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14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4)
“그, 그런 건 묻지 말아 주세요.”
관도객잔 인근에서 식료를 팔던 상인은 손사래를 치며 도망쳤다.
“공자님, 저기, 그런 건 제가 감히 대답을 드리기가……. 죄송합니다. 제가 자식만 다섯입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지요.”
골목 끝에서 당과를 팔던 노점상은 사색이 되어서 연신 죄송하다며 절을 했고.
“비, 비학문은…… 좋은 곳이지요. 예. 오래됐으니까요. 오래되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요? 그런 거지요. 예.”
여러 종류의 꼬치를 팔던 사내는 애써 웃기는 했지만 소호가 비학문에 대해 질문한 것만으로도 넋이 나간 것처럼 더듬거렸다.
이 정도면 마을 전체가 공포에 짓눌려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존경이나 경외가 아니라, 철저한 공포로 억눌려 있는 모습이다.
“천하의 상종 못할 자들입지요.”
의외로 제대로 된 대답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관도객잔의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사람 좋은 얼굴에 눈치 빠르게 행동하던 점소이가 소호의 의문에 답을 해 주었다.
“공자님, 잠시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점소이는 소호를 객잔 구석에 놓인 외진 탁자에 데려가 차를 한 잔 내주며 말했다.
“공자님. 혹시 객잔에서 점소이로 일하면 어떤 점이 좋은지 아십니까요?”
“어떤 점이 좋죠?”
“사람 보는 눈이 좋아집니다.”
점소이는 정중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저희 관도객잔에 들르는 손님들 중에는 남궁세가로 가는 손님들이 많았지요. 제가 감히 별호를 입에 올릴 수는 없지만 전국에 명성을 떨친 대단한 무인도 많이 만나 봤습죠.”
“오? 그래요?”
“공자님은 강하시지요?”
점소이는 확신하는 듯 보였다.
소호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약하진 않죠.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얼굴에 상처가 그렇게 많은데도 당당하게 웃으시더라고요. 그런 분은 약할 리가 없죠.”
소호는 언뜻 이해가 안 되어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상처가 있는데도 웃는 자는 강하다……?”
“보통 얼굴에 상처가 남을 만큼의 격전을 치른 분들은 뭐랄까. 상당히 침울하지요. 우울하고, 어둡고 섬뜩하달까요. 자신감도 없는 것 같고. 그런데 공자님은 정반대였습죠.”
“그게 강한 이유가 되는가요?”
“거기에 덧붙이자면 뭐랄까. 자세랄까. 분위기랄까 그런 건데.”
점소이는 씩 웃으면서 “그냥 감입니다요. 감.”이라고 말했다.
“그래요?”
소호는 이 넉살 좋은 점소이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지금의 소호는 내공이 상당 부분 금제되어 있는 상태였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 보면 일류 고수 즈음이나 될까.
그런데 정작 무공도 익히지 않은 자가 소호를 보면서 강함을 느끼다니.
‘무공을 익혔다면 의외로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소호는 은자촌 풍운객잔에서 요리를 하는 운찬 삼촌을 떠올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도 무공을 전혀 몰랐던 숙수 출신이었다.
“크흠, 아무튼 그런 강한 분이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비학문은……. 겉으로는 정파처럼 굴지만 뒤에선 웬만한 흑도 문파보다 더 악랄한 놈들입니다.”
“그래요?”
소호는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비학문이 얼마나 이곳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지.
관료들에게는 뇌물을 주고, 뒤에선 투견장이나 투계장 같은 돈이 되는 사업들에 얼마나 손을 뻗고 있는지, 의외로 상세한 이야기들이 쭉 흘러나왔다.
“혹시 여기 하오문 아니에요? 생각보다 너무 많이 아는데? 만약 그렇다면 미리 이야기해 줘요. 정보료라도 내게.”
“크흠! 큰일 날 소리 하십니다. 공자님. 여긴 그냥 객잔입지요. 예예. 정보를 돈 받고 팔고 그런 곳 아닙니다요.”
점소이는 비학문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놀라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객잔의 점소이 입장에선 하오문이 비학문보다 더 무서운 듯 보였다.
“응?”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슬쩍 맨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기에, 소호는 피식 웃으면서 은자를 하나 손에 쥐어 주었다.
“응? 아니, 이게 뭐야. 아이구, 뭘 이런 걸 다. 역시 공자님은 배포도 크십니다. 큰일 하실 거예요.”
점소이는 설마 은자를 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깜짝 놀라면서 연신 허리를 굽혔다.
속이 뻔히 보이는 연기긴 했지만, 그래도 감사해하는 건 진심으로 보였다.
소호는 빙긋 웃어 주었다.
“좋죠? 옳은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아이구, 그러믄요.”
“근데 어쨌거나 이 동네에서 오래된 문파인데. 도움은 안 줘요? 도적들을 잡는다든가. 악인들이 나타나면 협객행을 한다든가?”
“퍽이나요.”
점소이는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저었다.
시종일관 친절하던 그의 두 눈에 경멸이 가득 담겼다.
“애초에 우리 마을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구 할은 그놈들 때문입니다. 돈 빌렸다가 재산 다 뺏기고 몰매를 맞거나, 도박판에서 마누라랑 자식들도 팔아먹거나……. 쯧쯧. 그러니 도움을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죠. 관부와도 얼마나 끈끈한지. 게다가 얼마 전에는…….”
물 흐르듯 이어지던 비학문에 대한 성토는 갑자기 중단되었다.
점소이는 이번만큼은 더욱 주변을 경계했다.
근처에 사람들이 없고, 손님들은 다들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점소이는 말을 이었다.
“마을에 하나뿐인 서당에 젊은 학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안사람을 잃고 자결을 해서…….”
점소이는 슬픈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소호는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짙은 안타까움을 읽었다.
“좋은 사람이었나 보네요, 그 학사분.”
“예에, 좋은 분이었죠. 돈도 안 받고 마을 아이들한테 글도 가르쳐 주셨거든요.”
“안타깝네요. 그런 좋은 분이 자결이라니. 도대체 어떤 억울한 일이 있었던 거죠?”
“실은…….”
점소이는 어두운 얼굴로 지난 사건을 이야기했고 소호의 두 눈이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쿵―.
소호는 탁자를 경쾌하게 두드렸다.
“공자님?”
소호는 잠시 턱을 매만지다가 씩 웃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예?”
“마을에 좋은 소식을 갖고 올게요.”
소호는 손을 흔든 뒤에 객잔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선선했다.
협객행을 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패 소협, 듣고 있죠?”
소호는 혼자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면서 비스듬한 사각지대에 놓인 허름한 지붕 위에 시선을 두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던 그곳에서 불쑥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사내답게 진한 외모를 지닌 청년.
패원강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소호를 보고 있었다.
“공화존께서 천리지청술의 대가라고 들었거든요. 역시, 패 소협도 그 무공을 익혔을 것 같았어요.”
소호는 패원강을 향해 한 번 웃어 준 뒤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패 소협이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 것 같네요. 정파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소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계속, 잘 들어주세요.”
***
“간살이라니. 뭐가 어째?”
송묵은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눈꼬리가 치솟은 그에게서 살기가 피어오른다.
그의 주변에 있던 비학문 문도들도 제각각 험악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헛소문을 듣고 와서 감히 누구에게 모욕이냐!”
“천무련 놈인가!”
소호는 팔짱을 끼고 선 채로 그들이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비학문 문도들은 잔뜩 흥분한 원숭이 떼 같았다.
꺅꺅거리면서 험악하게 굴기에 곧바로 덤벼들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그들은 먼저 검을 뽑지는 않았다.
“왜 안 덤비지?”
소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아! 꼴에 정파다 이건가?”
소호는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이자가……?”
비학문 문도들은 소호의 웃음에 흥분해서 검을 뽑을 뻔했으나, 오히려 송문에게는 경각심을 준 듯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준엄하게 외쳤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런 식으로 간계를 부리려 하다니. 정도 문파인 비학문의 제자들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냔 말이다!”
송문은 명문 정파의 후기지수답게 당당하게 행동했다.
시전과 조금 떨어진 곳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소란에 주변 건물에서 창밖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미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송문은 눈빛에 살기를 담아 그런 자들을 째려보았다.
“히익!”
깜짝 놀란 사람들이 황급히 창에서 물러나 몸을 감췄다.
송문은 그제야 빙긋 웃었다.
이곳 관도 근처에서 비학문의 오제자인 그를 보면 다들 저렇게 어려워하고 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재밌네. 겁주는 게 습관인 걸 보니. 내가 조사한 게 맞는 것 같아.”
소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송문은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조사한 것? 나를 조사했소?”
“조사했어. 내가 무림에서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더럽고 흉악하더라고.”
“허?”
“다시 한 번 물을게. 송문, 간살했다면서?”
송문의 얼굴이 빨개졌다.
극도로 흥분했는지 눈의 흰자위까지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변했을 정도였다.
으득―.
송문은 이를 악물면서도 화를 한 번 더 참았다.
소호는 그가 인내심이 강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인정했다.
“그대는, 으음, 정말 말을 함부로 하는군. 얼굴에 난 상처도 그렇게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다가 얻어맞은 건가?”
“응? 음, 그건 맞는 말이네. 내가 못 할 말 하고 맞긴 했지…….”
“……뭐?”
“근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마을에서 좋은 일하며 살던 학사님의 처를 욕보이고 간살하다니. 너는 그러고도 정파의 제자인가? 아니,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던데 그러고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살 수가 있어?”
소호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성정이 나쁜 것도 나쁜 건데. 정말 뻔뻔하네.”
“그대는.”
뻔뻔하다는 말이 그를 자극한 것일까.
송문은 결국 이를 드러냈다.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그런 자에게 모욕을 들을 이유는 없어.”
“내 이름?”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순순히 말해 주었다.
“내 이름은 장소호야. 들어 본 적 있어?”
“장소호? 작은 호랑이라니. 설마?”
“학관에선 천무공자라고 불렸는데.”
송문은 놀란 듯 처음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가늘게 뜬 눈에서는 의심과 분노가 섞여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흐흐흣.”
“도련님?”
송문이 갑자기 웃기 시작하자 주변의 문도들이 깜짝 놀라며 송문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들은 소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반신반의하는 와중이었다.
“도, 도련님이 웃는다.”
“야. 말려. 말…….”
근처에 있던 문도들 중 한 명이 송문의 소매를 잡으려 하자, 송문은 재빠른 정권 일타로 문도의 턱을 후려쳤다.
“억!”
얻어맞은 자도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지만, 송문의 일권에는 반응도 하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도, 도련님, 진정하세요.”
“여기서 흥분하시면……. 히익!”
송문은 살기를 번뜩이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송문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비학문도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스릉―.
송문이 뽑아 든 검은 날이 잘 갈린 청강검이었다.
회백색 검신 위로 푸른빛 예기가 서늘하게 감돌았다.
“천무공자. 천무공자라.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긴 했지.”
척.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검끝을 소호에게 겨누는 송문은 살기에 휩싸인 채 웃고 있었다.
“진짜겠지. 가짜 같지는 않아. 당당한 얼굴을 보면 알 수 있거든. 그렇지?”
“당연히 진짜지.”
소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이런 약골이었어? 일류 고수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무산학관은 수준이 무척 낮은 모양이군. 실망이야. 실망이 아주 커.”
송문은 말로는 실망이라고 하지만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마치 자신의 가치를 증명받은 것처럼.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욕망과 야심이 두 눈에서 번들거렸다.
“재밌네.”
소호는 웃었다.
“뭐가 재밌지?”
“너 말이야, 송문.”
“엉?”
“안목이 점소이보다 못해.”
눈살을 찌푸리는 송문을 보며 소호는 소리 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