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41화 (470/686)

14권 15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5)

비학검은 균형이 잘 잡힌 검술이었다.

부드러우면서 날카롭게 움직이는 검끝은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처럼 표홀했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성큼성큼 움직이는 보법은 묵직하게 균형을 잡아 주었다.

“하!”

파라락―.

체구는 평범했으나 손과 팔이 긴 송문은 그런 비학검과 매우 잘 어울렸다.

성큼 다가와 화려하게 검술을 펼치는 송문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대한 학 한 마리가 눈앞에 있는 듯했다.

위압감이 퍼져 나온다.

날카로운 예기가 칼뿐만이 아니라 송문의 몸 전체에서 섬뜩하게 흘러나왔다.

‘과연.’

소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상승 무공도 아닌 비학검 하나만으로 검기상인의 경지에 오르다니.

게다가 몸에서 예기를 뿜어내는 것을 보니 신검합일도 머지않은 수준이다.

과연, 인근에선 적수가 없을 법도 했다.

쒜에에엑―!

송문의 넓은 소맷자락이 펼쳐지면서 날카로운 검끝이 소호의 목젖을 노리고 날아왔다.

‘곧바로 살초네.’

소호는 왼발을 반보 뒤로 빼면서 태극의 묘리를 살려 검을 피해 냈다.

거리로 따지면 한 치.

날카로운 청강검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소호의 목을 비껴 갔다.

“흡?”

찰나의 순간.

자신의 검초가 빗나간 것을 확인한 송문의 경악한 눈빛과 소호의 담담하면서 차가운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툭.

소호는 오른손 장타를 송문의 검배에 갖다 댔다.

손바닥과 차가운 강철의 만남.

왼쪽으로 물러선 만큼 생겨난 회전력이 오른손 손바닥을 폭발적으로 회전시켰다.

따앙!

“……!”

마치 쇳덩이라도 후려친 것처럼 옆으로 튕겨나간 검을 붙잡느라 송문의 오른손 팔목에 힘줄이 돋아났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뜬 눈.

충격.

부정.

분노.

송문의 눈에 뚜렷한 감정이 스쳤다. 그는 악에 바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휘리리릭―.

치잉―.

장중한 검초.

송문은 양팔을 크게 펼쳤다.

마치 야생동물들이 몸집을 부풀리듯.

소맷자락이 펼쳐지며 그의 존재감이 골목을 꽉 채웠다.

“도, 도련님이 귀학검을 쓴다!”

“도망쳐! 빠져나가!”

갑자기 비학문 문도들이 골목반대쪽으로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귀학검이 뭔데? 무서운 무공인가?’

소호가 살짝 긴장하며 지켜보는 사이, 송문에게서 느껴지던 예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우우웅―.

송문의 검끝이 떨렸다.

내공만으로는 지금의 소호 이상.

송문의 목덜미에 핏줄과 힘줄이 동시에 돋아났다.

“흐으읍!”

원래도 예리했던 청강검 검끝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검기가 솟구쳤다.

송문은 버거워 보이긴 했지만 뿌듯한 얼굴이었다.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한 검기를 만들어 이건 어떠냐는 듯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호를 향해 겨누었다.

스릉―.

송문이 과시하듯 검을 휘두르자 단단한 돌담에 선명하게 검 자국이 남았다.

“어…… 응?”

소호는 송문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 ‘귀학검’의 원리를 한눈에 알아챘다.

‘혈도의 일부를 봉해서 내공의 흐름을 강하게 하는 종류구나. 곡지혈에서 기의 흐름을 좁히는 건가? 흐음, 참신하긴 한데. 잠깐 쓰기엔 좋겠지만 계속 쓰면 기의 흐름이 엉키겠어.’

소호가 귀학검의 요체를 이미 파악했다는 걸 송문은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남긴 칼자국을 보라는 듯 돌담을 힐끗 보면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멍청한 놈. 이 무공은 우리 비학문의 비전신공인 귀학검이다. 네놈은 내가 귀학검을 쓰게 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송문은 어두운 살기를 뿜어냈다.

마치 파락호가 선량한 사람들 눈앞에서 칼을 과시하듯, 송문은 소호의 눈앞에서 검기를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어, 응. 검기가 선명하네.”

소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떨떠름하게 칭찬해 주었다.

“흐흐흣.”

소호가 떨떠름한 모습이 겁을 먹은 듯이 보였던 걸까.

송문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네놈의 얕은 수작은 이제 끝이다. 챠핫!”

송문은 곧바로 검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학의 날개처럼 크게 펼친 검 동작 사이에 심장을 꿰뚫을 것 같은 예리한 검결이 숨어 있었다.

‘역시 검을 휘두르는 것만큼은 제법.’

가벼운 발놀림도, 원하는 곳에 원하는 시점에 검을 갖다 댈 수 있는 섬세함도 모두 타고난 재능이다.

소호는 송문의 검재가 꽤나 뛰어나다는 건 인정했지만, 그래도 그가 지금껏 보아 온 무재들과 비교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유준이나 태성천 선배. 뭐, 그 사람들보다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송문의 검술에 쩔쩔맬 만큼 소호의 경험은 얕지 않다.

다만 내공의 제약은 있다.

날아오는 검기는 예전의 소호 같았다면 호신강기로 받아 냈을 수도 있었다.

사자후를 터뜨려서 검기 따위는 박살 내고, 그 뒤에 품 안으로 파고들어 소림오권으로 타격.

순간적으로 그런 최적의 해법이 떠올랐지만, 지금의 소호는 그걸 실행할 능력이 되지 못했다.

기공으로 승부를 쉽게 내는 것.

그걸 할 만한 내공이 받쳐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좀 더 몸을 움직여야지 뭐. 이것도…… 나름 재밌고.’

소호는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거대한 학이 깃털을 뿌리듯, 날카롭게 짓쳐드는 검첨을 소호는 맨손으로 살짝살짝 밀어냈다.

피슈슈슉―.

우우웅!

사혈을 노리고 쏘아지는 검초들은 손바닥으로 방향만 틀어내고, 허초이면서 위력만 높은 검격들은 제운종의 묘리를 살려 가볍게 몸을 띄워 뒤로 훌쩍 물러났다.

“……!”

맞춰야 할 상대를 잃어버린 검초.

송문은 힘을 빼지 않았다.

치르릉―.

갈 곳을 잃은 검기는 골목 안쪽을 갈가리 찢으며 사방으로 폭산했다.

촤자자자작―.

푸확!

까드득!

졸지에 골목 내부의 집 담벼락과 나무 지붕들이 예리하게 잘려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궁!

돌담이 무너지면서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른다. 그 속에서 송문의 두 눈이 짐승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검기가 날카롭네.”

소호는 잘려 나간 건물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며 무리해서라도 막을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거 고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소호는 경험이 많다.

풍운객잔의 담벼락을 고쳐야 할 때마다 일손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송문. 저건 네 돈으로 물어줘라?”

“……운이 좋았구나!”

송문은 이를 갈면서 성큼성큼 소호에게로 다가왔다.

“이번엔 피하지 못할 것이다. 너도 그년처럼 만들어 주마!”

잔뜩 흥분해서 내뱉은 송문의 말은 소호의 눈빛을 차갑게 만들었다.

“그년이 누구야? 학사님의 처?”

“팔다리의 힘줄을 잘라 주마. 검끝을 목에 찔러 넣고 내게 살려 달라 빌게 해 주겠다……!”

“생각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네.”

비학검을 펼치기엔 좁았는지 송문이 골목을 빠져나왔고, 그들은 광장에 서게 되었다.

“히이익!”

“집이! 건물이이!”

“무너진다! 아이고, 우리 집!”

갑작스레 봉변을 당한 사람들이 울부짖으면서 뛰쳐나오고, 그 소란에 놀란 행인들이 두 사람을 주목했다.

“죽어랏!”

이미 눈이 돌아 버린 송문은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지만 소호는 아니다.

주변엔 비학문의 검귀를 알아본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소호는 날아드는 검기 앞에서 빙긋,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짝!

“어……?”

송문은 검을 찔러 넣은 순간 자신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멍하니 다시 정면을 보는 그의 왼쪽 뺨이 손바닥 모양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할 말 다하고 공격할 만큼 여유가 있어?”

소호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지만,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이놈이!”

송문의 검끝에서 검기가 더욱 진해졌다.

쒜에에엑―!

빠르게 찔러 오는 검공.

비학검의 살초가 터져 나오는 순간, 또 한 번 송문의 고개가, 이번엔 오른쪽으로 휙 돌아갔다.

짝!

“흡?”

이번엔 아까보다 뺨을 때리는 강도가 더욱 셌다.

게다가 이번엔 송문도 소호의 손이 날아오는 모습을 분명히 확인했다.

“무, 무슨?”

송문의 왼쪽 뺨이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소호는 재밌다는 듯이 손바닥을 흔들었다.

“검기만 신경 쓰면 어떻게 해? 기운이 흔들리니까 동작도 흔들렸잖아.”

“이, 이놈. 어디서 사술을……!”

송문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고, 이번엔 왼쪽으로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소호는 송문을 향해 다가가면서 계속해서 장타를 날렸다.

짝!

“발끝이 세 치 정도 덜 나왔어. 그래서 하체가 불안하고.”

짝!

“마음이 흔들리니 검끝이 날카롭지 못하고.”

짝!

“이젠 몸동작이 학의 날갯짓 같지도 않네? 비학문 무공은 어디로 갔어?”

짝! 짝! 짝!

소호는 일방적으로 앞으로 다가갔고, 송문은 검을 계속 휘두르는데도 점점 뒤로 밀려났다.

“크아아아!”

짝!

양쪽 볼이 퉁퉁 부은 송문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는……! 고작 일류 고수일 뿐인데……! 나는 무산학관에도 합격한 기재인데……!”

“그래? 합격했었구나? 그런데 결국 안 들어갔으면 아무것도 못 배운 거야.”

소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문을 알아보고 다가왔던 구경꾼들이 백 명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는 광경에 압도되고 있었다.

그들을 괴롭히던 비학문의 악인이, 정체모를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뺨을 얻어맞는 모습은 그들에게 큰 충격과 희열을 동시에 안겨 주고 있을 것이다.

“오학검 송문.”

소호는 발끝에 내공을 실어서 송문의 명문혈을 걷어찼다.

“컥.”

송문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기침을 토해 냈지만, 두 눈은 아까보다 훨씬 맑아졌다.

소호가 걷어찬 명문혈이 귀학검을 전개하면서 막힌 혈도를 조금 뚫어 준 덕분이었다.

“쉴 시간 없어. 계속 맞아야지.”

“이놈……! 죽여 버리겠다……!”

“그래. 그거야. 너 지은 죄 갚으려면 한참 남았어.”

송문은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고, 소호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

“어째 마을이 시끄러운 것 같은데?”

“오늘 장 서는 날인가? 아닐 텐데?”

비학문의 대문을 지키던 두 사람은 찜찜한 얼굴로 서로를 힐끗 쳐다봤다.

예전에 저렇게 마을이 시끄럽던 날 ‘그 일’이 있었던 탓이다.

“저거 꼭, 예전에 그 학사의 처가 잘못되었을 때랑 비슷한데…….”

“쉿! 이 사람, 미쳤어? 왜 그 이야기를 꺼내?”

문지기 중 한 명이 사색이 되어 다른 한 명을 뜯어말리는 사이, 비학문의 정면으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헛! 뭐야!”

“멈춰라! 여긴 비학문……. 어? 도련님?”

문지기들은 그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고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비학문 오제자 송문.

평소엔 옷에 작은 먼지 하나만 묻어도 질색하는 깔끔한 성격답지 않게, 그는 진흙탕에서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흙투성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모습이 이상했다.

벌겋게 충혈된 두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양 볼은 누군가에게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빨갛게 부어 있었고, 항상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묶고 다니던 머리는 거지처럼 산발이다.

“도, 도련님. 대체 무슨 일이……?”

“누굽니까? 천무련입니까?”

문지기들이 안에 있는 비학문주에게 알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송문은 비학문의 독문신법인 학익보(鶴翼步)를 써서 날 듯이 도착했다.

“도련님, 잠시만 계십쇼. 의원을 부를까요? 일단 문주님께 알리겠…….”

“비켜!”

확― 하고 밀어젖히는 송문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문지기는 반항도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천익검…… 검…… 그게 있어야 해……! 그래, 그 검이 없어서 그런 거야……! 난 약하지 않아……!”

송문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면서 혼자 대문을 격하게 밀치고 뛰어 들어갔다.

문지기들은 그제야 송문의 손에 검이 들려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들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면서 서로를 응시했다.

“이, 이게 무슨……”

“잠깐 천익검? 그건 우리 비학문의 무가지보……!”

비학문주의 방 앞 제단에 걸어 둔 신검(神劍)이 바로 천익검이었다.

백 년 전에 초대 비학문주가 사용했다는 검.

그 당시에는 천하에 내로라하는 검객들이 다 탐을 냈다던 보물이 바로 천익검인 것이다.

“도, 도련님!”

“문주님께 어서 알려야……!”

황급히 안쪽에 비상 상황을 알리려는 순간, 그들은 비학문을 향해 또 다른 인물이 접근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어……?”

문지기들은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천천히 뒷짐을 지고 다가오는 청년.

흰색 비단 장포에 금사로 멋들어진 문양을 새겨 넣은 부잣집 도련님이 비학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