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45화 (474/686)

14권 19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9)

“아이고! 제가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다 오셨습니까?”

관도현의 지현(知縣: 정7품) 나성호는 빼빼 마른 몸에 영리한 눈빛을 지닌 자였다.

지현이라 하면 하나의 현의 현령(縣令)이나 마찬가지고, 실제로 지현의 위치에서 관리하는 인구수만 해도 평균적으로 구만 명이나 되는 중요한 자리였다.

나이는 사십 대 중반.

무예를 익힌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몸이 건강하고 뼈대는 굵었다.

그럼에도 전형적인 관료처럼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허리를 굽실거리니 소인배 같은 인상을 주었다.

“관도현 지현이시군요. 장소호입니다.”

하지만 소호는 그를 우습게 보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그저 담담하게 나성호를 바라보았다.

소호는 그의 내심이 궁금했다.

관도현의 지현.

비학문과 영합하여 관도 마을을 방치한 자.

“하핫! 이 나 모(某)가 복이 많은 모양입니다. 강호에 명성이 높은 천무공자를 직접 보게 되다니요.”

나성호는 소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친절하게 웃었다.

“와.”

소호는 감탄했다.

그리고 반응이 궁금해서 옆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소호에게 뒷덜미가 잡혀서 끌려온 비학문주 송양이 핏발이 선 눈으로 나성호 지현을 노려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때요? 내 말이 맞죠?”

비학문주 송양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이, 이! 은혜도 모르는……!”

“아이쿠, 그나저나 힘든 일을 하고 오셨을 텐데 이렇게 손님을 세워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죄인은 저희 관인들에게 인계하시고 차를 한잔하시지요?”

나성호 지현은 폭발해서 소리치려는 비학문주의 말을 막듯 소호를 서둘러 안으로 이끌었다.

그와 동시에 곁에서 눈치만 보던 관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허! 뭣들 하느냐! 오랫동안 관도에 혼란을 일으키던 자다. 어서 임시로 감옥에 가둬 두고, 안찰사에 알려라. 재판을 열어야 할 것이다.”

“예! 지현 나리!”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도 나성호는 비학문주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대단한 사람이네.’

아직 소호가 비학문을 박살 낸 일에 대한 것은 이야기가 흘러나가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소호는 비학문을 박살 내자마자 곧바로 관청으로 달려왔다.

아무리 말이 발보다 빠르다지만 그래도 신법을 쓴 소호보다 빠르게 소식이 전해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중간에 마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긴 했지만, 관청에까지 말이 전달될 시간은 없었어. 그럼 지금 이런 태도는 문지기가 말을 전달하자마자 판단을 내렸다는 건데……. 내가 비학문주를 피투성이로 끌고 왔다는 정보만 갖고 이렇게 행동한다? 대단하네.’

소호는 재미를 느꼈다.

무재(武才)와는 다른 종류의 재능을 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잠깐만요.”

소호는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관병들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물러서게 했다.

“지현. 그건 좀 곤란하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보내 버리면 이 사람은 죽을 것 같아서요.”

“……!”

소호가 방긋 웃으면서 꺼낸 말에 눈앞에 있던 관도현 지현 나성호와 목덜미가 잡혀 있던 비학문주가 동시에 안색이 굳어졌다.

소호의 말뜻은 묘했다.

직접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비학문주가 감옥에 가면 죽는다는 소리였다.

지현인 나성호가 몰래 비학문주를 죽일 것이다.

그런 뜻으로 들리기에 충분했다.

“하핫, 공자께선 과한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아니, 저희 관도현은 죄인을 문책하기 전에 죽인다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나성호가 굳은 얼굴로 애써 웃으면서 말하자, 소호는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른 뒤 고개를 저었다.

“지현께서는 제 말 뜻을 오해하셨군요. 여기 이 사람과 싸우다 보니 제가 단전을 폐하고 혈도를 점해 둬서요. 그래서 이대로 감옥에 가면 죽을 것 같다고 한 겁니다. 옛날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무공을 다 잃은 약자입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네. 그러니까 설마 명 제국의 관리인 지현께서 재판도 열기 전에 죽이지는 않으시겠죠.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럼요! 하핫, 그렇지요.”

“그렇죠?”

소호와 나성호는 둘 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침묵이 감돌았다.

비학문주조차 지금이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채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요. 하핫! 제가 오해했던 모양입니다, 공자.”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말주변이 좀 없어서요.”

“그럴 리가! 이렇게나 달변이신데.”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우선 이 사람이랑 같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으음…….”

나성호의 안색이 순식간에 몇 번이나 변했지만, 그는 마지막엔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소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소호가 안내된 곳은 넓은 집무실이었다.

커다란 방 안에는 탁자가 다섯 개 정도 놓여 있었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진한 먹 향이 진동했다. 평소대로 그곳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현승과 주부들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지현, 오셨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나성호는 다가오려는 관리들에게 빠르게 대답했다.

“잠시 자리를 비워 주게. 손님분과 이야기를 좀 해야 해서.”

“그…….”

미간을 좁히며 더 캐물으려던 관리들은 소호에게 목덜미를 잡혀 있는 비학문주를 보자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공자. 편히 앉으시지요. 원래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가 아니라서 차는 준비되지 않았습니다만. 하핫!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요?”

“물론이죠.”

소호는 나성호가 권하는 자리에 순순히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나성호는 불안해 보였지만, 그걸 내색하진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심장이 빨리 뛰네.’

무공을 익혀 예민해진 청각은 나성호의 가쁜 숨과,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잡아냈다.

소호는 일부러 말없이 잠시 기다려 보았다.

마음이 급한 나성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자!”

나성호는 벌떡 일어나서 마치 상사를 대하듯 허리를 굽혀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무례임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공자께서는 저를 질책하시는지요?”

“제가요?”

소호는 빙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감히 어떻게 나라의 관리를 질책하겠습니까?”

“아이쿠, 아닙니다. 당연히 질책하실 수 있지요. 다만 저는……. 저자를 굳이 이곳에 데리고 오셨으니, 그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솔직히 공자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성호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움츠렸다.

“저는 이곳 관도현에 부임한 지 일 년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비학문주가 이곳의 모든 것들을 장악하고 있으니 협조하긴 했으나 저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나성호의 반대쪽에서 곧바로 반발이 터져 나왔다.

“헛소리!”

비학문주 송양은 피를 토할 듯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랑 있을 때는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고작 그딴 소리냐! 나성호! 당장 저 놈부터 감옥에 잡아 처넣어! 그래야 우리가 산다!”

“이자가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헛소리를!”

나성호는 얼굴을 붉히며 벌떡 몸을 일으켰고, 송양은 자신은 잃을 것도 없다는 듯이 몸을 뒤집으며 소리를 질러 댔다.

“난 이제 잃을 것도 없다! 나성호! 계속 그 자리에 있고 싶으면 당장 저놈을 잡아 처넣어! 안 그러면 네놈의 비리를 다 까발릴 것이야!”

“허어, 헛소리입니다. 공자. 들을 필요 없습니다.”

“헛소리는 네놈이 하고 있지!”

“이자가 끝까지!”

나성호와 송양이 서로 의미 없는 노성을 주고받는 사이, 소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비학문주. 잃을 게 없지는 않죠. 다섯 명의 아들들은 버릴 겁니까? 아직 목숨은 붙어 있고, 내가 단전도 폐하지 않았는데요.”

“……!”

버럭버럭 소리치던 비학문주가 사색이 된 채 입을 다물었다.

소호는 나직하고 무감정한 말투로 말을 했다.

이미 비학문에서 소호가 웃는 얼굴로 어떻게 싸우고 칼질을 했는지를 알고 있는 비학문주 입장에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였다.

“이놈……! 이놈……! 정말로, 다 죽일 셈이냐……!”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소호는 웃는 얼굴로 되물었고, 비학문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위기는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소호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소호가 진면목을 드러냈다.

이제껏 너스레를 떨던 나성호도 분위기에 짓눌려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지현께 물어볼게요.”

“예, 예. 공자. 뭐든 말씀하십시오.”

“일 년이라……. 맞는 말이죠. 어차피 비학문은 이곳 관도에 백 년간이나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이제 막 부임한 지현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그렇죠?”

“그, 그렇습니다. 제가 그래서 이자의 말을 순순히 따랐던 것이지요!”

나성호는 반색했고, 비학문주의 안색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그런데 일 년이면……. 으음, 헷갈리네요. 관도에 살던 선하고 올곧은 학사의 처가 횡액을 당한 일은, 얼마 안 되었죠, 아마?”

“……!”

나성호가 헛숨을 들이켰다.

“지현께선 학사가 자결을 한 것도 가만히 두었죠? 말씀하신대로, 별 힘이 없는 지현이니까?”

“그 일은…… 나도 차후에 들은 일이라……. 소, 송구합니다. 그리고 일의 책임을 묻기엔 비학문이 좀…….”

“상대가 안 좋았다?”

“그, 그렇습니다. 공자.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요.”

소호는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나성호 지현은 대명률(大明律: 국법)을 상당히 주관적으로 집행하시네요?”

소호는 환하게 웃고 있는데, 나성호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소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난 일개 무림인입니다. 천무련이라는 단체를 만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너무 햇병아리예요. 도올이나 도철을 쓰러뜨리긴 했는데, 아직 자리를 잡지는 못했어요.”

소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비록 관직 체계상은 하급 관료에 속한다지만……. 그래도 구만 명이나 다스리는 현의 지현이 관인도 아닌 나를 처음 보자마자 깍듯하게 대한다? 그건 지현께선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거죠?”

“조, 조사는 좀 했습니다.”

“은룡패를 지닌 것도? 흑시군을 일부 흡수한 것도?”

“예, 예. 은룡패를 지닌 분은 사례감 태감께 전권을 받은 분이니 어사처럼 대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는 그, 천무련의 총사(摠師)분과 만나서 이야기도 조금…… 들었습니다…….”

나성호는 초반의 능글맞은 모습을 다 잃고 다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주해를 만났구나. 그래서 그랬어.’

보아하니 섭주해가 이미 손을 쓴 인물이었던 모양이었다.

소호는 나성호의 처분에 대해 고민하던 것을 그만두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왕진 태감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요. 솔직히 천무련을 만든 건 왕진 태감과 흑시군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죠.”

“히익……!”

나성호는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기겁을 했다.

왕진 태감에 대한 망언이라니.

관인 입장에선 동창이 무서워서라도 꿈에서라도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소호는 그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만약 그가 왕진을 따르는 자라면 분노하거나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으니 두 눈을 번뜩일 것이다.

그런데 나성호는 그저 공포에만 질려 있었다.

“그래도 난 왕진 태감의 능력은 인정해요. 그리고 그가 무림을 일통하는 걸 보면서 느낀 점이 있기는 해요. 그게 뭔지 알아요?”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때론 힘으로 짓밟는 게 필요하더라고요. 말로는 안 통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어요. 저기에 있는 비학문주처럼.”

“……!”

“그래서 다 벴어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다 말했던 스물다섯 명만 남기고. 나머지 일흔다섯의 비학문 문도들은 저에게 덤벼드는 즉시 모조리 근맥을 잘랐습니다.”

뚝…… 뚝…….

나성호의 얼굴에서 흐른 식은땀이 나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저는…….”

소호는 나성호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지현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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