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38화 (467/686)

14권 12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2)

패원강은 당당하고 자신 있게 인사했다.

소호는 예상은 했으나, 그게 사실로 드러나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무림맹 두 존자의 제자. 이 사람이 백연 맹주님이 말했던 그 청년이구나!’

구파일방의 전력을 모아 키운 공동 전인.

본래라면 지금 소호가 하고 있는 역할을 시키기 위해 무림맹이 키워 온 최강의 후기지수.

소호는 양손을 모아서 포권을 취했다.

“장소호입니다. 은자촌에서 왔어요. 하남에서 오셨다면……. 그분께선 농사는 잘 짓고 계시죠?”

“농사? ……아! 하핫, 그렇소. 그분이야 늘 소탈하게 잘 지내지 않겠소? 안 그래도 이곳에 오기 전에 뵙고 왔는데, 올해 농사는 잘 될 것 같다고 호언장담을 하셨소.”

무림맹주 백연.

밀짚모자를 쓰고 소매와 바지를 걷어붙이고 일하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소호는 호탕하게 웃는 패원강의 뒤편에 있는 손님들을 힐끔 보았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과 거리는 꽤나 떨어져 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저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소. 그리고 지금도 올해 장사에 대한 이야기로 크게 말싸움을 하고 있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

패원강의 목울대가 떨리면서 소호의 머릿속에 전음이 울렸다.

전음이 맑고 명확한 것을 보니 패원강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를 알 수 있었다.

소호는 걱정 말라는 패원강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무림맹의 어떤 존자분들께 무공을 사사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으음…….]

패원강은 함부로 대답하기 힘든 듯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맹주님께 이미 사정은 들었을 테니 말씀드리겠소. 공화존자와 태극검존께서 주로 내게 무공을 사사해 주셨소.]

[행운아시네요.]

[수련 과정은 그리 가볍게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소만. 그래도 확실히 운이 좋았다고는 생각하오.]

수련의 엄정함을 이야기하는 패원강의 얼굴에선 고련을 거친 자들 특유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당연한 이야기다.

무림에서 손꼽히는 절대자들의 가르침이 간단할 리가 없다.

뼈를 깎고 목숨을 태우는 듯한 고련이 수반되었으리라.

‘얼마나 강할까?’

소호는 가슴속에서 호승심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공화존과 태극검존.

흔히 무림오존이라 불리는 다섯 명의 존자들 중 늘 정파의 대들보라면서 손꼽히는 사람들이다.

공화존은 소림사에서 나와 스스로 파계했다가 실전되었던 아라한신권을 되살린 공으로 절간으로 돌아간 희대의 권성(拳星)이고.

태극검존은 검선 구양재인을 제외한다면 천하제일검이라고도 불리는 무당파의 절대 고수다.

소림과 무당.

정도 무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두 곳이 왕진에게 핍박을 받는 와중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두 사람이 바로 공화존과 태극검존 아니던가.

풍진 강호와 연을 끊은 고고한 신선들.

그들은 무림과의 연을 끊은 것과 다름없을 텐데 무림맹은 대체 어떻게 그들을 설득했을까?

‘흥미. 패원강의 재능이 그걸 가능하게 했겠지?’

소호가 패원강이라는 사내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큰 이유다.

공화존과 태극검존의 공동 전인이라면, 배분을 중요시하는 정파에서는 상당한 위치임이 당연했다.

‘게다가 공화존과 태극검존이 주로 가르쳤다고 했지. 그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공을 배웠다는 말이야.’

말하자면 무산학관처럼 구파일방의 모든 무학을 접하고 배워 왔을 것이다.

그것도 학관처럼 교관과 제자의 형태로 배운 게 아니라, 직접 고수들과 일대일로 마주한 상태에서 집약적으로 무공을 배운 ‘진짜배기’다.

소호의 눈빛을 느낀 것일까.

패원강도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소호를 마주했다.

“자아, 헌앙하신 공자님들. 소면 나왔습니다. 지금 드시…….아, 혹시 중요한 이야기 중이시면 조금 이따가 드릴까요?”

무심코 소면을 가져왔던 인상 좋은 점소이가 당황하면서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먼저 웃으며 손을 내민 건 소호였다.

“아뇨, 이리로 주세요.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잘됐네요.”

“아, 네. 맛있게 드세요, 공자님.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집 소면이 평이 아주 좋지요! 혹시 이쪽 공자님도 음식을 준비해 드릴까요?”

패원강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쇼!”

눈치를 보던 점소이가 주방으로 사라지자 소호는 예의상 패원강에게 한 번 권한 뒤 젓가락으로 소면을 집어 빨아들여 보았다.

후루룩―.

탱탱한 면발 사이로 삼삼한 채소향이 났다.

뼈를 우려서 만든 국물에 싱싱한 채소 위주로 향을 낸 국물이다.

“으음, 나쁘진 않네요.”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래도 국물을 한 번 더 입에 머금어 보았다.

평소에 운찬이 해 주던 소면을 먹어 온 탓일까?

점소이가 대놓고 자랑할 만큼 대단한 맛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형제는 소면도 맛있게 먹는군.”

“그래요? 이것도 재능인가요?”

“그렇소. 분명히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소형제가 소면을 먹는 걸 보니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군.”

“하나 시키실래요? 맛이 나쁘진 않아요.”

패원강은 거절했다.

술을 마시는 중에 면을 먹고 싶지는 않다는 게 이유였다.

“술과 국물은 잘 어울리는데. 아쉽네요.”

“으음.”

“한잔 더 하시죠?”

소호는 죽엽청을 따라 주었고, 패원강은 거절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일 잔.

죽엽청은 목구멍을 뜨겁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론 소호의 달아오른 호승심을 조금 식혀 주었다.

“나를 찾아왔다고 하셨죠. 패 소협은 어떤 이유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소.”

패원강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소형제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서요.”

“그 말씀은 우리 련에…….”

“그 전에.”

패원강이 손을 들어 올리면서 소호의 말을 제지했다.

“난 돌려 말하는 건 그리 잘하지 않으니 솔직하게 말하겠소.”

“예. 말씀하세요.”

“무공을 쓰지 않았음에도 나를 알아보는 식견을 보니, 소형제의 삼보(三寶)는 듣던 대로 날카롭소. 그런데 무공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소이다.”

천무삼보.

호사가들이 떠들어 대던 소호의 재능을 말함이다.

천무공자의 식견이 그리 유명했던가?

소호는 웃고 말았다.

“돌려 말하는 건 잘하지 못한다더니, 완곡하게 잘 말해 주셨네요.”

“으음.”

“척 봐도 무공이 별로죠? 얼마 전에 바보 같은 짓을 좀 해서, 사실 지금 몸 상태가 좋지가 않아요. 실망스럽다고 말해도 수긍할 수 있습니다.”

소호는 가슴 속을 꽉 막고 있는 혈도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칠점법을 풀어 버릴까?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치솟는다.

집혼기를 갖고 있던 때만큼 강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힘을 다해 패원강과 무공을 겨뤄 보고 싶은 탓이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전력을 다했을 때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유준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확신이 들지를 않았다.

풍운객잔에 가기 전.

조서인과의 대결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기 전의 소호였다면 망설임 없이 칠점법을 풀고 덤벼서 싸워 보았을 것이다.

―네가 푸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의미가 있다.

소호는 장기린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금제다.

내공의 금제가 아니라 마음의 금제.

“아, 정말.”

소호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마음을 다 잡았다.

그리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패원강에게 아쉬움이 팍팍 묻어나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본의 아니게 실망시켰네요. 만약 소협께서 저의 무공에 실망해서 돌아가겠다고 하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소호는 빈 잔을 들어 보였다.

당당한 모습.

곧은 눈빛으로 패원강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허어.”

패원강은 그 나름대로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인상을 쓰더니,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진지한 모습이라 도리어 소호가 당황할 정도였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길 잠시.

쪼르륵―.

패원강은 다시 죽엽청을 들고 소호의 잔에 따라 주었다.

“다친 것이오?”

“네. 열흘간 정신을 잃었었어요.”

“상대는 누구였소?”

“……소협이 상상할 수 있는 최강의 적이었다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스승님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비슷해요. 제 입장에선 그분들보다 무서울 것 같습니다만.”

패원강은 놀란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럴 만하다고 여긴 듯했다.

“그랬군. 하긴, 이곳에 오기 전에 만났던 그분도 소형제의 무공에 대해서는 극찬을 했소. 그런데 그분이 극찬할 만한 무재가 호승심조차 갖지 못할 만큼의 적이라……. 상상이 가질 않소.”

“에이, 그분은 왜 그런 말을 했대요. 부끄럽게.”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소.”

패원강이 소호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거웠다.

“소형제는 내게 난세를 종식시키고 영웅이 될 마음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분명 그렇게 말했죠.”

“그럼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소.”

패원강은 뭔가를 감추는 성격이 아니었다.

직선적인 말투.

호쾌한 성정 뒤에는 이렇게 스스로의 의도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솔직함이 있었다.

‘말은 부탁이지만 날 시험하는 구나.’

소호는 패원강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무공으로 겨루지도 못하는 몸.

시험을 피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어떤 부탁입니까?”

“내 입으로 듣기보단 직접 가서 보길 바라오.”

“그래요?”

소호는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아쉬운 눈길로 아직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죽엽청 술병을 흔들었다.

“맛있는 술을 만났는데 아쉽네요. 마지막으로 같이 한 잔만 할까요?”

“소형제는…….”

패원강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다 보인다.

패원강은 진지하게 잡아 놓은 분위기 때문인지 웃고 싶은 걸 꾹 눌러 참고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주당이었군.”

“그러게요. 누구 피를 물려받았나 모르겠어요.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술을 즐겨 마시진 않던데.”

소호는 씩 웃으면서 패원강의 술잔에도 죽엽청을 채워 주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

“비학문(比鶴門)의 문도들이오. 세가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작은 문파라고 하기엔 규모가 좀 있는 편이오. 문주까지 합하면 문도는 백 명 정도고, 문파가 데리고 있는 하인들과 인근에 보유한 가게들의 구성원까지 합하면 이백은 족히 될 것이오.”

소호는 패원강과 함께 관도객잔의 지붕 위에 올라와 있었다.

독한 술을 다섯 잔씩이나 마셨지만 두 사람 모두 술에 취한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문주인 비학철검(飛鶴鐵劍) 송양은 일류를 넘어 절정에 이른 무인이라 평가받고 있소. 그리고 그가 기른 제자들 중에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오학검(五鶴劍)이라 불리고 있지.”

“아…….”

소호는 패원강이 가리키는 방향에 푸른색 무복을 맞춰 입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십여 명의 무인들을 살펴보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눈살을 찌푸려야 겨우 보일 거리지만, 상승 무공을 익힌 두 사람에게는 코앞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거리였다.

“비학문은 표면적으로는 정파고 실제로도 무림맹에 가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문파라고 들었소. 아까 객잔에서 말했듯, 거대 문파를 짓누르고 약소 문파를 살려 주는 황실 정책의 수혜자 중 하나요.”

“표면적으로? 속은 다른가요?”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소. 그런데 대외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벌어들이는 재물이 상당히 많다고 하더군.”

소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재물.

단지 재물을 많이 번다고 해서 악인인 것은 아니지만, 그 재물의 출처를 알 수 없다면 안 좋은 일과 연루되어 있을 확률이 훨씬 큰 법이다.

광장에 모여 있는 비학문 문도들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전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다들 검병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었다.

비학문의 건너편에 있는 자들.

흰색 무복에 소매에 금실로 선을 그려 놓은 자들이다.

“어?”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뜬 소호의 귓가에 선명한 외침이 들려왔다.

“천무공자의 이름이 당신들은 우습나!”

소호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