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46화 (475/686)

14권 20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20)

“저, 저는…….”

나성호는 넙죽 엎드려서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청탁을 받으면서 받은 재물, 모든 걸 내려놓겠습니다! 그래선 안 되는 건데, 부패한 토호와 힘을 합했다니……!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공자!”

쿵.

나성호는 이마를 땅에 박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디 자비를……! 살려 주시면 저는 앞으로 천무련이 하는 일에는 절대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겨,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소호는 제자리에 편히 앉은 채 그런 나성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나성호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빠른 속도로 헐떡이는 숨.

공포에 질린 사람의 절박한 숨소리였다.

소호는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견마지로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앞으로 그저 맡은 바 직무대로. 대명률에 적힌 대로 올바르게 관도현을 다스리기만 하면 됩니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나성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흐으……!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믿어도 될까요?”

쿵.

나성호는 다시 한 번 이마를 바닥에 부딪쳤다.

제법 세게.

바닥이 울릴 정도의 세기였다.

“공자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나성호는 결연하게 외쳤다.

“좋네요. 나 지현님. 그럼 우선적으로 한 가지를 부탁드려 볼까요?”

“어떤 일이든 말씀하십시오.”

나성호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소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소호와 눈이 마주치자 어째선지 흠칫 놀라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비학문의 죄를 낱낱이 밝히고, 관도현에 사는 모두가 볼 수 있게 방을 붙여 주세요. 비학문이 그동안 이러이러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그동안 이런 참혹한 일들을 해 왔는데, ‘천무련’의 도움으로 이를 일망타진하였다고, 사실 그대로 알려 주세요.”

“……!”

나성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소호의 의도를 바로 알아듣고 감탄한 듯 외쳤다.

“협의 집행!”

“으음…….”

“관도의 모든 이들이 천무련의 협행을 칭송할 것입니다!”

“과도한 아부도, 과한 칭송도 필요 없어요. 그저 제대로 된 사실만 있는 그대로 밝혀 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공자!”

나성호는 이마에 동그랗게 혹이 난 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저…… 공자.”

“예.”

“비학문이 그동안 하던 ‘음지의 사업’은 어떻게 하실 건지…….”

소호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나성호는 화들짝 놀라면서 허둥거렸다.

“제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갑자기 없어지면 큰 혼란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어차피 운용해야 한다면 천무련에서 이어받는 게 좋은 것은 아닐지……?”

“글쎄요. 음지에 있다는 건 음지에 있는 이유가 있겠죠? 천무련에서 함부로 손댈 사안이 아닌 것 같은데요?”

“하오문과 연관된 사업이라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그저 걱정되어 물어본 것입니다. 욕심낸 것이 아닙니다.”

나성호는 얼핏 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소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소호는 자신의 두 눈에서 감도는 붉은색 귀광(鬼光)이 나성호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담이 작아서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까? 으음, 어쨌거나 설득하기는 쉽지만…….’

나성호가 진심으로 공포에 질린 것은 소호에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건 아까 만나 보셨던 저희 ‘총사’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좋겠네요. 비학문을 처리하면서 차차 논의하도록 하죠.”

“예, 저희 관인들이 갖고 있는 자료를 모아 한번 천무련과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소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급해진 것은 비학문주 송양이었다.

“자, 잠깐! 잠깐! 우리 아들들은! 오학검들은 어찌 되는 건가! 방을 붙인다니. 지현! 천무련과 영합하겠다고? 진심인가?”

나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송양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성호! 이럴 수는 없는 거다! 관도에서 백 년을 뿌리내리고 살았는데, 우리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망할 것 같아? 우리와 엮여 있는 관료들이 한둘일 것 같냔 말이야!”

“비학문주. 아들을 하나라도 살리고 싶으면 말을 아껴야 할 거예요.”

소호는 송양에게 다가가 혈도를 풀어 주었다.

검결지로 세운 검지와 중지로 가슴 인근의 혈도 일곱 개를 누르자, 송양의 몸에서 금제되어 있던 내공의 흐름이 다시 되살아났다.

“커헉?”

송양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내공의 금제는 그를 가둬 두는 감옥이 아니라 그를 지켜 주는 최후의 보루와 같았다.

단전이 부서지면서 황폐화되어 버린 혈도들이 불이 붙은 것처럼 송양의 몸을 고통스럽게 쥐어짜기 시작했다.

“끄으으……? 이…… 이게 대체……!”

“지금부터 당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건 여기 계신 나성호 지현이십니다.”

“……!”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아요. 당신의 아들들이 지은 죄가 뭐냐에 따라 형량은 달라지겠지만.”

소호는 나성호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비학문주와 그 휘하의 무인들은 그저 맡은 바 직무대로. 대명률에 적힌 대로 ‘철저히’ 공정하게 처리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성호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소호에게 마주 예를 표했다.

“귀인께서 저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반드시 결초보은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소호는 빙긋 웃은 뒤에 돌아 나왔다.

쿵― 닫히는 문 너머로 비학문주 송양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이제는 소호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었다.

소호는 그대로 관청을 빠져나왔다.

관인들의 어색한 예를 받으며 빠져나오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화창하고 푸른 하늘이 소호를 반겨 주었다.

툭툭.

소호는 자신의 손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낸 뒤 곧바로 관도객잔으로 향했다.

그는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천무련.

소호가 세운 집단이자, 섭주해의 명을 받아 이곳에 와 있을 그들에게 소호가 한 일을 알리는 일이었다.

“자네 그거 들었나? 비학문에 난리가 났다는구만.”

“어? 그게 진짜야? 그쪽이 오늘 좀 시끄럽단 이야기는 들었는데…….”

“나무꾼 장 씨가 비학문에 땔감을 갖다 주려다가 봤다는데. 그 안이 피바다래.”

“허어. 진짜야? 어쩐 일로?”

“몰라. 천벌이 내렸나 보지.”

“잘됐구만, 잘됐어. 그 꼴을 한번 보러 갈까?”

“이 사람!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만. 지금은 그 근처에 얼씬도 하면 안 돼. 괜히 강호의 일에 엮였다가 어떤 꼴을 당하려고?”

중년의 사내 두 사람이 수군거리면서 소호의 곁을 지나쳐 갔다.

소호는 걸음을 빨리 했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면 한층 더 빨리 천무련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관도객잔은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여러 명의 사내들이 모여 있는 곳 특유의 웃음소리와 환성이 들렸다.

소호가 발을 들여놓으려 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자들 같으니. 하나같이 주제를 몰라. 작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문파 주제에 어딜 감히! 다들 보았지? 우리는 다르다. 천무공자의 위광을 빌리면 안 되는 일이 없어!”

움찔.

소호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숨을 죽이고 객잔의 외벽에 기대어 섰다.

‘방익지 조장의 목소리인데.’

방익지는 쇳소리가 섞인 걸걸한 목소리라 웬만해선 착각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쪽에서 방익지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 조장! 역시! 방 조장님은 사나이이십니다!”

“믿음직합니다!”

“와하하핫!”

술을 한 잔 걸친 듯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방익지는 더욱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 자! 더 마셔! 더 들이켜라! 오늘 이 방 조장이 다 산다!”

“오오오!”

“우리가 천무련의 실세가 될 거다 이거야! 우린 천무련의 시작을 함께하고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너희 다 알지?”

“알다마다요. 조장님. 천무련이 크면 우리도 큰 직위 받는 겁니까?”

“당연하지! 천무련을 세울 때부터 함께해서 여태껏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하는데 천무공자님이 나중에 우릴 안 챙겨 주시겠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그리고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내가 절대로 가만히 안 있지!”

방익지가 호기롭게 술잔이라도 내려친 듯 탁자에서 그릇 소리가 났다.

“하핫! 그럼 저희는 방 조장님만 믿으면 되는 겁니까?”

“그렇지! 그렇지!”

“만약 저 높으신 공자님께서 우릴 버리면? 그땐 조장님께서 싸워 주시고요?”

“당연하지! 이 싸나이 방익지가 그런 꼴을 볼 수가 있나! 흠흠! 공자님도 그렇고 총사님도 그렇고. 다 어린 분들이야. 우리가 자알― 모셔야지. 안 그래?”

“옳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다들 이제 약관밖에 안 되셨잖아? 무공이야 어마어마하시지만. 총사도 책략이 뛰어나시고. 근데 좀……. 그래. 우리가 살아온 경험이 얼만데? 그렇지?”

“방 조장님만 믿습니다!”

“하핫! 우리가 잘 모시자고! 좋은 길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방 조장을 중심으로 모두가 똘똘 뭉치는 듯한 분위기가 건물 밖에서도 느껴졌다.

‘방 조장은 저런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소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했다.

폐부가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이다.

섭섭함?

분노?

그런 것과는 조금 달랐다.

비학문주도 소호를 어리다고 우습게 보고 깔봤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소호는 느끼고 있었다.

‘나는 방 조장이 충직한 줄로만 알았지. 날 되게 아끼고 진심으로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속은 모르는 거구나. 마음이 좀, 아프네.’

소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쨍하니 비추는 햇볕이 따갑게 느껴졌다.

해야 할 일은 있는데, 저 안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한 건 아닌데 왜 내가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소호가 그런 생각들로 복잡해진 심경을 달래는 사이, 축제 분위기였던 객잔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쾅!

“어어?”

누군가가 탁자를 내리치며 화를 낸 듯했다.

왁자지껄하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무거운 침묵 속, 또 한 명, 소호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들어주겠군.”

강한 억양을 지닌 목소리가 소호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인근에서는 잘 들을 수 없는 말투였다. 남해 출신답게 카랑카랑한 방언을 들으니 소호는 누가 나선 건지를 알 수 있었다.

‘이남성 조장. 주해가 뽑았다던 또 다른 인재.’

방익지를 소개받던 날 함께 만났던 기억이 났다.

소호에게 사근사근하던 방익지와 달리, 무뚝뚝하게 자신의 목적만을 말했던 사내였다.

“왜 그래? 이 조장. 뭔가 불편한가?”

“불편하오.”

“그래? 그래도 좀 참아 주고 그래야지. 이렇게 아까운 술잔을 깨부숴야 쓰나? 다들 분위기가 가라앉았잖아. 안 그래? 자자, 그러지 말고 내 술 한 잔 받아.”

“우린 어차피 다 낭인이었소.”

이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비학문? 아까 그 작은 문파에조차 정착하지 못해서 떠돌던 우릴 알아봐 준 곳이 천무련이란 말이오.”

“……이 사람 참,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다들 아는 이야기 아니야?”

“알면 잘하시오.”

“뭐?”

“주군이 어려도 주군이오. 아무것도 자랑할 게 없는 자만이 나이를 내세우는 법이오.”

“허어?”

“……난 이만 가 보겠소. 혼자서 낭인 생활을 오래했더니, 이런 자리는 불편하군.”

“이 조장. 거 말이 너무 심한데.”

“가 보겠소.”

“허어, 잠깐.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소.”

이남성은 방익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와 객잔 문을 열어젖혔다.

건강하게 그을린 갈색 피부 위로도 보일 만큼 얼굴이 벌겋게 상기 된 이남성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객잔을 빠져나왔다.

문 옆의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소호는 객잔을 빠져나온 이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

그 순간 이남성의 표정은 경악했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만 벙긋거렸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빛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소호의 모습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쉿!”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이남성은 다행히 곧바로 그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

소호는 벽에서 등을 떼고, 객잔 안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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