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25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25)
‘세상에,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구나!’
방익지는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관도객잔에서 천무공자가 어리다고 얕보는 듯한 말을 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날 크게 질책하지 않고 그저 눈치만 주고 넘어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소호는 그 일을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보답이라니요. 저희는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련주님.”
“하핫, 아니에요. 아직 어리긴 해도 제가 작은 재주가 하나 있거든요.”
“크흠! 어리지 않습니다! 련주님은 어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작은 재주라고 하시면……?”
“무공이죠. 좀 부끄럽지만 세간의 사람들은 천무삼보라고 부르더라고요.”
천무공자는 바닥에 늘어놓은 십팔반 병기들 중에 일반적인 크기의 검을 발끝으로 툭 쳤다.
휘리릭―.
“아……!”
무인들 중에 몇 명이 탄성을 내뱉었다.
무인은 무인을 알아보는 법이었다.
천무공자가 발끝으로 검을 차올리는 그 작은 동작 하나에서도 그들은 천무공자가 이룩한 무공의 높은 경지를 느꼈다.
‘사람의 동작이 저렇게 깔끔할 수 있다니.’
‘호흡 하나, 행동 하나에도 군더더기가 없다.’
무인들은 수군거리면서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으음…….”
한편 소호의 말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방익지가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찰나, 천무공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여러분들끼리는 비학문과 싸울 수 없었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시장통에서 그들과 말싸움을 한 거잖아요. 비학문도 속은 더러웠지만, 겉으로는 명색이 ‘정파’를 표방하는 곳이니까. 정도에 어긋나게 함부로 피를 볼 리는 없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내 이름을 팔면서 일을 해결하려 했고요.”
천무공자는 “으음.” 하고 불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 게 마음에 안 드네요. 천무련에 소속된 무인들이, 팔파일방도 아니고 변두리의 작은 무림 문파에도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천무공자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부끄러워졌지만,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제가 봤을 땐…… 비학문이 만약 체면을 차리지 않고 여러분들을 기습했으면, 팔 할 이상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
방익지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차이는 안 난다고 반박하려다가, 천무공자의 서늘한 눈빛과 마주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상대는 천무공자다.
쳐다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또 그 무공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는 하늘이 내린 무인.
“그래서 말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 방법을 찾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제가 무공을 지도하겠다는 거예요.”
스릉―.
이상한 일이었다.
천무공자의 손에 들린 건 날도 서지 않은 목검인데, 이상하게 공기가 갈라지는 것 같은 섬뜩한 예기가 느껴졌다.
척― 하니 겨눈 목검의 끝이 방익지의 심장을 향했다.
“누가 먼저 해 볼래요?”
방익지가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한 청년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련주님! 저 진태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목소리가 우렁차고 기골이 큰 사내였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눈빛을 지닌 청년이었다.
“좋아요. 본인이 지닌 최고의 무공으로 덤벼 봐요.”
“한 수 배우겠습니다!”
정중하게 포권을 취한 진태는 잠시 본인의 검병에 손을 얹었다가 망설였다.
“괜찮아요. 진검으로 해요.”
“예.”
진태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들 모두는 이미 비학문에서 천무공자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 흔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방심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본인은 진검이고, 상대는 목검이라는 차이가 진태에게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하아압!”
진태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자, 지켜보던 천무련 무인들은 감탄했다.
“생각보다……!”
“검술이 제법……!”
진태의 검술은 기세가 제법 뛰어났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 하나하나가 명확했고, 검끝은 떨리지 않고 차분했다.
진태가 사력을 다해 검술을 전개했다.
상단에서 중단을 향해 내리치는 듯싶더니, 목과 요혈을 찔러가는 검로에서 상당한 예기가 뿜어졌다.
“기본은 삼재검(三才劍)이네요. 도문(道門) 쪽이긴 한데, 무당이나 화산은 아닌 것 같고. 종남 쪽인가요? 속가? 태을(太乙)검 느낌이 나는데?”
진태가 삼 초식 정도 전개했을 때, 천무공자의 눈은 이미 그의 검술을 다 파악한 것처럼 보였다.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 적절한 순간에 반보(半步) 옆으로 빠지면서 상체를 비스듬히 돌린 것만으로도 진태의 검술은 방향을 잃고 평정을 잃어버렸다.
천무공자가 딱히 절정의 신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적절한 순간에 가볍게 움직인 것만으로 진태의 검술이 무용지물로 변해 버렸다.
“태을검이…… 맞습니다.”
진태는 탄복하면서 인정했다.
“허어.”
방익지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진태가 정말로 종남파의 무공을 익혔었구나. 그래서 자신 있게 나섰던 거군. 대단하다. 그걸 또 알아보다니. 천무공자는 모르는 무공이 없다던데……. 천무삼보는 진짜다.’
진태는 이를 악물고 검술을 더 전개했으나, 그 후로는 천무공자의 일방적인 지도만이 이어졌다.
“하체가 나오는 속도가 반 박자 빨라요.”
탁!
“윽?”
천무공자가 목검으로 무릎 안쪽을 툭 건드렸을 뿐인데, 진태는 다리가 쭉 벌어지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제문(臍門), 당문(當門), 기문(氣門). 내공이 흐르는 방향이죠? 이거 틀렸어요. 검을 쓸 때는 흐름을 반대로 써요.”
툭!
“크윽?”
천무공자가 툭툭 내뱉는 가벼운 말들이 진태에게는 몇 년이나 수련해서 얻어야 할 깊은 깨달음이다.
진태가 더욱더 열정에 불타는 것과 달리 그의 몸은 빠른 속도로 지쳐 버렸다.
기이했다.
아무리 무공의 차이가 크다고 해도, 생사결도 아닌 대결만으로 체력이 소모될 리는 없는데.
천무공자가 툭툭 약점을 지적하고 검끝으로 몸을 건드릴 때마다 진태는 눈에 띄게 지쳐 갔다.
숨이 거칠어지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공의 흐름이 끊겨서 호흡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쿠웨엑.”
진태는 헛구역질을 하면서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부끄러워하면서 다시 일어서려고 했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 옆으로 기우뚱 쓰러졌다.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일어서지 못하는 모습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을 연상케 했다.
“어……?”
“좋은 지도 대련이었는데, 벌써……?”
고수의 가르침을 마다할 무인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러니 진태가 가진 힘을 모두 드러내며 달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렇게 의욕을 보인 진태가 쉽게 지쳐 쓰러지는 것이 의아했다.
“이 친구가 약한 게 아니에요. 제가 역근경의 묘리로 본래 몸에서 안 쓰던 근육을 쓰게 만든 탓이죠. 지금은 괴롭지만 몸은 한층 유연하고 강해질 겁니다.”
“……!”
역근경.
소림의 대표적인 무공이자, 본래는 소림에서도 나한진에 들어갈 수 있을 무재만이 배울 수 있다는 절세 무공이다.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
그들은 진태가 드러누운 틈을 놓치지 않고 앞다투어 뛰쳐나왔다.
“다음은 이 무룡이 한 수 배우겠습니다!”
“아니다! 산서 출신 장봉이 한 수 배우겠습니다!”
천무공자는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자, 급할 것 없어요. 어차피 모두와 한 번씩 지도 대련을 할 겁니다. 차례차례 나오세요. 우선 무룡부터 볼까요?”
“예!”
마치 십 대 초반의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몰려든 사내들이 천무공자의 앞에 줄을 서서 시립한다.
‘이건……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데…….’
그때의 방익지는 알지 못했다.
이런 무공에 대한 열망이 그들을 얼마나 깊고 고통스러운 구렁텅이에 빠뜨릴 줄을 말이다.
***
천무련이 자리 잡은 땅은 넓었다.
본래 도철이 흑시군을 훈련시키던 장소답게 수백 명에게 전투 진형을 훈련시킬 수 있을 만큼 넓은 부지가 이제는 모두 천무련의 땅이다.
“어?”
소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천무련 본각(本閣)으로 향하다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키가 소호만큼이나 크고 어깨에 붉은색 비단 장포를 걸친 여인이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 젖살이 빠지고 얼굴은 갸름해졌지만, 어릴 때와 똑같이 동그랗고 순수한 눈동자는 여전했다.
“오라버니. 기분 좋아 보이네?”
최근 하오문에서는 무산 철공주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는 대미미가 소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미미야! 언제 왔어? 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냥, 저쪽이 소란스럽기도 했고. 바람도 좀 쐬고 싶어서.”
“그랬구나.”
대미미가 소란스럽다며 가리킨 방향은 소호가 방익지와 천무련 무인들을 ‘수련’시킨 방향이었다.
“천무련에 들어온 무인들을 좀 지도해 줬어.”
“무공을? 그런 것치고는 너무 즐거워 보이는데?”
“사적인 복수도 쪼오끔 했거든.”
“사적인 복수?”
대미미가 의아한 듯 골똘히 생각하다 물었다.
“오라버니는 웬만해선 복수 같은 거 안 하잖아? 누가 그렇게 기분 나쁘게 만들었어?”
“응?”
“누군데?”
“아냐, 아냐, 별건 아니었어.”
대미미는 궁금해했지만, 소호는 그 이상 말해 주지는 않았다.
소호가 친남매나 다름없는 섭주해나 대미미에게 숨겨야 할 일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때로는 굳이 말하지 않는 게 나은 일도 있었다.
“미미 너, 지금 내가 말하면 일륜방(一輪幇) 때처럼 가서 박살 내려고 그러지?”
“박살을 내다니. 내가 언제?”
대미미는 오해를 받는 게 섭섭한 듯 억울하고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응? 박살 낸 게 아니라고?”
“아니야. 그때 그건 그 사람들이 워낙 오라버니를 나쁘게 말하니까, 내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가서 그냥 좀…… 한마디 했어.”
“…….”
“진짜야. 난 일륜방 사람들 때리지도 않았어.”
소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 때리진 않았지. 맨손으로 현판을 찢어 버려서 그렇지.”
“피―, 현판이 약하더라.”
“일륜방 방주가 지금도 자다가 벌떡벌떡 깬대. 밤마다 겁에 질려서 무산 철공주가 왔냐고 호위들한테 소리 지른다더라.”
“그래? 원래 좀 심약했나 보다.”
“대들보를 뽑아서 땅에 박아 버리면 나라도 심약해질 것 같은데?”
“난 오라버니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못 참아.”
대미미가 서운한 듯 울상을 지었다.
소호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그런데 이번 건 내가 잘 해결했어. 그냥, 좀……. 아직은 사람들이 내 힘을 못 믿더라고.”
“오라버니 힘을 못 믿어?”
“응. 그래서 무공을 가르쳐 줬어. 그러니 해결되더라.”
“잘됐네. 천무공자의 무공이면 확실하지.”
대미미는 배시시 웃으면서 소호의 옆으로 다가왔다.
“주해는 군사실에 있지?”
“응. 그런데…….”
소호가 주해를 만나기 위해 군사실로 향하려 하자, 대미미가 소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손님이 왔어. 반가운 손님이야. 아마 먼저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손님? 누구?”
소호는 그를 찾아올 만한 손님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은자촌 사람? 무산학관 사람일까? 아! 혹시 패원강 소협인가? 만약 그렇다면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소호는 몇 명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으나, 대미미의 대답은 소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기옥. 주기옥이 찾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