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1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
허름하고 적막한 관제묘 안에 한 사내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기울인 채 앉아 있었다.
밖에서 보면 뒷모습밖에 보이질 않지만, 등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근골이 좋고 온몸이 근육질인 사내였다.
그는 평범하다 못해 허름해 보이기까지 하는 낡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특히 어깨와 옆구리 부분은 얼마나 낡았는지 천이 반들반들해 보일 정도였다.
관제상을 마주 보고 있는 그의 뒷모습에서 쓸쓸한 애환이 감돌았다.
낡은 관제묘에 홀로 퍼질러 앉아 있는 사내라니.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그는 은은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향로를 앞에 두고, 꿀꺽꿀꺽 술을 들이켜다가 호리병을 큰 소리가 나도록 쿵 내려놓았다.
“후우.”
사내가 내뱉는 주향에 향연(香煙)이 흔들렸다.
그는 속이 타는 듯 보였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뜨거운 눈빛이 번뜩이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는 큼직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리더니, 결국 다시 호리병을 들고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관제묘에서 술을 마신다?”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호리병의 술을 깨끗이 비웠다.
“이거이거, 너무 허름하군.”
그를 찾아온 손님은 인상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복색은 고급스럽고, 밝은 비단 장포가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나이는 삼십 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갸름한 얼굴형에 눈이 길게 찢어진 사내가 관제묘의 입구에서 여유롭게 뒷짐을 진 채 물었다.
“우리의 하나뿐인 일검(一劍)께서 술을 마실 만한 곳이 아닌데?”
“청광?”
“그래. 나 청광일세. 백검회의 회주가 왔는데 일검께선 나를 환영해 주지 않을 건가?”
만약 이 자리에 강호인이 있었다면 그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소문이 무성한 백검회주와 일검이라니.
그들은 당금의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주역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검회의 인물들이 왕진 태감과 대적하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면 백린탄으로 분신자살을 하는 모습은 세상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교(邪敎) 같다는 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의기(義氣)가 하늘을 찌른다고도 말했다.
그 결속력과 정신력만큼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들은 최근에 녹림수로맹과 전면전을 치르는 중이다.
각지에서 벌어지는 백검회와 녹림수로맹의 싸움은, 강호의 호사가들이 열정적으로 떠들기에 아주 좋은 소재였다.
“그만하고 이리 나오게. 벌써 이게 며칠째인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술상이 화려하다는 항주 금선로까지는 못 가도, 안휘에서 제일가는 기루에서 오늘 일검을 모시도록 하지. 우리도 그 정도 돈은 있어.”
콰직!
일검이라 불린 사내.
백검회의 가장 강한 검(劍)이자, 한때는 화산의 비할 바 없는 기재로 불리던 육모담이 호리병을 바닥에 거칠게 내리쳤다.
안 그래도 낡아서 삐걱대던 바닥을 뚫고 호리병이 절반이나 박혀 버렸다.
육모담은 들소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난 술이 마시고 싶은 게 아니야.”
육모담의 목소리는 동굴 속에 낀 안개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불성설이군. 그렇다면 자네는 지금 왜 마시고 싶지도 않은 술을 마시고 있는 건가?”
“속에서 천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어서 마시는 것이다.”
“그래? 어째서 그리 속이 상했나?”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버럭 소리친 육모담이 아차 싶었는지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군. 내가 너무 흥분했어……. 아무리 술을 마셔도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그런데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가슴이 까맣게 타 버릴 것 같아.”
“신경 쓰지 말게. 그보다, 왕진이 살아 있다는 게 그렇게나 충격이었나? 난 이해할 수가 없군.”
“말이 안 되니까 그런 거야.”
육모담은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된다고. 말이.”
“뭐가 그리 말이 안 되는가?”
“그자가! 천하에 짝이 없게 강한 자가! 황실에 쳐들어갔는데 그놈이 살아 있어? 아니, 왕진 그놈을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살아남았다는 거야! 사신이나 다름없는 자가 쳐들어왔는데, 대체 어떻게!”
백검회주 청광은 혀를 찼다.
“이 사람 참, 진정하게. 결국 그 무쌍귀라는 이름도 허명이었다는 것 아니겠나? 강호에 이름값만 못하는 무인이 한둘이던가?”
“그런 게 아니야. 그자는 허명이 아니라고.”
“북천의 난(亂) 때 활약을 보여서 그러는 건가? 사람은 늙는다네. 벌써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때와 똑같이 강하다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나? 그저 황실의 방비가 탄탄했던 것이겠지. 그리 상심할 필요가 없는 일이야.”
육모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설득했든 싸워서 막았든, 무쌍귀도 못했다면 이 나라에는 아무도 그자를 건드릴 수 없다는 소리다. 불가능해. 그렇지. 불가능해. 방도가 없어. 이 나라는 이제 끝난 거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은, 육모담과 오랫동안 보아 온 청광이 느끼기에도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육모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결심을 내린 듯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회주. 난 이 나라를 떠날걸세.”
“뭐?”
청광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이 나라를 떠나면? 장성 밖의 다른 나라에 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래.”
“허.”
“북원의 잔당들이 요즘도 강성하다더군. 특히 최근에는 장가구 밖의 오이라트가 그렇게 강하다고 했어.”
“……다른 나라로 가서 왕진을 죽이겠다?”
“무쌍귀는 젊었을 때 전장에서 강해졌다고 들었다. 내게도 집혼기가 있다. 나도 강해질 수 있어. 무쌍귀처럼 될 수 있다는 거다. 어차피 이 나라 안에서는 아무도 못할 테니, 내가 무쌍귀만큼 강해져서…… 왕진을 죽이면 돼. 그래, 간단한 일이다.”
육모담은 강한 기파를 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살기를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섬뜩했다.
가만히 내리깐 눈.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지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모습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충분히 강한…….”
청광은 말문이 막혔다.
그도 청성의 일대 제자로서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예전엔 그나마 육모담의 무공경지가 어디쯤인지 느꼈었는데, 이제는 그 경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오매검협이라 불리던 화산의 기린아.
그가 집혼기를 얻고, 혼백의 힘을 채우면서 이제는 막강한 무신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육모담은 부족하다고 말한다.
무쌍귀가 불가능했으니, 자신도 그만큼은 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생각해보지 않겠는가?”
육모담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서 있었는데 눈빛이 살기와 집착으로 번들거렸다.
‘화산파 멸문의 원한이 정녕 하늘에 닿았구나.’
청광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다시 생각해 보게. 그건 안 될 말이야. 왕진에게 복수하기 위해 옆 나라로 가서 전쟁을 하겠다고? 이 사람, 오자서가 따로 없군. 지금이 춘추 전국 시대인 줄 아는가?”
“못할 건 또 뭐지?”
육모담의 의지는 강했다.
“이 나라에는 방도가 없다. 떠나야 해. 사문의 복수는 그 방법으로만 할 수 있다.”
“우리의 대의는?”
청광은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왕진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을 모아 꼭 정의로운 일을 행하자고 했던 우리의 약속은? 그동안 수많은 동지들이 대의를 이루기 위해 백린을 몸에 붓고 스러져 갔는데, 그들은 대체 뭘 위해 목숨을 바친 건가? 이렇게 떠나 버리면 뭐가 남느냐는 말이야!”
“그들도 이해할 거다. 왕진을 죽이려면 이 방법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라 안에서 해결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어! 안 되면 살수가 되어 왕진 하나라도 죽이자고. 힘을 더 모아야 하네. 이렇게는 안 돼.”
“회주. 자네는…….”
육모담은 가만히 서서 청광을 마주 보았다.
열정적으로 언변을 뽐내려던 청광이 입을 다물게 만드는 심유한 눈빛이었다.
“정말로, 복수를 하고 싶긴 한 것인가?”
“……!”
청광은 벼락을 맞은 듯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백검회를 만들 때 우리가 한 말을 잊었나?”
“왕진이 죽기 전까진 편히 자지 못하리라 했지.”
“우린 그걸 위해 지금껏 달려왔어.”
“그래?”
“그렇네! 대체 왜 그런 걸 묻는 건가?”
육모담은 대답하지 않았고, 청광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육모담은 감정이 좀 가라앉은 듯,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백검 중에는 청계가 있다. 그의 검술은 경지에 올랐어. 집혼기의 혼백을 다 채우면 명성을 떨치기에 충분할 걸세.”
“……청계로는 부족해.”
“백검회는 강하다. 청계 하나면 충분할 것이야.”
육모담의 결심은 단단했다.
말로는 설득이 힘든 것을 알아챈 청광이 탄식했다.
“이 무슨 일인가. 우리 백검회의 가장 강한 검객이 북원으로 떠나겠다니.”
“이 방법밖에 없다.”
“자네의 마음이 그리도 확고하니 억지로 말싸움을 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난 자네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네. 청계로는 부족해. 난 느낄 수 있네. 청계가 강해진다고 한들 자네 같은 거인이 되지 못해.”
“청계는 강해.”
“부탁이 있네.”
육모담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게.”
“자네가 없으면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있어. 그자들만 처리해 준다면……. 마음이 아프지만, 자네가 잠시 외유(外遊)를 떠난다 해도 괜찮겠지.”
“그자들?”
“사흉의 잔당.”
육모담이 호기심을 보였다.
왕진 태감과 그가 목줄을 채워 기르는 사흉이라는 무인들.
화산을 멸문시킨 것 또한 그들이 원흉 아니던가.
“사흉이 남아 있나?”
“도올과 도철은 죽었고, 남은 건 궁기와 혼돈. 그 둘 다 무쌍귀가 황실로 직행할 때 다 죽었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아니었어.”
“그럴 리가.”
육모담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무쌍귀와 싸우고도 살아 있다고?”
“나는 철저히 조사했네.”
“믿기지가 않는군.”
“알다시피 지금 강호에는 각 세력이 정보력을 총동원하고 있네. 개방, 하오문, 동창. 너나 할 것 없이 이번에 벌어진 일의 진상을 알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어.”
청광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천진에서 북경으로 이어지는 관도에서 벌어진 혈전은 유명하지. 시체도 많이 생겼어. 그런데 최근에 이상한 일이 생겼네. 시신들을 털어먹으려던 도적들이 누군가에게 죽은 거야.”
“도적은 늘 죽지. 자기들끼리 싸운 것 아닌가?”
“아니야. 도적 떼는 거인이 검을 휘두른 것처럼 몸이 잘려서 죽었네. 몸통의 절반이 깔끔하게 잘려 있었어. 게다가 햇빛이 쨍쨍한 오시에 무려 한 시진 동안이나 시신이 꽁꽁 얼어 있었다는군.”
“……!”
육모담은 그제야 제대로 반응했다.
“혼돈과 궁기……!”
“바로 맞췄네. 좀 이상한 부분은 있지만, 흔적으로 봐선 분명 그들일 확률이 높아.”
“그들을 죽여 달라는 거군.”
“내가 따로 계획은 세웠네. 강호 무림인들의 공분을 일으켜야지. 하지만 최후에는 자네의 무력이 필요할 걸세.”
육모담은 잠시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 계획은 변함이 없네.”
“북원으로 떠나는 것 말인가?”
“그래. 하지만 자네 말이 맞아. 사흉에게 복수는…… 하고 가야지.”
“잘 생각했네. 나도 준비가 다 되면 부르도록 하지.”
“…….”
“그래도 다시 생각해 주게. 백검회는 자네가 필요해.”
육모담은 대답하지 않았고, 청광은 더는 채근하지 않고 돌아갔다.
적막이 가라앉은 관제묘.
집착과 살기로 가득한 육모담의 두 눈만 조용히 번뜩이고 있었다.
***
소호는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열세 살 어린 시절에 만난 사람들이다.
너무 평온해서 지루하기까지 했던 은자촌 생활을 변화시킨 방문객들이었다.
“기옥아!”
깐깐하고 도도한 얼굴의 청년.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밝은 갈색의 옷과 잘 어울렸다. 몸도 탄탄하고 커졌지만 어린 시절의 건방진 눈매는 여전했다.
“그리고…….”
소호는 기옥도 반가웠지만 그 뒤에 있는 중년의 사내를 보며 더 놀랐다.
둥그런 눈에 각진 턱은 그대로였다.
눈가에 주름이 많이 생겼으나 눈빛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진중하고 현명해졌다.
“배진화 아저씨?”
배진화.
기옥을 데리고 풍운객잔을 방문했던 중년의 사내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