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18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8)
“관청이라. 그들도 한통속 아니겠소? 백 년이나 비학문을 가만히 두고 보았다면 지금에 와서 소형제의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은데.”
“듣게 만들어야죠.”
소호의 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패원강은 나직하게 웃었다.
“싸움은? 혼자 할 것이오?”
“네.”
“……숫자가 많아 보이는데.”
“제가 할 일이니까 해야죠.”
소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은 뒤 비학문주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저……!”
반면에 비학문주와 네 명의 제자들은 다들 분기탱천하여 얼굴이 터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철아.”
“예, 문주님.”
“일단 천무공자부터 잡아라. 저들은…… 나중에 상대하도록 하자.”
“예.”
일학검 송철이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잡아와! 비학문을 우습게 본 걸 후회하게 만들어라!”
“옛!”
비학문 문도들은 힘차게 대답했으나, 대답과 달리 막상 소호를 향해 덤벼들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망설였다.
방금 전에 소호가 보여 준 위압적인 모습이 강하게 인상에 남아 있는 탓이었다.
호랑이 목에 대체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그들이 고민하는 사이, 사제자 중에 일학검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이 동시에 뛰쳐나갔다.
“이놈!”
“천무공자는 허명이다! 우리 비학문의 일대 제자들이 본때를 보여 주마!”
뛰쳐나온 청년 세 사람은 다들 송문과 닮아 보였다.
모두가 문주의 아들들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얼굴 인상은 물론이고 느껴지는 분위기까지 흡사했다.
“송문만 별종이 아니었구나?”
소호는 더더욱 마음이 놓였다.
눈빛과 표정만 봐도 저들은 송문과 인성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저들은 들키지 않았을 뿐.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학검 송상!”
“삼학검 송정!”
“사학검 송광!”
세 명의 제자들은 형식적으로 통성명을 한 뒤, 곧바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파라라락―.
슈슉!
세 사람이 일제히 소맷자락을 넓게 펄럭이더니 날카로운 검끝이 동시에 소호에게로 쏘아졌다.
세 사람이 움직이는 동작에서 일관된 하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보법은 늘 삼재의 방위를 밟고 있었고, 검을 휘두를 때는 꼭 두 명 이상이 항상 같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송상과 송정이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면, 송광은 뒤로 돌아가 하체를 노리는 식이다.
‘합격술을 익혔구나?’
소호는 무릎 위의 상체를 통째로 뒤로 젖히는 철판교의 수법으로 검을 피해 냈다.
하체를 노리는 송광의 검은 손바닥으로 검 면을 쳐서 바닥에 내리찍었다.
“엇!”
퉁― 튕겨진 검끝이 땅바닥을 파고들었다가 다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소호는 몸을 띄워 뒤로 물러서면서 청강검을 휘둘러 계속해서 이어지는 합격술을 방어했다.
채채챙!
쩌엉!
세 개의 초식이 전개될 동안 소호는 묵묵히 방어하면서 검을 막기만 했다.
마치 세 마리 학이 소호의 곁에서 날갯짓을 하며 부리로 쪼아 대는 듯했다.
소호가 이학검 송상의 검을 막으면, 그 순간 세 사람이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 이전과 다른 각도로 검을 날려 왔다.
세 명이 펼치는 합격술은 제법 견고했다.
서로의 동작과 호흡이 일치하고 있었다. 하단과 상단의 공격을 교체하는 동작들이 상당히 능숙했다.
‘예전 같으면 힘으로 짓눌렀을 텐데. 그걸 못하니까……. 뭐, 이런 것도 꽤 재밌네.’
소호는 간결한 움직임만으로 부드럽게 세 사람의 검을 피해 냈다.
쩌엉!
소호가 검을 크게 휘두르자, 세 사람은 동시에 뒤로 훌쩍 물러나 소호를 경계했다.
“이제 대충 알겠어.”
소호는 두 눈을 빛냈다.
양손을 옆으로 펼치니 소맷자락이 펄럭인다.
허리는 꼿꼿하게 세웠다.
보폭은 넓으면서도 묵직하게.
“비학검?”
세 사람의 눈빛이 다시 사나워졌다.
휘리리릭―.
쒜엑!
세 사람이 검으로 찔러 오는 순간, 소호는 지금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청강검을 쑥 내밀었다.
“흡?”
사학검 송광이 깜짝 놀라 동작을 주춤거렸다.
소호가 검을 내밀어 둔 곳은 송광이 다음으로 이동해야 할 장소였다.
마치 네가 이곳에 올 걸 안다는 듯 소호는 웃는 얼굴로 송광을 응시했다.
“큭!”
이학검 송상이 버럭 소리쳤다.
“반대로!”
“더 빠르게!”
세 사람은 아까와 반대 방향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동시에 더 빠르게 검술을 전개했다.
비학유룡(飛鶴誘龍).
날개를 펼친 학이 용을 꾀어내니 이는 학의 신기(神技)라.
세 사람의 검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소호를 난자할 듯 다가왔다.
“세 번째 초식.”
소호는 비학유룡이라는 초식명은 몰랐지만 그게 오학검 송문이 쓰던 강맹하고 날카로운 검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세 사람의 움직임이 머릿속에서 조합되었다.
그들의 동작.
호흡.
검의 움직임까지, 한 치 범위의 오차 안에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파악됐다.
소호는 몸을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면서 청강검을 위로 휘둘렀다.
소호의 동작은 딱히 어렵지도 않았고,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저 툭 내던지듯이 검을 위로 올렸을 뿐.
그런데 그 결과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서걱―!
“……!”
이학검 송상의 오른쪽 겨드랑이와, 삼학검 송정의 팔목 근맥이 동시에 베였다.
그뿐인가?
어느새 소호는 뒤에서 덤벼 든 사학검 송광의 검을 발로 밟고 있었다.
테엥―.
검끝을 발뒤꿈치로 강하게 내리찍은 소호가 몸을 일으키면서 송광의 어깨에 검을 찔렀다.
푸슉―.
“끄아악!”
그 모든 동작이 한 호흡 안에 이루어졌다.
보는 사람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 교차.
그 끝은, 소호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피를 뿜으며 바닥에 주저앉는 것으로 끝났다.
“어떻게 저런……?”
“마치 다음에 어떤 무공이 나올지 아는 것 같다.”
“비학검을 완전히 파훼한 건가? 보기만 하고? 그게 가능해……?”
패원강의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스물다섯 명의 사내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감탄을 토해 냈다.
그들의 감상은 이곳에 모인 모두의 생각과 동일했다.
비학문주 송양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부릅뜨였고, 일학검 송철은 귀신을 본 것처럼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산학관에선 신입생들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데, 그때 목인(木人)을 써.”
소호는 검으로 송상, 송정, 송광의 어깨와 허벅지의 근맥을 찔렀다.
푸슈슈슉―.
“……!”
소호는 한 호흡을 다 내뱉기도 전에 검을 세 번이나 찔렀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주저앉아 있던 세 사람은 자신의 근맥이 다 꿰뚫린 후에야 비명을 질러 댔다.
“끄아아아악!”
“으악! 이, 이 새끼……!”
“죽여어! 끄아악!”
세 사람이 벌러덩 뒤로 쓰러지고, 온몸에서 피를 뿜어 대는데도 비학문 문도들은 가까이 다가와 돕지 못했다.
“합격술에 대한 건 그때 이미 배운 것 같네. 중요한 건 제일 간결한 동작으로 회피하면서 조문을 찌르는 거니까.”
소호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세 사람을 일별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비학문주에게로 다가간다.
주변을 둘러싼 비학문도들은 감히 앞을 막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나기만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럴 리가……! 고작 일류 고수 수준의 내공이다! 저렇게 강할 리가 없어!”
일학검 송철은 결국 결심한 듯 검을 뽑아 덤벼들려고 했다.
“철아!”
“아버지!”
“뭣들 하느냐! 비학문의 문도들아! 너희는 우리 문파가 외인들에게 짓밟히는 꼴을 그냥 보고 있을 것이냐!”
비학문주는 이성을 잃은 송철을 말리면서 비학문도들을 향해 일갈했다.
“다들 한꺼번에 가라! 죽이든 살리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마! 저 악종을 쓰러뜨리는 자는 내 친히 일대 제자로 삼고 금 열 냥을 주겠다!”
비학문주가 내건 현실적인 보상은 망설이고 있던 문도들의 등을 떠밀었다.
“키야아앗!”
“그래! 어차피 한 명이다!”
“죽여!”
원래 시작이 어려울 뿐, 한번 시작된 싸움의 광기는 순식간에 모두를 물들였다.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비학문 문도들이 소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칠십 명의 사내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모습은 마치 커다란 장강의 파도가 밀려드는 듯했다.
“후우.”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검 끝을 차분하게 중단으로 내렸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양팔을 넓게 벌린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비학문을 비학검으로 꺾는다.
그래야 뛰어난 절세 무공 때문에 졌다는 변명을 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소호가 비학문주에게 진정한 공포를 보여 주기 위해 스스로 채운 자그마한 금제였다.
“오라!”
소호는 비학검결의 요체를 가감 없이 뿜어내며 모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
“쿨럭.”
사방이 피바다였다.
비학문주 송양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자신의 어깨를 파고든 검을 바라봤다.
그는 진흙탕처럼 끈적이는 공포에 휩싸여 천천히 질식하는 중이었다.
그는 초점이 흔들리는 두 눈으로 사방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쿨럭. 쿨럭.”
“크으으……”
“아악!”
피. 피. 피.
칠십 명이 내뱉는 신음 소리는 그 자체로도 시끄러운 소음이 되어 버렸다.
비학문주는 자신의 아들들.
특히 바로 옆에 쓰러져서 피거품을 토하고 있는 일학검 송철을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째서……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소호는 묵묵히 검을 뽑았다.
피슉―.
비학문주의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하늘이 내린 무(武)를 가졌다고 다들 말하더군요.”
소호는 이번엔 비학문주의 오른쪽 허벅지에 검을 찔렀다.
“큭……!”
잔인하다?
소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동네를 돌면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비학문주는 오학검의 악행을 모두 알면서 오히려 부추기고 조장한 사람이다.
오히려 이런 형벌로도 부족했다.
“그래서 생각했어요. 예전에 흑저 도올을 쓰러뜨릴 때 생각한 건데. 가능하면 내가 천벌을 대신하자. 벌 줘야 할 사람에겐 내가 벌을 주자. 그렇게 생각했죠.”
푹.
소호는 비학문주의 오른쪽 어깨에 검을 박아 넣은 채 물었다.
“왜 그랬어요? 이미 가질 만큼 가졌으면서. 왜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어요?”
“큭……!”
비학문주는 더 이상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너는…… 모른다……. 무산학관에 가서 출세하고, 절세 무학을 익힌…… 너는 모른다. 우리처럼 작은 문파가…… 얼마나……! 얼마나 힘든지를……!”
“휴우.”
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공. 무공. 내가 그럴 줄 알고 계속 비학검만 썼잖아요. 절세 무공 덕분에 내가 이겼다고 할까 봐. 그래도 느끼는 거 없어요?”
“……!”
“차라리 저기에 있는 양씨에게 검을 전수하지 그랬어요? 비학검은 기풍이 웅장하고 허리가 곧은 선비의 무학인데. 키가 크고 올곧은 성품을 찾았어야죠.”
소호의 핵심을 관통하는 평가가 그를 자극한 것일까.
비학문주는 뭔가를 떠올린 듯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오히려 발악하듯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너도 그 소리인가! 카악! 큭……. 선대가 그랬지! 성품, 성품! 그 결과가 이 꼴이다! 너는 모른다……. 무(武)는 재능이 최고다. 그리고 우리 비학문 최고의 재능은 송문이었는데……. 우리 오학검…… 막내……! 그걸 네가……!”
소호는 더 듣지 않고 좌측 허벅지도 마저 검으로 찔렀다.
“카아아악……!”
비학문주 송양은 나이답지 않은 괴성을 지르면서 온몸을 비틀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피가 뿜어져 나온다.
피범벅이 된 그는 반백의 머리로 저주하듯 소호를 노려보았지만 소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능은 다가 아니에요. 봐요. 나도 나보다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이렇게 얻어맞고 왔……. 어라? 언제 다 나았지?”
소호는 원래는 멍이 들어서 얼얼하던 볼을 톡톡 두드리다가 아픔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해했다.
소호는 자신을 볼 수 없었기에 몰랐다.
피를 보면 볼수록 그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붉은빛이 번뜩였음을.
그리고 그때마다 멍과 상처들이 점차 사라져 갔음을 알 수 없었다.
“자. 이제 관청으로 가죠. 다 죽지는 않을 만큼만 찔렀는데. 마차에 다 태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이놈……!”
소호는 비학문주의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딱딱한 흙바닥 위에 비학문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자국을 남겼다.
비학문주는 발악하듯 외쳤다.
“관아에 가도 소용없다……! 큭! 네놈은 끝이다. 관아로 가면 우릴 습격한 범인이 되어 감옥에 갇힐 것이다!”
“왜요? 비학문이 그동안 행한 악행은 신경도 안 쓰고? 관인들이 당신 친구예요?”
“흐흐, 친구보다 더한 관계지……!”
비학문주는 기고만장해서 소리쳤다.
“그놈들은 다 우리 말을 듣는 졸(卒)이다! 네놈은 관청에 가자마자 갇힐 것이야!”
소호는 잠시 걸음을 멈춘 뒤 비학문주를 내려다보았다.
화사하게 웃고는 있지만, 끝을 알 수 없게 깊은 우물처럼 새까맣고 짙은 눈동자를 보면서 비학문주는 소리치던 것을 멈추고 소호에게 압도되었다.
“재밌네요. 그럼 당신이 힘을 잃었는데도 그들이 친구의 의리를 지키는지…… 한번 볼까요?”
“당연한……!”
소호는 말없이 비학문주를 내려다보았고, 비학문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