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39화 (468/686)

14권 13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3)

큰 소리를 내고 있는 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 얼굴과 몸에 흉터가 많은 중년의 사내였다.

“방익지 조장…….”

소호는 그 사내를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천무련을 처음 세울 때 찾아와 준 사람들 중에 섭주해가 선별한 인물이고, 실제로도 소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충성심 깊은 모습을 보이던 사내였다.

소호는 방익지와 관련해서 특히나 인상 깊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방 조장……. 충성스러운 사람이야. 보광의원에서 날 지키기 위해 백검회주를 막아섰잖아. 주변 백검회 무인들이 더 강한데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했고. 나보고 도망치라고 외치기도 했어.’

실제로 소호가 방익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 전까지 그는 소호의 명성을 듣고 기회를 잡기 위해 쫓아온 무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천무련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추문을 정리하라고 했을 텐데! 그쪽의 오학검은 왜 그대로인가! 지금쯤 사학검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말이야!”

지금의 방익지는 소호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강압적이고, 험악한 태도였다.

뒷골목 파락호들이 그러하듯 폭력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주변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버럭버럭 소리치는 모습도 낯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방익지의 말에 한 사내가 발끈하며 앞으로 나섰다.

비학문의 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들 중 문주인 비학철검을 제외하면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였다.

탄탄한 몸.

우람한 체격을 지닌 검객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 일학검 송철이 내 이름을 걸고 말하겠소! 우리 비학문의 오학검은 모두가 한 몸이오! 그런 증거도 없는 한낱 뜬소문 때문에 사제를 버릴 것 같은가!”

얼핏 송철의 말은 당당하고 정의로워 보였다.

하지만 방익지는 상상 이상의 행동을 했다.

“한낱 뜬소문? 카악!”

가래침을 모아 오학검의 발 바로 앞에 뱉어 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이딴 게 비학문에 가입을 권유하는 천무련의 태도인가!”

“사도다! 정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대사형!”

비학문의 문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목소리가 되어 방익지를 성토했다.

하지만 방익지는 비학문의 험악한 분위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목청을 높였다.

“개소리!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이 마을에 사는 모두가 아는 일인데! 증거? 오냐. 비학문의 의지가 그것밖에 안 된다면, 나는 련주께 보고를 올리고 비학문과 결자해지를 보겠다! 천무공자께서 직접 오신다면 당신들이 그렇게 뻣뻣하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땅을 걷어차고 어깨를 건들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낭인이나 파락호였다.

방익지는 자신만만하게 외쳤고, 그의 주변에 있는 천무련 소속의 무인들 역시도 비슷한 모습으로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런 무례한 자를 봤나!”

“천무공자의 이름이 그리도 높더냐! 최근에 무명을 좀 날리니 우리 비학문의 백 년 역사가 우습게 보이는가!”

비학문도들은 분노해서 당장이라도 검을 뽑으려 했으나, 그들을 말린 것은 지금까지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비학문의 문주였다.

“그만! 진정하거라! 우리 비학문은 유서 깊은 정도의 문파거늘. 어찌 비례(非禮)에 똑같이 비례로 대하겠는가!”

나이가 오십 대 이상으로 보이는 중년인.

비학철검 송양은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은 자였다.

당당한 말투.

물 흐르듯 나오는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 낭랑했다.

당장 소호와 패원강이 멀리 떨어진 지붕 위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주변에는 듣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들을 주시했다.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비학문주. 천무련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한 건 그쪽인데, 우리가 더러운 추문을 털고 나서 들어오라고 한 게 그리도 예에 어긋나는 일이오?”

“어허! 천무련의 조장이라는 자는 이리도 무례한가? 한 문파의 문주에 대해, 그리고 무림의 선배에 대한 예의도 모르는가!”

비학철검 송양이 강하게 발을 굴렀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구나! 천무련은 이리도 예의가 없는 곳인가!”

“하! 좋게 대하려고 해도 그렇게 못하도록 만드는 건 비학문이다!”

방익지가 손짓을 하자 뒤에 서 있는 천무련의 무인들이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다.

그러자 비학문주의 주변에 있던 오학검과 문도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며 지지 않겠다는 듯 대립각을 세웠다.

양측이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서로를 향해 모진 말을 해 댄다.

분위기는 뜨거워졌지만, 그래도 양쪽 누구도 먼저 검을 뽑지는 않았다.

“소형제의 지시로 하는 일인가 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소.”

멍하니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소호는 그제야 패원강의 시선을 눈치챘다.

그는 어딘가 안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으음, 세를 늘려야 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런 식이었는지는 몰랐네요. 비학문…… 비학문이라.”

소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섭주해와 함께 천무련을 어떻게 키워 나갈지 상담하던 도중에 나왔던 이름이긴 했다.

기억에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그냥 작은 문파. 신경 쓸 것 없다고 주해가 말했던 것 같은데.’

솔직히 조금 부끄럽긴 했다.

방익지에게 저런 파락호 같은 면이 있다는 점에 첫 번째로 놀랐고, 두 번째로는 하필 그런 우악스러운 모습을 앞으로 천무련에 들어올까 고민 중인 패원강이 지켜보았다는 사실에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놀랍지 않소?”

그런데 패원강은 실망보다는 의외의 말을 했다.

“어떤 점이요?”

“천무련은 내가 알기로 이곳 안휘 북부에 자리 잡은 지 불과 몇 달도 채 되지 않았소. 그런데 주변을 보시오.”

“흐음.”

소호는 그 말에 눈을 빛냈다.

“그러네. 아무도 편을 안 들어 주네요?”

“비학철검은 자기 스스로 비학문이 이곳에서 백 년의 역사를 지닌다고 했소. 그런데 이상하군. 그 정도 역사가 있다면 이 마을 전체가 비학문의 편이어야 할 텐데?”

소호는 패원강의 날카로운 식견에 감탄했다.

옳은 말이었다.

오랫동안 한곳에 뿌리박은 집단의 경우 주변의 다른 집단과 단단한 관계를 맺었다.

하남 숭산은커녕, 숭산 근처에만 가도 소림사의 욕을 하고 무사할 것 같은가?

무당파도 마찬가지였다.

해검지에 들어서지 않더라도, 그 주변의 모든 민가와 상점들은 무당파의 영역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당파 인근에서 무당파를 욕보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민초들이지만, 감히 그들의 정신적 지주를 욕보이는 자들에게 침이라도 뱉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상상이 간다.

비학문.

백 년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편이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인망. 인망이라……”

소호가 본질적인 의문에 사로잡힌 사이, 패원강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소형제. 비학문과 오학검. 저들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 보겠소?”

“그게 제게 할 부탁이었군요?”

소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패원강에게서 시험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던 일.

지금 이 순간에도 소호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심유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에서 알아챌 수 있었다.

“패 소협은 생각보다 심계가 깊은 분이네요.”

“……진중한 거라고 해 두는 게 좋겠소.”

“왜 직접하진 않는 겁니까?”

“천무련이 세를 넓히는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기엔……. 아직 나는 신분이 좋지 못한 것 같소. 법도에 어긋난다 생각하오.”

아직.

아직이라는 단어가 소호에겐 크게 느껴졌다.

“그렇군요.”

무림맹의 공동 전인.

본래는 지금의 소호처럼 정도의 주축이 되기 위해 힘을 길러온 자.

그런 자가 천무련이 할 일을 대신한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일이지만, 정파의 ‘명분’으로 따지자면 안 맞는 일인 것은 분명했다.

‘정파의 무인이구나. 확실히 달라. 이제야 알겠어.’

무공의 강함과는 다른.

패원강이 지닌 특유의 호탕함의 내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맞네요.”

소호는 마음을 다졌다.

한번 마음을 먹으니 열정과 의지가 솟아났다.

천무련의 일이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

“비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세요.”

패원강은 열정에 불타는 소호를 지그시 응시하며 천천히 자신이 아는 사실들을 꺼냈다.

***

오학검(五鶴劍) 송묵(宋墨)은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나이는 스물셋.

이제 어리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지만 후기지수로서는 이제 막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젊은 나이였다.

비학문 오학검 중 막내.

비학문의 다섯 번째 검이라고 하면 안휘성 안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검객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체구였으나 손가락도 길고 팔도 길어 어릴 때부터 타고난 검사라는 소리를 들었다.

뽀얀 피부, 관옥 같은 미남은 아니지만 깨끗한 얼굴 덕분에 안휘성에선 제법 인기도 있었다.

“천무공자. 천무공자. 그깟 허명이 뭐라고. 무산학관? 흥, 우습지. 난 거기 갈 수 있는데도 들어가지도 않았어.”

송묵이 눈꼬리를 올리며 투덜거리자, 옆에서 따라오던 비학문의 문도들이 친절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도련님. 저희 비학문 최고의 기재는 누가 뭐래도 송묵 도련님이시죠.”

“어디 비학문만 그렇습니까? 안휘성 전체에서 송묵 도련님만 한 검재가 어디에 있답니까?”

“실제로 무산학관에 합격하시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사실 지금 명성 보면 그때 들어가는 것도 괜찮았을…… 야야, 왜 이래?”

“커험, 어쨌거나 도련님의 검재는 최고입니다. 비학검을 어린 나이에 대성한 사람이 도련님 말고 또 있던가요? 대사형도 아직 대성하지 못하셨는데.”

송묵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허, 말을 조심해. 안휘성 최고라니. 대사형은 둘째치고 천하의 남궁세가가 들으면 어쩌려고.”

“남궁세가가 별겁니까? 아직 거긴 이렇다 할 후기지수도 없는 데다, 심지어 가주는 예전에 이름 모를 무인한테 당해서 사경을 헤매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도 이젠 끝이에요.”

“어허, 말조심해.”

“크흠, 제가 뭐 틀린 말 했답니까?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이거지요.”

송묵이 날카롭게 눈치를 주자 남궁세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던 문도가 그제야 주변의 눈치를 좀 살폈다.

아무리 왕진의 치세 아래에서 대문파들이 숨을 죽이고 산다지만, 그래도 남궁세가는 남궁세가다.

비학문이 감히 함부로 말할 만한 세가는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지.’

오학검 송묵의 눈에서 야심이 번들거렸다.

그는 큰 꿈이 있었다.

하늘이 내려 주신 그의 검재를 이용해 비학문을 안휘성 최강.

아니, 더 나아가 하남에서도 손꼽히는 검문으로 만들 꿈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무림행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으려나. 대사형을 쓰러뜨려야 하나?’

송묵이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그들이 걷고 있던 골목 끝에서 한 청년이 나타났다.

백색의 비단 옷.

황금 수실로 장식된 화려한 장포.

어디 천금을 지닌 부잣집 막내 도련님처럼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뭐야?”

송묵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살폈다.

우습게도 그런 부잣집 도련님 같은 차림을 했음에도, 얼굴은 멍투성이에 울긋불긋하게 눈두덩이가 부어 있기도 했다.

‘어디서 돈이라도 뺏겼나?’

송묵은 피식 비웃었다.

처음엔 경계했으나 느껴지는 내공도 별거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송묵.”

“어?”

그런데 그 청년이 송묵을 불렀다.

송묵은 기분 나쁜 내색을 하면서 날카롭게 상대를 노려봤다.

“날 아시오?”

“간살(姦殺)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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