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49화 (478/686)

14권 23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23)

유준의 머리카락은 노인처럼 새하얘졌고, 분위기 또한 기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백설지와 곽도엽은 유준의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몇 번이나 눈을 의심하며 다시 볼 정도였다.

“빙백신기……?”

백설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유준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빙백신기가 왜 쟤한테서……?”

그녀의 기감이 틀렸을 리는 없었다.

빙백신기다.

다른 건 몰라도 빙백신기를 잘못 볼 리는 없었다.

백설지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의 기운을 닮은 극한의 냉기가 유준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뿐인가?

유준이 지니고 있던 집혼기 혼백의 힘이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두 배 이상 강해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챘다.

‘무쌍귀처럼 엄청나게 강렬한 기파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백설지는 유준을 경계했다.

유준이 축 늘어뜨리고 있는 양손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매끈하고 하얗게 빛나는 손을 보니 그녀의 손과 비슷했다.

“뭔가 다른데.”

곽도엽 또한 의심스러워했다.

“두 눈을 뜨고 있잖아? 안광도 푸른빛이고.”

“그러네.”

맹인이었던 자의 눈이 또렷해져 있다.

백설지와 곽도엽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백설지는 양손에 빙백신기를 모았고, 곽도엽은 단도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유준은 이제 열 걸음이면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설지…….”

유준은 지금껏 보여 준 적이 없는 묘한 표정과 눈빛으로 백설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무표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애틋했다.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백설지에게로 점점 다가왔다.

“나? 왜?”

백설지는 뜬금없는 애틋한 분위기에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내…… 내, 동생…….”

“뭐?”

뒤이은 유준의 말은 백설지를 경악시켰다.

충격을 받은 것은 곽도엽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둘이 배다른 남매였어? 이건 몰랐는데?”

“아냐.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 한 분뿐이셔.”

백설지는 다급하게 가족의 명예를 변호한 뒤, 유준에게 따져 물었다.

“너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네 동생이야.”

“동생……. 내 동생…….”

유준은 다리를 끌면서 다가와 백설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설지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유준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애틋함과 슬픔이 담긴 눈빛은 아무리 봐도 유준처럼 보이질 않았다.

“너, 누구야?”

백설지의 기세가 조금 꺾인 사이 유준의 모습을 한 궁기는 조금 고민하다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헛?”

곽도엽이 깜짝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갑자기 망측하게 옷은 왜 벗는단 말인가?

중원의 여인이라면 깜짝 놀라 눈을 돌리겠지만, 백설지는 강인한 북해의 딸이자 무인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유준의 탈의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극도로 단련된 근육 위로 치명적인 상처들이 많았다.

특히 가슴을 비스듬히 가른 커다란 흉터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세가 심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을 빼앗는 물건은 따로 있었다.

“저건……!”

“설마?”

백설지와 곽도엽이 한마음이 되어 동시에 경악했다.

유준의 가슴 한가운데 반짝이는 물체가 두 개 박혀 있었다.

하나는 가슴 한복판에서 붉게 빛났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아래 명치 언저리에 박혀 푸른빛 냉기에 휩싸여 있었다.

“집혼기가 두 개……?”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이지?”

집혼기를 두 개나 몸에 넣은 자라니.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몸이 견딜 수 있는 거야? 나는 하나로도 힘이 드는데?”

“말도 안 돼. 내가 알기로 저건 실패한 걸로 아는데…….”

유준의 형상을 한 사내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궁기.”

궁기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를, 데리러 왔다.”

말은 뚝뚝 끊어졌지만 의미만큼은 명확했다.

“오라버니라고……?”

백설지는 충격을 받은 듯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겉모습이 다른데 어떻게 오라버니라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

“무쌍귀…….”

“뭐……?”

“막으려 했지만. 함께 죽었다. 유준과 함께.”

옆에서 곽도엽의 탄식이 들려왔다.

“역시 그랬나…….”

“알고 있었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 무쌍귀가 결국 황궁까지 온 걸 너도 봤잖아. 그렇다면 천진에서부터 그를 막던 사람들이 어떻게 됐을지는…… 뻔한 것 아니냐.”

“…….”

“저 두 사람뿐이 아니야. 흑시군이랑 금의위를 합쳐서 수백은 죽었을 거다.”

백설지는 그날 성벽 위로 뛰어오르던 무쌍귀의 모습을 떠올렸다.

격한 싸움을 치르고 온 듯했던 모습.

몸에 묻은 피가 까맣게 굳어 버린 그 섬뜩한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게 오라버니의 피였던 걸까?’

백설지는 머뭇거리다가 되물었다.

“그렇다고 쳐도, 둘 다 죽었다며? 그런데 어떻게 유준의 몸에 살아 있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난, 강시다.”

“뭐……?”

“백설천, 은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 궁기가 되었다.”

궁기는 자신의 명치에 박혀 있는 집혼기를 가리켰다.

“내 몸은 완전히 부서졌다. 유준의 몸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유준의 몸에 집혼기를 박아 넣은 거야? 오라버니의 혼백을 담아서? 운 좋게 성공해서 유준의 몸으로 되살아났고?”

궁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네. 말투를 보니까 정말로 오라버니가 맞는 것 같긴 해. 그런데 유준은? 그 몸의 주인은 어떻게 됐어?”

“죽었다. 하지만 집혼기 안에, 있다.”

궁기는 손잡이만 남은 황금 검을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촤아아악―――!

“……!”

칼날도 없는 손잡이만 휘둘렀는데, 땅바닥에 선명한 금이 가더니 그곳이 빙백신기로 꽁꽁 얼어붙어 새하얀 서리에 뒤덮였다.

“나는 궁기다. 하지만 검이 익숙하다. 이 육신, 검술을 위해 태어났음을. 느낀다.”

궁기는 황금 검의 손잡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말은, 유준도 조금 남아 있다는 건가…….”

“그렇다.”

“그래도 내 오라버니. 백설천이 맞다는 거지?”

“……그렇다.”

궁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더 물을게. 내가 누구를 닮았어?”

“어머니.”

궁기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백설지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데, 안 믿을 수는 없네.”

“난…… 난…….”

“어차피 궁기로 만났을 때도 붕대를 칭칭 감고 이상한 모습이었잖아? 겉모습만 다르다고 생각하면 뭐……. 별로 다를 것도 없네.”

백설지는 궁기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따뜻한 체온이 닿자, 궁기는 움찔 몸을 떨었다.

“다행이야. 오라버니가 죽지 않아서.”

“…….”

궁기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깜빡거리는 눈빛이 격동하고 있었다.

모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백설지의 오라버니인 백설천이 맞았다.

말투, 몸짓, 눈빛.

모든 것이 그걸 증명했다.

“잠깐, 잠깐만.”

잠시 남매가 석별의 정을 나누는 사이, 곽도엽이 나서서 현실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기이한 일이군. 강호의 기사(奇事)야. 황실의 금장과 사흉 중 최강인 궁기가 하나로 합쳐지다니……. 집혼기도 두 개나 소화해 냈고, 어쩌면 최강의 신수가 탄생했네. 그렇지?”

궁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까칠하네. 그런데 이거 하난 물어야겠어. 어떻게 이곳을 찾아왔지? 백설지가 있는 곳은 아무도 몰랐을 텐데? 우리는 모든 추적에 대비하고 있었어. 그걸 먼저 설명하지 않으면 너무 수상한데?”

곽도엽의 의문은 타당했으나 궁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눈빛으로 곽도엽을 응시할 뿐이었다.

“뭐, 뭐야.”

곽도엽이 꽤나 까칠하고 독선적이라고는 하지만, 몸에 집혼기를 두 개나 박아 넣은 괴물 같은 인물이 섬뜩하게 응시하니 기가 죽어 우물쭈물했다.

궁기의 시선은 마치 파충류의 그것 같았다.

가만히 응시하는 눈빛이, 그를 그저 쳐다보는 것인지 아니면 먹잇감이라 여기고 살피는 것인지 구별이 되질 않는다.

“쟤는 내 부관이야. 황궁에서 여기까지 도망치는데…… 도와줬어. 오라버니를 보니, 그때 싸우지 않고 살아남길 잘한 것 같네.”

궁기의 압박이 사라졌다.

그는 마치 커다란 개처럼, 백설지가 안심시키자 그제야 경계심을 풀었다.

“허어.”

곽도엽은 탄식했다.

“사흉…… 신수가 되면, 느낄 수 있다.”

“신수가 되면? 어떤 걸 느끼는데?”

“다른 신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래? 이상하네. 난 모르겠는데.”

“넌, 아직 신수가 아니다.”

백설지는 미간을 좁히면서 고민하다가, 궁기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양손을 옆으로 뻗었다.

“용생.”

우우웅―.

백설지의 양손 손끝에서 마치 커다란 용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솟구쳤다.

그 길이가 손바닥 한 뼘이다.

백설지는 이걸 보라는 듯 궁기를 향해 내밀었다.

“도철의 능력이야. 이거 알아?”

“안다.”

“난 신수의 힘을 쓸 수 있어. 그런데 신수가 아니야?”

“아니다.”

궁기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백설지의 조강(爪罡)을 맨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잠깐……!”

단단한 철검도 박살 내는 용생의 강기를 맨 손으로 붙잡다니.

백설지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빼려 하는데, 그 순간 궁기의 양쪽 눈에서 푸른색 안광이 폭발하듯 뿜어졌다.

“흡?”

백설지는 궁기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기감(氣感)이 경고했다.

궁기의 가슴 속 커다란 공동으로 그녀의 기운이 빨려 들어간다.

궁기의 손에 닿은 백설지의 용생 강기가 점차 힘을 잃고 약해지더니 마침내 촛불이 꺼지듯 훅― 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백설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럴 리가……!”

그녀는 자신의 내공의 흐름을 꼼꼼히 살펴본 뒤 신음하듯 말했다.

“기운을…… 흡수했어?”

“내 신수(神獸)의 힘이다.”

궁기는 물끄러미 백설지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된 신수는. 부서지지 않는다. 쉽게 흡수되지 않는다.”

“으음…….”

“비처로 가야 한다.”

단호한 말투 속에 백설지를 향한 걱정이 느껴졌다.

“비처라면…….”

백설지는 고민했다.

지금 그들은 어찌 보면 황실의 도망자다.

백설지는 북경에서 어떻게 행동했던가?

무쌍귀가 쳐들어오는데 성벽을 지키지 않고 밖으로 뛰어내려 도망쳤으니, 만약 황실에서 사태를 파악했다면 그들은 죄인으로 수배 중일지도 몰랐다.

고민하고 조심스레 움직여야 할 상황이었다.

함부로 그 ‘비처’라는 곳에 가는 게 옳을지 백설지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으음, 잠깐. 잠깐만.”

곽도엽은 백설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또다시 궁기의 시선이 서늘하게 곽도엽에게 닿는다.

곽도엽은 애써 그 시선을 모른 체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가족끼리 애정 넘치는 대화 중에 미안한데 말이지. 여기서 이동할 거라면 일단 황실의 동향을 살피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곽도엽은 백설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렇긴 하네.”

“무쌍귀는 무시무시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지. 왕진이 죽었는지도 확인은 해야 된다. 그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달라지게 돼.”

“으음.”

백설지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하긴, 왕진이 살아 있는지 확인해야 하긴 하지.”

“그래. 어찌 됐건, 모닥불 피워 놓고 청승 떨던 시간은 이제 끝이구만.”

곽도엽은 툴툴거리면서 물었다.

“어떻게 할래? 곧바로 하산할까?”

백설지가 궁기의 눈치를 살펴보니, 그는 그녀의 결정에 맡기는 것처럼 보였다.

기다릴 것인가?

움직여 볼 것인가?

결심은 빨랐다.

백설지는 과감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알았어. 그럼 일단 내려가서 상황을 살피고, 비처로 갈지, 다른 일을 우선할지 결정하자.”

***

백설지는 관도라는 작은 마을에서 친절한 점소이가 있는 객잔에 들렀다. 은은한 잎차의 향기가 올라왔다. 그녀는 궁기와 마주앉아 있었지만 서로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서로 간에 말투가 너무 특이한 탓이다.

백설지와 궁기는 두 사람 다 죽립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금발에 벽안을 지닌 서역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백발에 푸른 안광을 띤 괴인의 모습이지 않은가.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끌어모을 외모이니, 조용히 몸을 감추는 건 중요한 문제였다.

“이거 큰일 났는데.”

빠른 걸음걸이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온 곽도엽은 탁자 옆에 서서 그가 알아온 정보를 조심스레 내뱉었다.

“왕진이 살아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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