕분에 흑시군을 싫어하던 무림인들은 모두 쾌재를 불렀겠습니다?”
“물론이오. 하지만……. 난 사실 우려되는 바가 있다오.”
“무엇이 걱정되십니까?”
“땅에서 개미 떼가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소?”
강은 술잔을 들어 올렸고, 소호는 보조를 맞춰 한 잔을 끝까지 들이켰다.
“크.”
이걸로 세 잔째.
죽엽청은 약한 술이 아니기에 이제 슬슬 술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본 적이 있죠. 개미들이 줄지어서 자기 짐을 들고 알을 옮기는 걸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맞소. 보고 있으면 내가 구름 위의 선인(仙人)이 되어서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지. 아무튼 개미 떼가 이동하는 이유는 집을 옮기거나 분가를 하기 위해서라오. 때론 개미들끼리 싸움이 나기도 하는데, 그건 아직 서로 간의 영역이 확정되지 않아서 그렇소.”
“아…….”
소호는 그쯤 되니 강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챘다.
“흑시군이 없어지면, 영역 싸움이 벌어지겠군요. 무림에서요.”
“바로 그렇소.”
그는 다부진 얼굴로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우려를 표했다.
“흑시군은 해선 안 될 일을 했소. 자유롭게 놔둬야 할 무림 강호를 굳이 황실의 뜻으로 통제하려 힘썼지. 그 과정에서 대문파들은 봉문했고 각파의 절기를 무산학관에 내주는 바람에 힘이 깎여야만 했소.”
“예. 저도 들었습니다.”
무공을 내준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무산학관이라는 곳에 절기를 내준 덕분에, 모두가 보는 곳에서 연구되어 무공의 약점까지 다 알려졌다는 게 문제다.
누구나 약점이 뭔지 아는 무공은 더 이상 절기가 아니다.
각 문파에서 자신들의 절기를 꽁꽁 감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혹시 소형제는 북경이나 남경이 아닌,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계시오?”
“작은 마을이요? 그곳에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소. 무산학관이 세워질 때쯤. 전국에 ‘정무관’이라 불리는 작은 무관들이 생겼소. 작고 시설도 별것 아닌 무관들이지. 황실과 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작은 무관들이오.”
“황실에서 그런 걸 만들었어요?”
소호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렇소. 정무관은 동네 촌부의 아이들도 아무렇게나 들어가 무공을 배울 수 있을 만큼 문턱이 낮소. 그런데 황실은 그곳에 꽤나 강한 무공을 지원했다오. 육합권, 태극검, 금강권……. 대문파의 기본공은 되는 무공들이오.”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입니다.”
소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황실이 무림 문파를 핍박만 할 줄 알았지. 정무관 같은 곳을 만들어 무공을 배포할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다.
‘구파일방을 쥐 잡듯이 잡던 왕진 태감이? 무공을 배포해? 대체 무슨 속셈이었지?’
소호가 고민하는 사이 강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덕분에 이 세상에 무림인들의 숫자는 시시각각 늘어나고 있소.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의 생각을 대충 알 것 같지 않소? 정무관 출신들 중에 재능이 있거나 강한 자가 있으면 무산학관으로 보내겠지. 그리고 그곳에서 강한 무인들이 태어나면 관가에 투신하게 될 것이오.”
즉, 강의 말대로라면 왕진은 강한 문파는 힘을 깎고, 작은 문파에는 힘을 실어서 무림의 균형을 유지했다는 소리다.
그중에 가장 이득을 본 건, 무산학관에서 수준 높은 무인들을 무관으로 받게 된 황실인 것이고.
“으음.”
소호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뜨끔하고 말았다.
무산학관 출신.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게 소호 자신이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무림에는 절대적인 강자도, 질서도 없소. 그야말로…… 난세(亂世)지.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싸움이 일어나 많은 자들이 죽게 될 것이오.”
강은 진심으로 우려하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호쾌하게 씩 웃고 있었다.
마치 언제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냐는 듯, 분위기가 밝고 호탕했다.
“뭐, 이런 이야기요. 호사가들이 말하면서 불타오르기 딱 좋은 소재지. 나라 걱정도 되고, 난세이니 영웅도 되고 싶고. 어째 싱숭생숭하면서도 솔깃한 이야기 아니오?”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번엔 소호가 먼저 잔을 들어 올렸고, 강은 의외라는 얼굴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소형제는 상상 이상으로 주당인가 보오?”
“글쎄요.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그런가. 오늘은 술이 좀 땡겨서요.”
소호는 단숨에 입에 털어 넣고 그 따가운 씁쓸함을 즐겼다.
“크.”
“흠!”
강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는 술기운을 빌려 묻는 듯, 주변을 힐끔 돌아본 뒤 물었다.
“소형제, 묻고 싶은 게 있소.”
“말씀하세요.”
“그대는 이 난세를 종식시키고 영웅이 될 마음이 있소?”
강의 질문은 뜬금없으면서도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웅심을 자극했다.
“물론이죠.”
소호는 선뜻 대답하고도 스스로 조금 놀랐다.
“그러네. 영웅. 영웅……. 좋죠. 되어야죠. 아까 남아당자강이라고 하셨죠. 이왕이면 무림 전체에 이름을 떨칠 영웅이 되어 볼까요?”
“……하핫, 역시 소형제는 주도처럼 호탕하오.”
“그 전에.”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술잔에 다시 한 번 술을 따랐다.
다섯 잔째.
이제는 소호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호흡은 장중하게 길고, 걷는 모습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으며, 손놀림은 용의 발톱 같은 소협.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혹시 하남에서 여기까지 온 게 저 때문입니까?”
제운종과 용조수.
둘 모두 무림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절공의 이름이었다.
쪼르륵-.
죽엽청 맑은 술을 받은 강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소호와 강.
두 사람은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크!”
“흐음!”
두 사람은 모두 기분 좋은 신음을 내뱉었다.
“소형제, 아무래도 통성명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소.”
사내답게 씩 웃은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앉은 자세 그대로 포권을 취했다.
“내 이름은 패원강이오. 무림맹의 기둥이신 두 존자분들의 진전을 이었다오. 그렇소. 하남에선 소형제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