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16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6)
“고생이 많네요.”
소호는 태연하게 문지기들을 향해 다가갔다.
“원래 아무리 조용한 마을도 유별난 사람이 하나 나타나면 난리가 나는 법이거든요.”
어깨를 으쓱하는 소호는 마치 비학문과 오랫동안 알아온 지인처럼 보였다.
“오늘 좀 시끄럽죠?”
“그, 그렇소만.”
“방금 마을 학사님의 처를 잔인하게 간살한 광인이 한 명 들어갔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아저씨들은 그걸 조용히 묻어 두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요?”
“……!”
문지기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은 혼란에 빠진 채 주춤주춤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송문이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난 데 이어 낯선 청년이 비학문의 면전에서 당당히 이런 말을 하니 어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나, 나는…….”
“조용히 해!”
문지기 중 한 명이 얼떨결에 대답하려는 것을 다른 한 사람이 옆구리를 찔러서 막았다.
“너는 안에 들어가서 장문인께 상황을 알려! 그리고 소협! 소협께선 비학문에 어떤 용무가 있으십니까?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지금 저희 비학문에서는 손님을 받을 때가 아닙니다.”
소호는 신기하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흥미롭네요.”
“소협. 용무를 밝히시면 우선 저희 문파 내부의 일을 좀 처리한 뒤에…….”
“제가 적인 것 같다고 판단했음에도 정중히 대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끄네요. 무림 경험이 많은가 봐요.”
소호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은자 하나를 손가락을 튕겨서 위로 쏘아 올렸다.
“어?”
“으음?”
사람은 무언가가 위로 솟구치면 자연스레 눈으로 쫓게 되어 있다.
그건 본능에 내재된 반응이기도 했고, 잘 단련된 무인으로서 가지는 뛰어난 반사 신경 덕분이기도 했다.
게다가 반짝거리는 은자다.
두 사람이 자연스레 시선을 들어 올린 사이, 문지기 한 명이 “억!” 하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모로 꺾은 채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 무슨……!”
두 번째 문지기는 변고를 감지했지만 허리에 찬 검을 뽑을 틈도 없었다.
소호는 눈 깜짝할 새에 다가가 그의 목 줄기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크흡!”
소호는 문지기가 다급하게 내지르는 주먹을 손등으로 옆에서 밀어내듯 힘을 흩어 버렸다.
아래에서 올려 차는 문지기의 등각도 마찬가지다.
그가 발을 다 뻗기도 전에 소호가 무릎 위쪽을 가볍게 누르면서 바깥쪽으로 비틀자, 자연스레 각력이 흩어졌다.
“……!”
순식간에 목줄을 잡힌 문지기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엔 소호는 일류 고수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절정 고수처럼 수준 높은 무리(武理)만으로 공격을 중간에 흩어 버렸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저 아저씨는 죄책감이 있는 것 같았고,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걸 알면서도 감추려 했죠?”
“커, 큭, 무, 크, 무슨……?”
소호는 대문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끼기긱―.
쌍두마차도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큰 대문은 거친 경첩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소호는 문지기의 명치를 걷어차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커헉!”
바닥을 구른 그가 비틀거리면서 바닥을 기고 있을 때, 소호는 안으로 들어와서 비학문의 정문을 걸어 잠갔다.
“자, 이제 아무나 못 나가게 됐고.”
소호는 바닥에 널브러진 문지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소호는 아까 그를 발로 걷어찰 때 이미 혈도를 제압했다.
상처 입은 개처럼 바들바들 떠는 몰골에서 벗어나려면 한 시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알아챈 문지기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충성스러운 행동을 했다.
“비사아앙―! 비상이다아! 침입자다아아―!”
소호는 묵묵히 팔짱을 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학문의 부지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대문에서 좌측과 우측으로 뻗은 담장의 길이만 해도 웬만한 대갓집 열 채는 지을 수 있을 만큼 부지가 넓었다.
“휘유, 돈이 많은가 보네. 백 년간 부를 많이 쌓긴 했나 봐.”
소호는 아예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산책을 하듯 걸어갔다.
웅성거리는 소리.
비학문 전체가 소란스럽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소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 새끼―!”
소호를 가장 먼저 마중 나온 자.
비학문의 오제자 송문이었다.
그는 오른손에 범상치 않은 흰색의 검을 들고 있었다.
손잡이 또한 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가죽으로 잘 마감해 두었고, 새하얀 검신의 중심엔 깊이 팬 혈조와 학의 날개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진 명검이었다.
“캬아아앗!”
문답은 필요 없었다.
송문은 곧바로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귀학검.
온몸의 피부 위로 힘줄이 돋아나게 만드는 기묘한 호흡법으로 송문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검기를 내뿜었다.
치이이잉―.
순백의 명검이 기묘하게 떨리며 소호를 향해 쏘아졌다.
강력한 기세.
날카로운 예기가 심장을 가를 듯 예사롭지 않다.
“그래 봤자 무공은 똑같은데.”
소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아까 광장에서 송문이 도망치듯 내던지고 간 검이다.
소호는 태극검의 묘리를 살려 송문의 귀학검을 비스듬히 아래로 흘려냈다.
까드드득―.
그런데 아까와는 다르다.
송문의 검은 소호가 흘려내는 태극의 움직임에 휩쓸리지 않고, 기묘한 떨림을 뿜어내며 소호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채앵!
“호오?”
소호는 감탄했고, 송문의 눈에서는 희열이 떠올랐다.
“역시! 이거지!”
송문은 기고만장하여 검술을 전개했다.
챙! 챙! 채채챙!
일 초가 이 초가 되고.
이 초가 십 초식이 되었다.
송문은 잔뜩 화가 나 날개를 퍼덕이는 학처럼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화려하면서도 묵직한 검격이 연이어 나오면서, 소호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이놈! 찢어죽이겠다! 감히 나를 때렸겠다!”
쨍! 채챙! 까앙!
“본 공자는! 말을! 지킨다! 그년처럼, 네놈도 죽여 버릴 거다!”
채채챙!
계속해서 물러나는 소호의 비단 장포가 몇 번이나 검에 베였다.
송문이 손에 들고 있는 비익검의 조화는 신묘했다.
분명히 아까와 똑같은 검술인데, 묘하게 검이 떨리는 데다가 다른 검을 쓸 때보다 검이 뻗어 나오는 속도가 빨라서 자꾸만 소호의 옷자락에 작은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캬하하핫!”
잔뜩 신이 난 송문은 미친 듯이 검을 놀렸다.
양 볼에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남은 모습.
퉁퉁 부어 우스운 꼴이지만, 그래도 두 눈의 살기만큼은 우습지 않았다.
“과연.”
소호는 송문의 공격을 빈틈없이 막아 내면서, 주변을 힐끗 둘러보았다.
주변은 이미 기척을 듣고 달려 나온 비학문도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양옆을 막은 것은 일반 문도들이고, 안채에서 뛰쳐나온 네 사람은 아까 마을에서 봤던 비학문의 대제자부터 사제자까지의 네 명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십 대로 보이는 비학철검 송양이 나오자, 소호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드디어, 문주가 나왔네.”
정신없이 검을 전개하던 송문이 살기에 취한 채 되물었다.
“뭐라고 지껄이느냐!”
“글쎄?”
소호는 웃었고, 방금 막 도착한 비학문주는 곧바로 노성을 터뜨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문지기 한 명이 쓰러져 있고, 더러운 몰골이 된 오제자 송문이 문파의 보검을 들고 웬 청년과 싸우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지 않느냐!”
평정을 잃은 비학문주가 고래고래 소리치자, 정신없이 검을 날리던 송문의 검끝이 조금 둔해졌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문주를 조금 신경 쓰긴 하는구나.’
소호는 빙긋 웃었다.
그 순간 그의 검세가 바뀌었다.
채채챙―!
“엇?”
소호는 자세를 바꾸었다.
허리는 꼿꼿하게, 보폭은 넓게.
양팔은 마치 학의 날개처럼 크게 벌려, 화려하면서도 장중하게 검을 휘둘렀다.
“비학검!”
소호의 검법을 알아본 비학문도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챙! 채챙!
“헙!”
소호가 마음먹고 비학검을 펼치기 시작하자, 정신없이 몰아치던 송문이 당황하면서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소호는 일부러 송문과 똑같은 초식만을 사용했다.
상단 허초에 이어 하단을 노리는 초식은, 똑같이 하단을 노리는 초식으로 방어했고, 뒤로 돌면서 살짝 검끝을 감췄다가 크게 내려치는 검은, 똑같이 내려치는 초식으로 검끝을 튕겨 냈다.
“흐흡!”
똑같지만 똑같지 않다.
송문이 화려하게 검을 써서 상대를 짓누르려 한다면, 소호의 비학검은 필요할 때만 살짝살짝 발톱을 드러내 철저하게 맥을 끊는 간결한 검술이었다.
“오 공자가 밀린다……!”
“비학검과 비학검의 싸움에서 밀리다니. 일학검도 오학검한테는 검에서 지는데……?”
“쉿, 쉿!”
“문주님께 숨겨 둔 제자가 있었던 건가……?”
소호의 정체를 모르는 비학문도 입장에선 갑자기 나타나 비학검으로 송문을 압도하는 청년의 등장은, 문주가 숨겨 뒀던 제자의 등장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소호가 송문을 몰아세우면서 정세를 살펴보니, 대공자로 불린 일학검 송철은 문주에게 성을 내면서 다급하게 뭔가를 묻고, 비학문주는 얼굴이 벌게진 채 아니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송문.”
“허억, 허억.”
송문의 얼굴은 퍼렇게 질려 있었다.
문파의 보검을 들고 덤볐는데도 상대가 안 된다.
심지어 상대는 그가 쓴 것과 똑같은 비학검으로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귀학검의 비술을 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소호는 한 걸음씩 점점 다가가며 송문을 몰아세웠다.
“하체는 불안정하고.”
채앵!
“마음이 흔들리니 검끝은 날카롭지 못하고.”
쩌엉!
“검의 모습은 학을 닮아 있지 않으니.”
까아앙―!
학의 날개처럼 웅장하게 펼쳐진 검이 송문의 손에 잡혀 있던 비익검을 쳐서 위로 날려 버렸다.
소호는 학처럼 우아하게 한 걸음을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쏘아지는 첨격.
피슈슈슉―!
일순간에 네 번의 찌르기로 송문의 양쪽 어깨와 양쪽 허벅지를 관통한 소호가 학처럼 뛰어올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 어찌 비학검을 다 익혔다고 말하겠나?”
피슉―.
두 눈의 초점을 잃은 채 비척거리며 물러서는 송문의 어깨와 허벅지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끄아아아악―!”
고통은 한 박자 늦게 다가왔다.
송문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를 퍼덕거리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졌다.
“이런! 사제!”
“혈도를 점해라! 상처를 지혈시켜!”
다급하게 달려온 나머지 사제자들이 송문의 상처를 손으로 눌렀다.
“사제! 가만히 있어라!”
“으아아악―!”
일학검 송철이 송문의 몸에 혈도를 점하려 했지만, 송문은 몸을 비틀며 발악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난폭한 성질에 패배감을 못 이기는 듯했다.
송문은 바닥에 떨어진 비익검을 보며 절규했다.
“천무공자아아―! 네 이놈―! 비학검은 언제 익혔느냐! 아악! 나를 농락했어어―!”
움찔.
장내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비학문의 모든 사람들이 불신과 경악에 사로잡혀 있었다.
천무공자라니?
천무련의 천무공자란 말인가?
“이 무슨……!”
일학검 송철이 얼굴에 묻은 송문의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경악한 얼굴로 소호를 바라본다.
“천무공자라니. 그대가 천무공자라면, 비학검은 대체 언제 익힌 거지……?”
송철이 중얼거리는 말은 비학문도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연이어 질문을 던지려던 송철이 누군가의 손에 가로막혔다.
비학문의 문주.
비학철검 송양이 송철을 가로막으면서 앞으로 나선 것이다.
“천무공자가 지닌 삼보(三寶)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는데, 그게 진짜라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는구려. 허어, 한 번 보기만 해도 무공을 익히는 재능이라더니. 놀랍소. 진실로 놀라워.”
송양은 정파의 명숙처럼 자신의 뻣뻣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인자하게 말했다.
“허나 이것 참, 난감하군. 비학문의 비전검공인 비학검을 익혀 버리다니. 게다가 그렇게 도둑질해 익힌 무공으로 내 오제자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이 무슨 행패란 말이오? 강호의 무림 협사들이 대체 이 일을 뭐라 하겠소?”
송양은 노회한 강호인답게 속내를 감추고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으나, 두 눈에 숨겨진 살기는 숨기지 않았다.
송양이 옆으로 손짓하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비학문도들이 슬금슬금 소호의 양옆으로 다가오며 그를 붙잡을 것처럼 움직였다.
“흐음.”
소호는 태연하게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다시 송양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소호는 송양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순수하게.
그 어느 때보다도 햇살처럼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지랄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