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2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2)
“공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배진화는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굽혔다.
절도 있는 그 인사는 높은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엥?”
소호는 당황해서 희한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야, 왜 그래요?”
“무슨 말씀이신지……?”
“예전에는 편하게 대해 주셨잖아요? 지금도 기억나요. 어서 네 아버지를 보여 달라면서 소리치고 그러셨는데?”
“커험! 그게 언제 적 이야기입니까?”
배진화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이렇게 장성하셨으니 예를 다해야죠.”
“하핫, 아니에요. 편하게 대해 주세요. 오래전에 알던 분을 만나서 반갑네요.”
“그런…….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배진화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소호는 다시 주기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옥이도 여기까지 찾아와 줘서 고마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마을에 없던데 어디 갔었어?”
“사정이 있어서 밖으로 나왔지.”
주기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배진화를 가리켰다.
“저 아저씨가 십 년 만에 찾아와서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하잖아. 난 망치질하기도 바쁜데 말이야. 광 영감이 드디어 화포 관련된 것도 만들 수 있게 허락을 해 줬는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아?”
“황……! 아니, 공자님, 왜 또 그러십니까? 공자님께서는 대장간에서 망치질이나 하실 운명이 아니십니다.”
“망치질이나? 망치질을 무시하다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아니,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주기옥이 투덜댈수록 배진화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쩔쩔맸다.
“하핫! 대단한데? 기옥이 너 드디어 허락을 맡은 거야? 그 깐깐한 광 할아버지가 정말로 허락을 해 줬어?”
“그래. 그때 형이 부탁한 백린탄을 연구해서 보여 줬더니 그게 마음에 들었나 봐. 드디어 허락을 해 줬어. 이젠 영감이 쓰던 도구를 다 쓰게 해 준다니까?”
“도구를 다? 진짜?”
“내가 그걸로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게 얼마나 많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잡혀 오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고.”
“흐음, 아깝네.”
소호는 흥미를 느꼈다.
어린 시절 광사로의 대장간에 가서 여러 가지 폭약들과 암기들을 보는 게 소호의 낙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기에 기옥에게 공감이 간다.
광사로의 기술을 배운 기옥이 자신만의 물건을 만들면 얼마나 특별한 게 만들어질까?
분명히 성격대로 톡톡 튀고 독특한 장비들을 만들어 낼 터였다.
‘기옥이가 뭘 만들지 보고 싶은데?’
그 순간 소호의 머릿속에서 천무련 건물들의 구조가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도 대장간이 있어.”
“뭐라고?”
“여기가 원래 흑시군들을 훈련시키던 곳이야. 대장간을 두고 사용하는 무기들도 직접 만들고 그랬더라고. 좋네. 기옥이 네가 한번 써 볼래?”
“흐음?”
주기옥의 도도한 눈매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재밌…….”
“크흠! 공자님.”
배진화는 다급하게 주기옥을 말렸고, 주기옥은 불만스럽게 배진화를 쏘아보았다.
“그것도 좋겠습니다만, 우선 여기에 온 목적을 장 공자에게 설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한동안 신세 좀 지겠다는 그거?”
“그렇게 가볍게 말씀하실 게 아니라, 상황도 말씀하시고 정식으로…….”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굴어.”
주기옥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나 여기 좀 있다가 간다?”
주기옥은 예의를 갖추지도, 설명을 하지도 않았다.
마치 맡겨둔 물건 찾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했다.
“고, 공자님.”
배진화가 오히려 당황했지만 주기옥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뭐, 그래라.”
소호는 곧바로 대답했다.
사실 최근에야 드문드문 봤지만, 주기옥과 형제처럼 지낸 게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서로 예를 차리지 않는 게 더 편했다.
“그렇게 말해야지.”
주기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건방지게 웃었다.
“얼마든지 있다가 가. 근데 언제까지 있을 건데?”
“몰라. 때가 되면 촌장님 동생이 날 데리러 온다던데?”
“아버지 동생?”
“그 사람 있잖아. 부 씨.”
“운화 삼촌이?”
소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운화 삼촌이 너 데리러 오셨던 거야?”
“데리러 온 건 아니고, 아저씨한테 말했데. 소호 형 곁에 가 있으면 때가 되면 연락할 거라고 했다던데?”
주기옥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소호 입장에선 좀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배진화를 바라보자, 그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분명히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습니다. 장 공자님께 도움을 청하고 잠시 그곳에 몸을 의탁하라고 하더군요.”
배진화는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 이상은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무슨 일이지? 운화 삼촌은 아무런 말씀이 없었는데?’
소호는 부운화의 뜻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알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굳이 알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운화는 소호를 아끼는 삼촌이다.
의도야 어찌됐든 천무련에 나쁜 일을 벌이기야 했겠는가.
게다가 고향의 어린 동생을 받아 주는 데 큰 이유가 필요하진 않았다.
“알았어. 이유야 어찌 됐든 편안히 있다가 가. 아저씨도 편안히 지내세요. 주해에게 필요한 걸 제공해 드리라고 말해 둘게요.”
“감사합니다, 공자님.”
배진화는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기옥이는 대장간을 보여 줄까?”
“지금 당장 가자!”
소호는 열정이 넘치는 주기옥을 대장간에 데려다준 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섭주해에게로 돌아갔다.
***
“운화 삼촌께서 방벽을 세워 주시는 것 같네요.”
주기옥이 왔다는 사실에는 무덤덤하게 반응하던 섭주해였지만, 부운화가 그 일을 주도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반응이 달라졌다.
부채를 손바닥에 툭툭 두드리면서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결론을 낸 것이 ‘방벽’을 세워 주었다는 소리였다.
“방벽?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긴 하네요. 여러 가지 일이 이렇게 한꺼번에 벌어지고 있어요.”
“여러 가지 일?”
소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기옥이가 온 것 말고도 또 무슨 일이 있었어?”
“있었죠.”
섭주해는 부드럽게 웃었다.
창백한 안색은 여전하지만, 두 눈에는 희망과 열정이 가득했다.
“우선 소호 형이 비학문을 아주 잘 박살 냈고요.”
“그거야 뭐,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었으니까.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
“잘하셨어요. 나머지는 천무련의 군사인 제가 처리해야죠.”
섭주해는 접을 수 있는 대나무 부채로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쿡 찔렀다.
“형이 나서 준 덕분에 관도 사람들이 천무련에 마음을 열었어요. 그 덕분에 여러 가지 일 처리가 많이 쉬워졌어요.”
“관도 사람들이 착하더라. 날 굉장히 반겨 줬어.”
“비학문의 학정에서 구해 준 영웅이니까요. 그 덕분에 천무련에 관한 일에는 무조건 협력할 분위기예요. 우린 앞으로 이런 활동을 많이 해야 합니다.”
“좋지. 어디서 활약하는 게 좋을지 알려 줘.”
“몇 군데 준비는 해 뒀어요.”
소호는 즐거운 마음으로 씩 웃었다.
섭주해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이건 대외적으로는 비밀입니다만. 비학문에서 관리하던 ‘불법적인 돈벌이’들은 미미가 운영하는 대산파가 들어가서 넘겨받을 거예요.”
“흐음.”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 돈벌이가 나쁜 일이야?”
“아뇨. 도박 쪽이죠, 뭐. 좋은 건 아니지만 악랄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렇구나. 그럼 됐어.”
“비학문주가 사업에 재능이 있는지 규모는 꽤 키워 뒀더라구요. 수입이 늘 것 같아요.”
“그래? 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다행이네.”
“자, 여기서 문제가 벌어집니다.”
섭주해는 지도에서 그들이 있는 천무련을 한 번 가리킨 뒤,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남쪽의 남궁세가를 가리켰다.
“천무련은 ‘연맹’이에요. 필연적으로 소속된 문파와 세력이 필요하죠. 우리가 바라는 것도 천무련이 정파의 대표 연맹이 되는 거구요. 다행히 지금의 무림맹은 유명무실해 보일 정도로 몸을 낮추고 있는 데다, 힘을 거의 다 잃어서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응. 그렇지. 무림맹……. 아! 그러고 보니 패원강 소협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
“네. 무림맹의 공동 전인이자 후계자라……. 만나 보는 게 기대되네요.”
섭주해는 기대된다는 말과는 달리 경계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리 경계하진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원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던가.
소호는 섭주해가 직접 패원강을 만나면 어련히 알아서 잘 판단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
“어쨌거나, 천무련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차근차근 힘을 기르고, 영향력을 넓혀야 해요.”
“우리의 깃발을 내걸고 싸우라는 거지?”
“맞아요. 역시 형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끼어들 만한 싸움이 있어?”
“원래는 그런 기회가 흔히 오지 않는데, 최근에 나설 만한 일이 몇 가지 생겼어요.”
“그래? 어떤 일인데?”
“첫 번째는 남궁세가.”
소호는 조금 놀랐다.
“남궁세가? 남궁세가만큼 큰 세력에 우리가 도울 일이 뭐가 있어? 휴 삼촌은 상처도 다 나으셨잖아?”
“완치했죠. 지금은 건강하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아직 왕진이 경계를 하고 있어서 함부로 싸움을 일으킬 수 없다는 점이에요.”
“그래? 으음, 남궁세가도 황실 눈치를 보는구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죠. 특히 남궁세가는 유서 깊은 명문 무가이기도 해서, 관부에 들어간 무관들도 꽤나 많아요.”
섭주해가 부채를 손바닥에 두드리는 소리가 툭툭 이어졌다.
“우리 천무련이 안휘에 있는 이상, 남궁세가와는 반드시 협력해야 해요. 여기에 도움을 주는 것은 필수라고 생각되네요.”
“휴 삼촌도 그렇고,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강하잖아? 무슨 일인데?”
“강하죠. 그런데 아직 소문에 불과하기는 한데, 혈교(血敎)가 재림했다고 하네요. 심상치 않은 사교가 백성들 사이에 퍼져서 강서와 절강 쪽에서는 난리래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남궁세가의 힘으로도 막아 내기 벅찰 수가 있어요.”
“혈교? 혈교라…….”
“남궁세가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해서 사교 집단을 덮쳤는데 인명 피해가 났다나 봐요. 그에 관해서 형의 재가를 얻을 부분이 있는데.”
“뭔데?”
“형을 따르기로 한 흑시군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섭주해는 평온한 말투로 진지하게 물었다.
소호는 잠시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도철과 격전을 치러서 쓰러뜨리고 집혼기의 힘에 취해 있을 때, 소호는 도철이 훈련시키던 흑시군들을 위압해서 힘으로 거뒀다.
그 인력들이 천무련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주해가 갑자기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
소호는 그 질문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큰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 사람들 여전히 여기서 지내고 있지? 실력은 어때? 예전에 흑시군과 싸워 봤을 때 느낀 건데. 산공독을 쓰는 기술이랑 철 투망 던지는 게 꽤나 까다로웠어.”
“형이 까다롭다고 할 정도면 상당하네요. 훈련도 원래 하던 대로 하고 있어요. 실력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럼…….”
소호는 잠시 머뭇거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섭주해의 눈빛은 진지했다.
‘주해는 황실의 병사들을 내가 거둬서 쓸 것인지를 묻는 거잖아. 만약 쓴다면 왕진과의 관계가 위험해지지 않을지 걱정하는 거야.’
다만 섭주해가 아직 모르는 게 있다면, 소호가 장기린에게 직접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들었다는 점이다.
소호는 마음을 정했다.
“그럼 써야지.”
소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소호 형.”
“응.”
“뒤탈이 생길 수도 있어요.”
소호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뒤탈이 뭐든. 내가 쓸 수 있게 된 힘은 뭐든지 쓸 거야. 왕진이 문제라면 걱정 안 해도 돼.”
“……왕진은 죽은 게 확실해요?”
“응. 아버지께 직접 들었어. 죽였다고 하시더라. 한 번 하산했을 뿐인데, 너무 쉽게 끝내 버리셨어.”
소호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나 열심히 해도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아버지는 너무 쉽게 끝내 버렸어.”
“으음……. 그렇군요. 아버님은 강하시니까요. 그렇다면 믿어야죠.”
“그러니까 나는 이제 다른 일에 몰두하기로 했어. 천무련을 무림맹으로 만들겠다던 우리의 계획은 그대로야.”
“예. 그래야죠.”
“흑시군……. 흑시군이라. 아! 이름 정도는 바꿔 볼까?”
“이름이요?”
“흑시군에서 벗어나서 천무련의 무력이 되었으니……. 백시군? 백시군 어때?”
“좋네요. 그렇게 하죠.”
“함부로 쓰지는 말자. 나중에……. 우리 계획대로 되면, 그때 필요해질 거잖아.”
“그래요. 그때를 위해 계속 키우도록 할게요.”
소호는 고개를 붕붕 저은 뒤, 밝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서? 혈교를 치는 거야? 걔네랑 싸우면 돼?”
“네, 그게 첫 번째 사건이고. 두 번째는, 으음, 아버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일이지만 왕진과 그 휘하의 인물들이 사실 최근에…….”
섭주해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갈 때, 누군가가 그들이 있는 군사실 근처로 급하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련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남성 조장의 목소리였다.
소호는 잠시 당황하다가 대답했다.
“손님이요? 혹시 이름을 밝혔어요?”
“예, 죽립을 쓴 여인인데, 본인의 이름을 백설지라고 밝혔습니다.”
“……!”
소호는 놀랐고, 섭주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