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17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7)
“뭐……?”
비학철검 송양은 물론이고 비학문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에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 무슨……!”
나이 오십이 넘도록 온갖 경험을 했던 비학문주조차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익, 어찌……!”
무슨 말을 하고는 싶은 듯한데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 모양이었다. 비학문주는 숨을 씩씩거리면서 뒷목을 붙잡았다.
소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짝!
“아, 내가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했구나?”
소호는 아직 멍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미안하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정파라는 껍데기 아래 백 년간 마을 사람들을 괴롭혀 온! 산적만도 못하고 흑도보다 잔인한 천하의 몹쓸 쓰레기 같은 문파가 어딜 협박질일까요? 그렇죠?”
소호는 다시 한 번 방긋 웃었다.
비학문주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천무공자!”
기가 막혀 뒤로 넘어간 비학문주를 대신해서 일학검 송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당신의 명성이 높다한들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것이오. 이곳 비학문의 담장 안에서 우릴 모욕하다니! 뒷일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뒷일? 재밌네요. 예를 들면요? 어떤 뒷일이 있을까요?”
“고작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청년이 명성을 좀 얻었다고 어찌 이리 기고만장한가!”
송철은 자신이 시대의 협객인 것처럼 준엄하게 일갈했다.
부릅뜬 눈.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소호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구나!”
“오오.”
소호는 감탄했다.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습니다. 뻔뻔하기까지 하다니. 대단하네요.”
“어허!”
일학검 송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소호를 살폈다.
“그리 말했는데도! 끝까지 우릴 우롱하는가!”
소호는 보이지 않는 무형기가 뻗어 나와 기감을 간질이는 것을 느꼈다.
‘내 무공을 살피시겠다?’
소호는 무형기를 느끼지 못한 것처럼 그저 묵묵히 웃고만 있어 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송철은 그제야 안심한 듯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음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군!”
그는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주변의 비학문 문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공자를 제압하라! 아무리 천무련의 사람이라고 한들, 이런 무례를 가만히 둘 수는 없는 법이다!”
일학검 송철의 지시가 떨어지자 주변에 있던 비학문 문도들이 슬금슬금 소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소호는 피식 웃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의 분위기는 마치 찻잔 안을 가득 채운 찻물이 찰랑거리며 넘치기 직전의 상태와 같았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비학문 문도들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방금 전에 소호가 비학문 최고의 검객인 오학검 송문을 일방적으로 무너뜨리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본 탓이다.
하지만 이런 경계심이 오래가진 못한다.
숫자상으로는 비학문이 백여 명이나 모여 있으니, 소호 한 사람에게 겁을 먹을 리가 없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균형을 깨면 찰랑거리던 찻물이 넘쳐흐르듯 모두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 게 뻔했다.
“우습네요.”
스읍-.
소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쿵.
강하게 발을 굴렀다.
소호의 두 눈에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가 싶더니, 발밑의 땅이 지진의 전조처럼 울렁거렸다.
“어어?”
“뭐, 뭐야. 땅이……?”
일반 문도들은 물론이고 비학문주와 일학검 송철마저 깜짝 놀라 소호를 바라본다.
‘지금은 이 정도인가.’
소호는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집혼기가 있었다면 지진을 일으키듯 땅을 흔들어서 저들을 넘어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집혼기가 없는 몸.
게다가 내공까지 묶여 있는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소호는 의연하게 버티고 서서 역근경 진기를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몸이 떨렸다.
단전에서 노도처럼 밀려든 역근경 진기가 소주천을 이루면서 온몸에 힘을 실어 주었다.
비록 칠점법으로 점혈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소호가 순수하게 연공을 통해 쌓은 진기는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반 갑자 정도의 내공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순수한 역근경 진기이기에 내재된 힘만큼은 그 어떤 무공심법에도 뒤지지 않는 순정한 힘이었다.
‘관원, 음교, 기해, 석문. 다행히 단전의 혈도 네 개는 모두 무사해. 가슴 쪽 혈도들이 막혀서 대주천은 안 되니까. 소주천으로, 조금 둘러서 움직이면…….’
우우웅-.
소호의 두 눈에서 신광이 번뜩였다.
황금빛 법광이 은은히 흘러나와 소호를 신비롭게 감쌌다.
“버, 법광?”
“설마 전륜법광인가? 소림……? 설마!”
소호는 당황하는 자들을 당당하게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비학문은 들어라!”
소호는 머릿속으로 그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무섭고 위압적인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남들을 압도할 수 있는 사내.
감히 숨도 쉬지 못할 압박감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천신(天神) 같은 위엄으로 영혼을 짓누르는 절대 강자.
‘아버지처럼. 그렇게 해 보자.’
소호는 기파를 뿜어냈다.
장기린처럼.
전장의 붉은 악귀라 불리던 자.
홀로 황실에 쳐들어갈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자가 바로 나라고, 소호는 머릿속에서 스스로 되뇌었다.
“그간 비학문의 악행! 특히 오학검 송문이 저지른 잔악한 범행을 알고 있었으면서 두둔한 자들 모두! 부끄럽지도 않은가!”
소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비학문을 떨쳐 울렸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위압적인 목소리에 소호를 향해 다가오던 비학문도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고도! 자신들을 정파의 일익이라 소개할 수 있는가!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는 말이다!”
소호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신광이 모두를 압도했다.
심지어 경험 많은 노강호인 비학문주와 삼십 대 중반의 나이인 일학검 송철마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소호를 바라볼 정도였다.
쿵.
소호는 크게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비학문 문도들이 물결치듯 뒤로 물러났다.
“천무련의 련주, 나 천무공자 장소호가 내 이름을 걸고 말하겠다! 스스로의 죄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자. 지금이라도 비학문을 나와 지난 죄를 속죄하려는 자는 옆으로 빠져라!”
소호는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소호의 우측이었다.
“아…….”
“으음…….”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음만이 흘러나오길 잠시.
“뭐야. 양 형! 미쳤어?”
“아냐, 이게 맞아.”
소호의 기세에 압도된 것일까.
아니면 평소에 갖고 있던 죄책감이 이 일로 터져 나온 것일까.
다섯 명 정도의 비학문도들이 소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주춤거리며 움직였다.
“천무공자. 정말로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예. 속죄할 수 있도록 해 주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섯 명의 사내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
키가 크고 왼쪽 볼에 큰 칼자국이 남아 있는 청년은 비학문주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문주님.”
양씨라 불린 이십 대 중후반 정도의 사내였다.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비학문주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이 일은…… 천무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는 너무 지나쳤습니다. 이제는 속죄하고 싶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안색은 하얗게 질려서 겁에 질린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대차게 속내를 내뱉을 줄 아는 사내였다.
“야. 양명기!”
일학검 송철이 살기를 드러냈다.
“미친 건가? 이 자리에서 감히!”
“첫째 도련님. 저희 다…… 이 동네 출신 아닙니까? 그 학사님. 그리고 학사님의 처에게 몹쓸 짓을 한 거…… 너무한 겁니다. 뒤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든, 흑도 사람들을 대신해서 일을 돕든, 무슨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선 만큼은 넘어선 안 되었던 겁니다.”
양명기라는 자는 더듬거리면서도 할 말을 다 했다.
그 말에 흔들린 것일까.
입을 꽉 다물고 고민하던 비학문 문도 스무 명이 양명기의 뒤에 따라서 붙었다.
도합 스물다섯 명.
비학문 문도 스물다섯은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으나, 눈빛만큼은 훨씬 편안해 보였다.
“이 멍청한 놈들이!”
일학검 송철이 검을 빼 들었다.
채채챙-!
그가 검을 빼자, 남은 칠십여 명의 비학문 문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송철아.”
“예! 문주님! 하명하십시오.”
“천무공자를 붙잡아라. 이왕이면 앞으로 무공을 쓰는 데 지장이 있게 만들면 좋겠구나.”
“예!”
비학문주와 일학검 송철이 나란히 닮은 얼굴로 섬뜩하게 웃었다.
“잡아두면 천무련과는 좋은 협상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저놈들은…….”
비학문주 송양이 전에 없이 사나운 눈빛으로 양명기를 비롯한 스물다섯의 청년들을 노려보았다.
“문파의 배신자들이다. 다 붙잡아서 무공을 회수해라.”
무공에 대한 회수.
비학문의 문규에 따르면 단전을 부수고 근맥을 끊는 걸 의미했다.
양명기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소호를 힐끔 쳐다본 뒤, 모든 것을 포기하듯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래도 다행히 양심 있는 사람들도 있었네요.”
“천무공자! 아직도 입을 놀릴 건가!”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이 이상 속죄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 거죠?”
형세가 많이 기울었음에도 소호가 당당한 탓일까.
비학문도들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더 이상 옆으로 나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 이게 끝이네요.”
“가서 잡아와!”
일학검 송철의 명령을 가로막듯 소호가 크게 소리쳤다.
“패 소협!”
소호는 비학문 안채의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있다.
건장한 체격.
사내답게 진한 외모를 지닌 구파일방의 공동 전인.
왼쪽 허리엔 태극경을, 오른쪽 허리엔 작은 목탁을 차고 있는 범상치 않은 청년이 지붕 위에서 태연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탁하겠습니다. 이들을 지켜 줘요. 비학문에 남은 마지막 양심입니다. 마을에 속죄를 시켜야죠.”
패원강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면서 훌쩍 몸을 날렸다.
“저 신법은……?”
“대단한 무공……!”
패원강은 발목의 힘만으로 살짝 뛰어오른 것 같았는데, 마치 등 뒤에 날개가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오 장(丈) 거리를 날아서 소호의 곁에 가볍게 착지했다.
비학문주를 비롯한 주요 제자들의 눈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신법을 지닌 자였다.
가진 바 무공이 약할 리가 없었다.
“소형제는 여러모로 나를 놀래키는군. 조용히 지켜보려고만 했는데 굳이 날 찾아내서 이렇게 부탁을 하다니.”
패원강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들을 지켜 달라……. 좋소. 그러면 저들은 어떻게 할 것이오?”
패원강이 전에 없이 싸늘한 어조로 가리키는 자들은 비학문주를 비롯한 나머지 문도들이었다.
소호는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어 거침없이 대답했다.
“무공을 ‘회수’하고 관청에 던져 줄 겁니다.”
소호는 빙긋 웃었고, 비학문주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