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50화 (479/686)

14권 24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24)

“살아 있어?”

백설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쌍귀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인 모양이야. 정보료로 돈을 꽤나 썼어. 그 난리가 났었는데…… 그자는 지금도 멀쩡하게 문무백관들이 모인 회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데?”

곽도엽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도 죽립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구부정한 허리와 툭 튀어나온 이마는 숨기지 못했다.

“그럼, 그 사람은?”

“무쌍…… 그 사람 말이지?”

곽도엽은 입이 마르는 것처럼 입맛을 몇 번 다셨다.

“그것도 이상해. 북경…… 그곳이 뒤집어질 정도의 일이었는데 지나치게 조용해. 그리고 그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뭐?”

백설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안 돼. 우리도 없고, 여기 궁…… 오라버니도 없었는데, 무슨 수로 막아?”

“모르지. 그 요사스러운 언변으로 설득이라도 했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백설지는 단언했다.

그녀는 무쌍귀를 마주 보고 겨루려고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 살기.

그 패력.

말로 어찌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왕진을 만나는 순간, 생사결이 될 게 분명했다.

“이상해. 도저히 납득이 안 돼.”

“납득이 되든 안 되든, 현실을 보면 내가 말한 대로야. 이제 어떻게 할래? 북경으로 갈 거야? 아니면, 저…… 궁 씨가 말하는 대로 갈 거야?”

백설지는 침묵했다.

그녀는 섣불리 선택하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했다.

“아참, 이건 덤이야. 다른 걸 조사하다가 들은 말인데. 그놈 말이야. 천무공자.”

“응?”

“천무련이라는 걸 만들었더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야. 여기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문파 하나를 작살낸 모양이던데. 그래서 관도 사람들이 입만 열면 그놈 얘기야.”

곽도엽은 난놈은 난놈이라면서 투덜거렸다.

‘소호. 여기에 있었구나.’

백설지는 잠시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연한 갈색의 찻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찻잎처럼, 백설지의 마음도 갈피를 잡질 못했다.

“크흠! 내 말은, 제삼의 선택도 있단 말이야. 천무련이 여기서 멀지도 않더군. 원래 안면이 있는 놈이니까, 가서 잠시 머무르면서 동향을 살피는 게 어때?”

“그 천무련이라는 곳에? 신세를 지자고?”

“신세랄 거나 있나? 같은 학관 출신인데 방이나 하나 빌려달라면 되지. 솔직히 지금은 불안 요소가 너무 많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이 안 돼. 이런 때는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게 아냐. 그늘에 숨어서 상황을 살펴야 해.”

곽도엽은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불안한 듯 보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객잔 안의 손님들을 힐끔거리면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긴, 원래부터 성격이 완고하고 꼼꼼했지. 그나저나 소호…… 소호는……. 어떻게 지내려나. 그 애도 집혼기를 갖고 있을텐데.’

백설지는 가만히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그래. 가자.”

“어디로?”

“천무련.”

백설지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라버니. 잠깐만 거기에 들렀다 가자. 걔한테는 물어볼 것도 있어.”

“시간. 없다.”

“알았어. 하지만……. 잠시 몸을 피하긴 해야 할 것 같아.”

궁기는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따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에 시립했다.

백설지의 대각선 뒤에서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오래된 호위무사 같았다.

“마차는 객잔 앞에 준비해 뒀어. 곧바로 가면 돼.”

“……우리가 어디로 갈 줄 알고 마차를 준비했어?”

“어디로든 가긴 하겠지. 그럼 여기에 뿌리를 내리겠어?”

곽도엽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지만, 백설지의 내면을 파악한 눈치와 철저한 준비성만큼은 놀라웠다.

“그래. 가자. 천무련은 어디에 있어?”

“안휘 북부.”

백설지와 궁기. 그리고 곽도엽으로 구성된 삼인은 곧바로 마차를 타고 관도를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잠시 후, 관도객잔에 머물던 의문의 사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먹은 것을 계산하고 객잔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들은 미리 대기시켜 둔 마차를 타고, 백설지 일행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

“쿠에엑―. 꿱.”

방익지는 바닥에 엎드린 채 헛구역질을 토해 냈다.

그의 양쪽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입과 코에선 끈적한 타액이 흘러나왔다.

땅바닥이 타액으로 흥건히 젖었지만 덩어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그는 몇 번이나 속을 게워 냈는지 모른다.

이미 속이 뒤집혀서 토해 내길 수차례.

속이 텅 빈 지 오래였기에, 나오는 게 아무것도 없음에도 그는 헛구역질을 멈추지 못했다.

“커허, 죽겠다.”

방익지는 탈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엔 그를 형님처럼 모시는 천무련의 무인들이 삼십 명이나 있었지만, 방익지를 부축해 줄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 모두가 방익지보다 더 처참한 몰골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탓이다.

한때 도철이 이끄는 흑시군의 기지였던 넓은 연무장에는,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못난 사내들이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조, 조장님…….”

“괜찮으십니까……?”

바닥에서 머리만 뗐는데도 부들거리는 자들이 방익지를 보면서 걱정을 표했다.

방익지는 헛구역질을 몇 번 더 토해 낸 뒤, 도대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씨벌, 지랄하네. 밥상머리에서 숟가락도 못 들 것 같은 것들이.”

“그게…….”

주변의 무인들이 눈치를 살피면 서 서로 중얼거렸다.

“조장님도 똑같아 보이는데…….”

“시끄러.”

방익지는 쌍욕을 연달아 토해 냈다.

“씨벌, 씨벌, 씨벌! 니들 같으면 괜찮겠냐…….”

그는 어찌나 지쳤는지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팔순 노인처럼 숨을 씩씩거렸다.

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뒤로 벌러덩 드러눕고 말았다.

“하아. 하아. 천무공자…….”

내공을 모조리 쏟아낸 단전은 말라붙은 것처럼 공허했고, 어떻게 된 게 전신에 지치지 않은 근육이 단 하나도 없어서 가만히 숨만 쉬어도 손발이 덜덜 떨렸다.

방익지는 사람을 어디 하나 병신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그 압도적인 ‘재능’에 경의를 표했다.

“미쳤어……. 미친 거야.”

그런데 사람의 몸이라는 게 참 이상했다.

지쳤는데 상쾌했다.

체력을 쓰면서 몸에 쌓여 있던 독기도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이렇게 다 쏟아낸 게 얼마만인지…….”

방익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지나치게 푸르고 창창했다.

햇볕의 따스함이 꼭 그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십년 만인가……?”

방익지는 사실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사십 대니 무인으로서 한창이라 생각하면서 자만했는데.

돌이켜보면 어느 순간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수련을 하면서 모든 걸 쏟아낸 게 무려 십 년만인 것이다.

무인으로서 실격이다.

지금 이 수련에 비교하면 매일 행하는 단련은 이미 몸에 익을 대로 익은 허우적거림에 불과했다.

“그 눈빛…….”

방익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전에 그들을 몰아붙이던 사람은 이젠 머릿속에 떠올리기도 두려웠다.

화려한 복색에 어린아이처럼 얼굴이 해사하면 뭘 하는가.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는데, 두 눈으로는 그의 내공의 흐름 하나하나를 다 꿰뚫어 보는 시선이라니.

호랑이 앞의 사슴이 이러할까?

어디로 도망쳐도 도망칠 수 없는 초식동물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끄응.”

방익지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면서 겨우 몸을 비틀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방익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게 다 객잔에서의 말실수 때문이다…….”

방익지는 그때의 자신을 만나서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멍청한 놈이, 건방지게 말을 함부로 내뱉는다고.

대체 어쩌자고 그딴 망언을 내뱉은 거냐고 피가 나도록 후려치고 싶었다.

“하아.”

방익지는 한숨을 내쉬면서 조금 전에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조장님. 이 칼자국 보세요.”

“믿을 수가 없다. 이게 사람의 솜씨인가……!”

“조장님, 진짜 천무공자 혼자서 이 많은 인원을 벤 겁니까……? 저희는 지금 뭘 보고 있는 겁니까……?”

비학문의 참담한 광경을 목격한 방익지와 천무련 무인들은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당장 오늘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를 위협하며 핏대를 세우던 상대가 비학문이었다.

솔직히 천무련 무인들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천무공자의 명성에 기대고 있을 뿐.

실제로는 어느 한 문파에 소속된 적이 없는 야망만 큰 낭인에 불과한 게 그들이었다.

방익지와 무인들끼리라면 비학문을 이렇게 무너뜨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들 중 가장 강한 방익지라 하더라도, 비학문주는 물론 관도 최고의 검객이라는 오학검 송문에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비학문의 모든 이들이 쓰러져 있었다.

사지근맥이 잘린 채.

다 똑같은 검 자국을 몸에 새긴 채 말이다.

“이걸 봐라.”

방익지는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기절해서 쓰러져 있는 무인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이 상처 좀 봐……. 다 똑같아. 검이 베어 들어간 깊이, 각도, 일정한 힘. 이렇게 균일할 수가 있나……? 사람의 움직임이 이렇게나 정확할 수 있는 것인가?”

사지 근맥을 베어 낸 칼자국이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방익지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다른 천무련의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무공을 익힌 이들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검을 허공에 휘두르는 것?

쉽다.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막상 진검으로 약하디약한 짚단만 베려고 해도 마음처럼 안 되는 게 사람이었다.

짚단도 힘든데 그게 살아 있는 생물이면?

검으로 맞추기도 힘들다.

사람의 피부와 옷은 생각보다 질기고 미끄러워서, 칼로 제대로 베려면 가장 적합한 각도로, 정확한 힘을 가해야만 한다.

그런데 만약에, 그 상대가 무인이라면?

그 난이도는 얼마나 올라갈까?

“이건 모든 검술의 교본이야. 무공을 익힌 무인을 상대로 수십 대 일로 싸우면서……. 그들의 몸에 똑같은 모양으로 균일한 상처를 입힌다……?”

방익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잘 기억해 둬라. 이게 바로 천무공자님의 능력이시다. 이런 게 천외천(天外天)이야. 세상에는 우리 상식 밖의 재능이 너무나 많다.”

“예!”

천무련의 무인들은 쓰러진 비학문의 문도들을 살피면서 돌아다녔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약해진 자들은 있었지만, 그래도 숨이 멎은 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모든 이들의 상처를 지혈시키고, 늘어놓기를 잠시.

관부에서 나온 자들과 함께 비학문을 수습하는 데는 이틀이 꼬박 걸렸다.

사내들을 죽지 않게 의원에게 보여 주면서 감옥에 집어넣고, 비학문에 남아 있던 서류들을 수습해서 죄를 밝히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했다.

“공……. 아니, 련주님?”

마침내 비학문을 수습하고 천무련에 돌아왔을 때, 방익지를 비롯한 서른 명의 무인들은 경악하며 황급히 포권을 취했다.

“왔어요? 고생했어요.”

천무련이라 적힌 현판 너머.

넓은 연무장의 중심에서 천무공자가 나무로 만들어진 십팔반병기를 옆에 늘어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 조장이랑 여러분은 저처럼 ‘나이도 어린 애송이’를 보좌하느라 힘이 들잖아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보답을 좀 해 보려고요.”

천무공자 장소호가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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