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22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22)
시황제.
최초의 중화 통일을 이룬 시황제처럼 강호 무림을 일통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순간이었다.
“소형제는…… 포부가 크군.”
패원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모두가 강호의 영웅이 되길 꿈꾸지만, 세상에 은거 기인은 장강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오. 겉으로는 몰락한 것처럼 보여도 팔파일방의 숨겨진 저력은 여전히…… 소형제의 예상을 넘어설 것이오.”
패원강의 목젖과 턱이 흔들렸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뒷부분은 전음으로 들려왔다.
[무산학관에게 절반의 무공을 빼앗겼다? 상관없소. 그 절반의 무공을 버리더라도 여전히 뛰어난 무공이 장경각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곳이 팔파일방이오. 그리고 소형제가 강호 일통을 꿈꾼다면…… 그런 팔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모두 끌어들여서 산하에 둬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소?]
패원강에게선 팔파일방 공동 전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의 말뜻은 간단했다.
소림, 무당을 위시한 팔파일방의 힘은 왕진에 의해 팔다리가 잘려 나갔음에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겠죠.”
소호는 그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팔파일방은 정도의 기둥이니까요. 당연한 이야기예요.”
“그럼에도 소형제가 그 모두를 제치고 강호 일통을 노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오?”
패원강의 눈빛이 진중하게 빛났다.
그는 진지한 성격이었다.
매사에 허투루 넘어가는 게 없을 게 분명했다.
마치 소호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을 반박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핫.”
소호는 웃었다.
소탈하고 유쾌한 웃음이었다. 어깨를 으쓱 올리면서 그는 맨손을 펼쳐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난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제 강점이에요.”
“……무슨 말이오?”
“나는 소속된 문파가 없거든요. 난 배경이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
“그 말은, 내가 잘되더라도 그게 어떤 특정한 문파의 힘이 되지는 않는다는 소리죠.”
설마 ‘없는 것’을 장점으로 말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게 분명했다.
당황하는 패원강을 향해 소호는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저 장소호라는 한 사람이에요.”
이번엔 소호의 목젖이 떨렸다.
[무산학관에서 공부하긴 했지만, 왕진의 사람은 아니죠. 아니, 오히려 왕진의 세력과는 적이에요. 저는 팔파일방 출신이 아니지만 그들의 무공을 익혔고, 오대세가 출신 또한 아니지만 그들의 무공도 꽤나 잘 알고 있어요.]
[그런 생각은…… 놀랍구려.]
[백연 맹주님이 어떻게 맹주로 뽑혔는지 들었어요. 팔파일방의 무공을 익히고 오대세가의 여식과 혼인한 자.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더라고요. 아! 무림은 중재자가 필요하구나……라고. 저를 뒤에서 쥐고 흔들 세력이 없으니 공평하게 무림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겠죠?]
소호는 빙긋 웃은 뒤, 이어지는 말은 당당하게 입으로 말했다.
“앞으로는 비학문을 처벌했듯, 민심을 잃은 문파들에 벌을 주고 흡수할 수 있는 세력은 흡수할 겁니다. 당당하게, 다만 패기 있게 정도(正道)로 걸어갈 거예요.”
빙긋.
소호는 다시 웃으면서 술을 따라 주었다.
청량한 대나무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패원강은 말이 없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은 듯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말은, 내게는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소. 소형제.”
본래 패원강이 공동 전인으로서 무공을 익힌 취지가 무엇이었던가?
소호가 지금 하려는 일.
강호의 모든 세력들을 결집시킬 하나의 깃발을 세우기 위해 무공을 익혀 온 게 패원강이었다.
그런데 소호는 아무런 배경이 없는 게 무림맹주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 말 즉슨.
팔파일방의 존자들께 무공을 배운 패원강에게는 자격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이건, 제가 아끼는 동생 주해랑 이야기했던 내용인데……. 만약 패 소협이 곧바로 깃발을 세운다면 반발하는 자가 많을 거예요.”
“……그 말이 그 말 아니오?”
“다르죠. 내 말은, 소속 문파가 없는 내가 선두에서 화살을 맞으며 길을 내놓으면……. 패 소협이 천무련을 도와주다가 련을 이어받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패 소협의 ‘정통성’이라는 건 중요한 거잖아요?”
패원강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돌처럼 굳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은 쉬고 있는 거야? 호흡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으니 살아 있는 건 분명한데, 패원강은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굳어 있었다.
“자리를 넘겨주겠다니. 그건 나중이 되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게 될 거요. 소형제, 그대는 대체 왜 천무련을 만든 것이오?”
“그 일을 누군가 해야 하는데,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으니까?”
소호는 잠시 고민하듯 턱을 문질거리다가 툭 던지듯이 가볍게 말했다.
“패 소협도 알겠지만, 저기 자금성의 ‘그분’과 싸우려면 천무련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니까요.”
“즉, 싸우기 위해 자리가 필요했을 뿐, 집착은 없다는 것이오?”
“맞아요. 난 자유로운 게 좋아요.”
“……하핫.”
패원강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놀랍군. 만약 방금 그 말을 소형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했다면 나는 사람을 우습게 보지 말라며 화를 냈을 것이오.”
“오오, 내 말은 믿어 준 거네요?”
“그대의 성품을 알 것 같소.”
패원강은 이제야 처음 만났을 때의 호쾌한 성격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
“좋은 제안이오. 허나 대답은…… 그래, 소형제가 내상을 다 치료하고, 나와 제대로 한번 겨뤄 본 뒤에 답을 하겠소.”
“뼛속까지 무인이시네요.”
“물론.”
소호는 웃으면서 잔을 들어 올렸고, 이번엔 패원강도 웃으면서 마주 들었다.
“크.”
“크으!”
두 사람은 호쾌하게 술을 들이켠 뒤, 웃으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그 부상을 입게 된 계기가 궁금하오.”
“아, 이거요?”
소호는 눈가를 어루만지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집혼기에 대한 것은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처음에 은자촌을 떠나서 무산학관에 가게 된 계기와, 그 후에 마을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와 어떻게 갈등을 겪었는지.
그리고 뜬금없이 조서인과 싸우게 되었던 일까지 술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니까. 소형제가 부족한 무공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주던 친구가, 어느 날 본인의 마을이랑 부친과 인연을 맺더니 그곳에서 무공을 익혀 강해졌다? 그 뒤에 겨루다가 얻어맞아서 멍까지 들었고?”
“아니 뭐, 얻어맞았다고 표현하긴 그런데……. 나도 열흘 간 기절해 있다 일어나서 곧바로 싸운 거긴 한데…… 에이, 변명 같네. 맞아요. 얻어맞은 거.”
소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술잔에 술만 계속 채웠다.
이야기는 어느새 꽤나 길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신 술병도 세 병이나 되어서, 이젠 두 사람 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숨을 쉴 때마다 주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 참…… 귀곡천계(貴鵠賤鷄)로군.”
“뭐라고요? 귀곡천계?”
“그거 모르오? 사자성어?”
패원강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은 천대한다. 손에 닿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다 보니, 가까운 것을 천하게 냉대한 것 아니오?”
“그건……. 뭐, 맞는 말이네요.”
“알고 보니 가까이 있던 닭이 고니보다도 더 귀한 보물이었나 본데, 그래도 이미 선택한 일이니 어쩌겠소? 고민하지 마시오.”
“으음…….”
“다만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제대로 사과해야 하지 않겠소?”
“…….”
“괜한 참견일지 모르겠으나, 그저 노파심에 하는 말이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나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서……. 늦어 버리기 전에 있을 때 잘하라고 하고 싶소.”
소호는 패원강의 씁쓸한 얼굴을 보니, 그도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순순히 고맙다고 하자니 분위기가 너무 침울해지는 것 같아 괜히 트집을 잡았다.
“패 소협.”
“왜 그러시오?”
“패 소협은 사자성어를 너무 좋아하네요. 잘난 척 많이 하면 여인들에게 인기가 없대요.”
“허어?”
패원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기껏 사람이 허심탄회하게 좋은 말을 해 주었는데 돌아오는 소리가 겨우 그거요?”
“너무 진지해도 인기가 없대요.”
소호는 빙긋 웃었다.
패원강은 술 때문에 붉어진 건지, 소호의 장난에 흥분해서 붉어진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그……. 여인이나 인기 이야기가 대체 왜 나오는 거요?”
“패 소협은 폐관 수련만하다가 처음으로 하산한 거죠?”
“……그렇소.”
“련에 관한 일 말고도 함께 협력해야 할 게 있겠네요.”
소호는 말없이 웃으면서 술을 따라 주었고, 패원강은 소호의 얼굴과 새하얀 비단 장포에 금사를 수놓은 화려한 옷차림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탄식했다.
“그런 거요? 소형제는 화화공자였던 거요? 학관에서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놀러 다녔소?”
“에이, 무슨 말씀을. 저도 아무것도 모르죠. 다 들은 이야기예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거요?”
“으음, 대부분 학관의 누나들인데. 가끔 차를 한 잔씩 하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줬어요.”
“…….”
패원강은 어이가 없어 하다가 물었다.
“놀랍군. 소형제, 연인은 있소?”
“아뇨. 근데 최근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사람은 있네요. 패 소협은요?”
“……술을 더 마셔야겠소.”
패원강은 갑자기 객잔 점소이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면서 있는 대로 술을 다 갖고 오라며 주문을 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소호는 창밖으로 비춰지는 밤하늘의 북극성을 올려다보았다.
풍운객잔에서 돌아온 후에 첫 번째로 벌어진 일. 소란스럽고 바빴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백설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탄식했다.
“별이 밝네.”
숨소리가 강하게 섞이는 북방 특유의 말투는 여전했다.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옷깃 사이로 백옥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녀는 눈앞에서 거슬리는 죽립을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특유의 금발 머리와 푸른 벽안의 눈동자가 가감 없이 드러났다.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무표정한 얼굴인데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백설지는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왜 이러고 있어야 해?”
기암괴석의 뾰족한 산들로 둘러싸여 사람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분지였다.
타닥거리는 모닥불 너머에서 몸집이 왜소하고 추레한 외모의 사내가 버럭 소리쳤다.
“이래야 산다고 몇 번을 말해. 계속 그렇게 재수 없게 한숨만 쉴 거야?”
“한심해.”
“뭐?”
“내가 한심하다고.”
모닥불을 내려다보는 백설지의 긴 속눈썹 위로 근심이 내려앉은 듯했다.
그녀가 공격적으로 나오면 맞받아치려던 곽도엽은 뭐라 할 말이 없어져서 마른 입맛만 쩍쩍 다셨다.
“아니, 그 뭐냐. 한심한 건 아니지. 상대가 좀 안 좋았을 뿐이다.”
“죽더라도 싸웠어야 했어.”
“또 그딴 소리를.”
태생이 무인이라기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곽도엽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는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거기서 죽으면? 누구 좋으라고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어? 어차피 무쌍귀가 북경까지 왔으면 왕진은 못 이겨. 지금쯤 죽었다고 봐야 해.”
“싸움의 결과는 저 하늘의 신만이 아는 일이야.”
“개소리. 때론 뻔히 알 수 있는 것도 있지. 집의 개새끼가 호랑이를 물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참새가 매를 쪼아 죽일 수 있을 것 같냐고.”
“난 개도 아니고, 참새도 아니야.”
“무쌍귀에 비하면 넌 개나 참새야.”
울컥한 백설지의 시선을 곽도엽은 피하지 않았다.
“좋다. 그럼 말해 봐. 너도 잠깐이지만 맞서 봤잖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냐?”
“…….”
“턱도 없지? 그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나 의심스럽지?”
곽도엽도 무산학관이라는 기재들의 요람에서 주목받던 인재다.
그는 백설지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는 천외천의 존재도 있어. 아직은 때가 아닐 뿐이야. 쓸데없이 자존심 상해하지 마라.”
“이건 명예롭지 않아.”
“명예? 하! 답답한 소리 씨부리고 있네. 그래서? 명예가 밥 먹여 줘? 막말로 네가 죽으면 누가 그리 명예로워 할 것 같아? 뭐 때문에 목숨을 내버리냔 말이야.”
“오라버니.”
“뭐?”
“오라버니를 볼 낯이 없어.”
백설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평소에 항상 무표정했던 그녀의 분한 얼굴은 곽도엽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궁기는…… 아마…….”
곽도엽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오라버니가 궁기라는 사실은 얼마 전에 들어서 알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맞다면, 무쌍귀가 황궁에 나타난 이상, 궁기와 유준은 구 할 이상의 확률로 죽었을 게 분명했다.
“야, 백설지. 이런 말하긴 그런데. 아마 궁기는…….”
“잠깐.”
백설지의 분위기가 변했다.
그녀는 야생동물처럼 몸을 튕기더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서늘한 시선으로 어둠을 노려보았다.
“몇 명이야?”
곽도엽은 바보가 아니다.
백설지가 왜 저렇게 경계하는지 단박에 알아채고, 그는 허리에 찬 단도를 뽑았다.
“한 명.”
“……강해?”
“모르겠어.”
백설지의 양손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번뜩였다.
지이이익― 턱.
지이익― 턱.
뭔가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낮춘 백설지와 곽도엽이 경계하는 사이, 기이한 움직임으로 다가온 사내의 얼굴이 모닥불 불빛을 받아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준……?”
깜짝 놀란 백설지와 곽도엽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탄성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