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21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21)
“련주님, 잠깐……!”
이남성이 말리려 드는 것을 소호는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그리고 객잔 안에는 들리지 않도록 나직하게 말했다.
“같이 들어가면 이 조장이 미리 알고 있었다고 오해받을지도 몰라요. 비학문에 먼저 가 있어 주세요.”
“……!”
이남성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감탄한 얼굴로 묵묵히 포권을 취했다.
한마디도 묻지 않고 순순히 명을 따른 다는 점에서 소호에 대한 믿음이 엿보였다.
‘원래 난 방 조장이 이 조장보다 나랑 마음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
이제 보니 이남성 조장이야말로 진국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은가?
소호는 조용히 마음을 다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 내부는 다시 시끌벅적해져 있었다.
“에잇! 속 좁은 사람 같으니!”
“방 조장님, 이해하십쇼. 이 조장은 사람과 어울릴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도 어찌나 차가운지. 일하러 나올 때가 아니면 한마디도 말을 못 붙인다니까요?”
“자자, 한잔하십쇼! 오늘은 진탕 마시고 취하는 겁니다!”
“그래!”
방익지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가, 마음을 정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조장이랑은 내가 나중에 이야기해 보면 되겠지. 자아, 우리는 우리대로 힘을 내보자. 다 같이 한잔하자. 동지들!”
“예!”
“자, 다들 잔은 채웠지? 우리 내일은 비학문에 직접 쳐들어가서 결판을 내야 하니까. 오늘은 잘 마시고 긴장을 풀어서…….응?”
방익지는 양손으로 든 잔을 앞으로 내밀며 일장연설을 하려던 차에 객잔 입구에 조용히 서서 그를 지켜보는 소호와 두 눈이 마주쳤다.
“어? 방 조장님?”
“조장님. 술이 흐르는데요?”
“조장님! 바지가 다 젖었어요! 왜 그러십니까?”
방익지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멍하니 서서 술을 줄줄 흘리더니 이내 술잔을 내팽개쳤다.
“공자님!”
방익지는 구르듯이 뛰쳐나가 소호의 앞에서 급히 포권을 취했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그의 소맷자락이 탁자의 음식들을 쓰러뜨려서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공자님께서 이곳까지 오시다니! 고향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벌써 다녀오신 겁니까? 세상에, 이 방 조장에게 왜 말씀을 안 해 주셨습니까. 말씀만 해 주셨으면 모시러 갔을 텐데요?”
방익지는 허둥거리면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으나, 당황하는 안색은 숨기지 못했다.
소호는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익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갔다.
“이놈들아! 공자님께서 오셨는데 인사 안 하냐? 나를 부끄럽게 만들 셈이야?”
“……!”
그때까지만 해도 대체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천무련 무인들이 벌떡 일어나 방익지의 뒤에 늘어서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천…… 크흠, 공자님을 뵙습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천무공자를 뵙습니다!”
심지어 소호에 대한 호칭도 제각각 달랐다.
공손히 예는 취하고 있었으나 명문 무가(武家)들과 같은 절도는 없었다.
소호는 미간을 좁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제 걸음마 단계인 천무련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그,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아직 개파식을 하지 않아서 혼란이 있는 듯합니다.”
방익지는 수하들의 실수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소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객잔 안에는 천무련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관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다들 먹던 음식도 내려놓은 채 소호를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아까 소호에게 비학문의 정보를 몰래 준 사람.
객잔의 인상 좋은 점소이는 입을 너무 쩍 벌리고 굳어 있어서 턱이 빠질까 염려되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지 한 달쯤 됐나요? 방 조장. 잘 지내고 있었죠?”
“예, 예! 물론입니다. 련을 위해 바쁘게 지냈습니다.”
“부하들이랑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소호가 빙긋 웃으면서 안부를 묻자, 식은땀을 흘리던 방익지가 조금 안심한 듯한 눈빛으로 반색을 했다.
“그…… 한동안 너무 긴장하고 일해서, 오늘은 좀 긴장을 풀어 주고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공자님.”
“그랬군요. 잘했어요. 우리 련을 위해 힘쓰는 무인들에게 술을 아껴서야 안 될 일이죠.”
“역시! 하핫! 이 방모가 반할만큼 화끈한 사나이이십니다. 공자님!”
“그래요?”
“물론입니다! 공자님!”
소호는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 조장님. 고생이 많죠? 제가 너무 어려서.”
“……!”
“제가 무공은 좀 자신 있지만, 용인술은 아직 부족한 것 같아요. 그렇죠? 많이 보필해야 할 것 같죠?”
조금 안심하려 했던 방익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소호가 갑자기 나이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알아차린 듯 보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이다.
그는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자신의 발언을 되짚어본 뒤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심지어 목덜미에 땀이 흐르는 모습이 두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후욱―.
소호는 콧속으로 주향(酒香)이 훅 끼쳐드는 것을 느꼈다.
방익지의 몸에서 기파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내공을 끌어 올려서 주독을 급히 내보내는 것이 분명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공자님께선 이미 모든 요건을 다 갖추셨지요. 저야 그저 미약한 힘을 보탤 뿐입니다.”
“그래요? 그럼 내가 정식으로 개파식을 치르고 나면 련주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
방익지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원하신다면 지금부터라도 련주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개파식이 끝나고 그렇게 부르기로 했었는데.”
“공자님께서는 하늘이 내린 무! 천무공자라 불리는 분이십니다.”
“과찬이에요. 세상엔 아직 강한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소호는 지그시 방익지를 바라보다가 냉철하게 말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술을 먹는다니 내버려 두고 싶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좀 움직여야겠네요.”
“예?”
“비학문이 이곳에 뿌리를 박은 게 백 년이나 되었더라구요. 알아보니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조금 ‘정리’를 하고 오는 길이에요.”
방익지는 그제야 소호가 허리에 차고 있는 명검과, 화려한 비단 장포에 점점이 붉은색 액체가 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소호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비학문을 혼자 치셨습니까……?”
“예. 벌을 좀 주었습니다.”
“……!”
방익지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너무 놀라 숨을 삼켰다.
소호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본래 관도의 살던 손님들과 객잔의 관계자들이 다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비학문주 송양은 대명률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하여 관도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막내아들인 오학검 송문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천도(天道)에 어긋나는 흉행(兇行)까지 저질렀죠. 그런데도 그들은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관도의 모두가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음에도 감히 죄를 물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요?”
“……!”
“그런 자들이 천무련에 가입하려 하다니. 저 장소호는 천무련 련주로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소호의 차분한 말투에 강한 기백이 함께했다.
“하여 비학문주와 오학검 다섯 명을 포함하여 제게 달려든 핵심무인 칠십오 명의 사지근맥을 끊었습니다.”
“……!”
침묵과 경악이 함께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뜬 자가 절반.
충격을 받아 흔들리는 눈빛으로 소호를 바라보는 자가 절반이었다.
소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비학문주는 이미 관청의 나성호 지현에게 넘겼습니다. 지현께서는 비학문에 대해 엄정한 조사를 하고 그에 따라 공평히 처벌하겠다고 저에게 약조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방 조장.”
“예.”
“명을 내리겠습니다.”
방익지는 크게 감격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십시오.”
“지금 당장 비학문으로 가서 관인들을 돕고, 일을 마무리하세요. 천무련이 시작한 일입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은 ‘천무련’의 이름으로 철저히 처단하겠다는 내 의지를 널리 알리세요.”
담담하게 흘러나가는 말 속에 의(義)와 협(俠)이 함께하니 감히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방익지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군의 예를 표했다.
“련주의 명을 받듭니다!”
방익지의 뒤에 있던 모두가 똑같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취했다.
“련주의 명을 받듭니다!”
첫인사는 제각각이었으나, 마지막에 명을 받는 인사만큼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소호는 방익지와 서른 명의 천무련 무인들이 서둘러 비학문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배웅한 뒤, 아까 패원강과 함께 앉았던 탁자로 가서 조용히 착석했다.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경외와 충격 속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 모두의 시선은 소호에게로 꽂혀 있었다.
“소, 손님.”
“많이 놀라셨죠?”
쭈뼛거리면서 다가온 인상 좋은 점소이에게 소호는 웃어 주었다.
“아닙니다. 혹시 제가 아까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면…… 사과드리려고…….”
“아뇨, 그런 거 없었어요.”
“예, 예. 아이구, 다행입니다. 예.”
“몸을 움직이고 왔더니 배가 고프네요. 소채랑 죽엽청 한 병 주시겠어요?”
“물론입죠. 제일 맛있는 걸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지요?”
“한 명이 더 올 것 같으니까. 잔도 하나 더 부탁드릴게요.”
“예, 물론입죠.”
점소이는 서둘러 주방에 주문을 전달한 뒤 소호에게로 돌아와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공자님. 아니, 려, 련주님.”
“직책은 상관없으니 편하게 불러 주세요. 왜 그러시죠?”
“정말로……. 저기, 정말로…….”
점소이는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비학문이 무너진 것입니까? 그놈들이 정말로 벌을 받는 겁니까?”
“예.”
소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학문은 이제 없어질 겁니다. 이곳 관도는 저희 천무련이 바꿔 놓을 것입니다.”
“공자님……!”
소호와 점소이의 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관도 사람들이 환호했다.
“비학문이 무너졌다!”
“천무련의 천무공자께서 무너뜨렸다!”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혼자만 알 수 없다면서 우르르 몰려들어 점소이에게 밥값을 계산하고, 소호에게 여러 가지 감사의 말을 전한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관도 토박이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공자님. 정말로 복 받으실 겁니다.”
점소이는 감격해서 시키지도 않은 요리를 마구 가져와서 탁자에 깔아 놓기 시작했다.
소호가 다 못 먹는다고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벌써 마을이 떠들썩하군. 축제라도 벌어진 것 같소.”
패원강이 나타나 반대쪽에 털썩 앉은 것은, 소호가 소채 한 접시를 먹어 치우고 이제는 오향장육의 깊은 육향을 입속에서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늦었네요?”
“늦었다니? 이게 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련’에서 명을 내린 탓 아니오?”
“명이라니. 부탁이에요, 부탁.”
“부탁치곤 너무 말이 간결하던데?”
“하룻밤에 만리장성도 쌓는다던데, 같이 술 한잔했으면 친구 아니겠어요? 그럼 부탁도 간결히 하는 거죠. 뭐.”
“나 참.”
소호가 싱글싱글 웃으니 패원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자들은 소형제가 전음으로 말한 대로 천무련으로 보내 두었소. 말을 타지는 않았으니 내일쯤 도착하겠군.”
“고생하셨네요.”
“그리고…….”
“음?”
“친구는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오.”
“호오.”
패원강의 얼굴은 쓸데없이 진지했다.
소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싫어요? 그럼 형이라고 부를까요?”
“의형제는 더더욱 쉽게 하는 것이 아니오.”
“깐깐하시네.”
소호는 죽엽청을 들어 패원강에게 따라 주었다.
패원강은 거절하지 않고 자연스레 술잔을 받았다.
“그럼 련주와 무상(武上)은 어때요?”
“흠?”
소호는 지그시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바라보는 패원강에게 술잔을 들어 보였다.
“아직 개파를 하지도 않은 몸이라.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직위일 것 같은데.”
“흐음.”
“호법이 좋으려나? 그런데 호법은 너무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아요?”
소호와 패원강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크.”
“크으.”
두 사람의 탄성이 서로 교차했다.
“난 계속 이렇게 살 겁니다.”
패원강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빛으로 물었다.
“아까 패 소협이 말했죠? 이제 강호 무림은 춘추전국시대가 될 거라고.”
“분명히 그리 말했소.”
소호는 담담하게, 당연한 일을 말하듯 말했다.
“내가 될 거예요. 시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