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54화 (483/686)

15권 3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3)

“설지 선배?”

소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사람이다.

패원강과 술잔을 나누면서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긴 했었는데, 어떻게 딱 맞춰서 찾아오게 된 것일까.

“소호 형.”

“으응?”

“오랜만에 보는 학관 사람인데, 다 같이 집무실에서 만나도록 하죠. 괜찮죠?”

“어, 응. 그래. 그러자.”

“형은 그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이남성 조장?”

“예. 군사.”

섭주해는 소호의 양해를 구한 뒤, 문을 열고 이남성 조장을 불렀다.

“이 조장께서 집무실로 안내해 주겠어요? 련주님은 그곳에서 손님을 맞이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남성이 곧바로 손님을 맞이하러 떠나자 섭주해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소호를 이끌었다.

“자, 소호 형, 집무실로 가시죠.”

“어, 응. 근데 주해야, 왜 그러는 거야?”

“무슨 말이에요, 형?”

“그……. 뭔가 경계하는 듯한데.”

“아뇨, 그냥 예의를 갖추는 거예요, 형.”

섭주해가 딱 잘라 대답하니 소호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까 뭔가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 두 번째 사건은?”

“손님을 먼저 만나 보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소호는 섭주해의 내면에 칼날 같은 단호함이 서려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칼날이 향하는 곳은 누가 봐도 지금 도착한 ‘손님’이다.

‘왜 그러는 거지?’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섭주해는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저기 널려 있던 서류들을 치우고 방 안을 정돈하더니 하인을 불러 찻물을 끓여 오라고 지시했다.

딱 그때쯤, 방문 밖에서 약간의 언쟁이 오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 물정 모르던 애송이가 많이 컸다는 게 왜 욕이야? 내 입으로 내가 말도 못해?”

“천무련에 온 손님이 련주께 무례한 언사를 하는 것은 옳지 않소.”

“충신 납셨네, 충신 납셨어. 난 칭찬한 거라니까. 뭘 그리 난리를 쳐?”

“…….”

“어쭈, 노려보면? 왜? 천무련은 손님이 마음에 안 들면 잡아다가 베고 그러나 보지?”

소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목소리와 말투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심사가 뒤틀려서 만사를 삐딱하게 보는 저 말투.

무산학관 시절에 오 년 동안이나 함께했는데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조용히 해. 우린 손님으로 왔잖아.”

“뭐? 아니, 시비를 건 건 이 사람이야.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내가 보기엔 네가 시끄러워.”

“어이가 없네……! 너는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왜?”

“……!”

성정이 비틀린 사내가 어안이 벙벙해서 굳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소호는 소리 내어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하핫, 여전하시네요.”

갑자기 문이 열린 탓일까.

죽립을 쓴 세 사람이 깜짝 놀라 소호를 바라본다.

“련주님.”

이남성 조장이 당황하면서 소호에게 포권을 취했다.

“고생하셨어요, 이 조장. 여기부터는 제가 안내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이남성 조장은 죽립을 쓴 세 사람 중에 키가 작은 인물을 강하게 한 번 쏘아본 뒤 떠나갔다.

“허?”

울컥해서 뛰쳐나가려는 죽립인을, 가장 앞에 있던 여인이 말렸다.

소호는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설지 선배.”

소호는 그녀가 죽립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늘씬한 체형에 하얀 피부. 오랫동안 보아서 익숙한 모습이다.

코끝을 스치는 옅은 백합 향도 여전했다.

“소호. 오랜만이야.”

백설지는 늘 그랬듯 억양이 강한 말투로 인사했다.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곽도엽 방장님을 데리고 함께 오다니.”

“어쩌다 보니 데리고 다니게 됐어.”

백설지의 대답은 늘 그랬듯 직설적이면서도 특이했다.

옆에서 가만히 있던 곽도엽이 참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데리고 다니다니? 내가 개냐? 데리고 다녀 주게? 목숨을 구해 줬더니 고마운 줄을 몰라.”

“난 다 알아. 살기 위해 나랑 같이 있으려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데리고 다니는 게 맞지.”

“끄응.”

“떠날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곽도엽은 세게 나가지 못하고 기가 죽어 버렸다.

무산학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소호가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으니, 곽도엽은 괜히 동작을 크게 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커험!”

그는 안 그래도 답답했다는 듯이 죽립을 대번에 벗어 던졌다.

“애송이가 출세했다?”

“출세요? 하핫, 그렇네요. 출세했죠?”

“이렇게 큰 건물도 차지하고, 저렇게 충성심 가득한 수하도 있고.”

“운이 좋았죠. 그런데 좋은 사람들만 걸러내는 건 쉽지가 않네요.”

“호오―, 그렇지. 사람을 이끌어 보지 않은 자는 그 어려움을 모르지. 백호방의 문제아가 많이 컸군.”

“문제아라뇨. 학관 교관님들이 얼마나 저를 좋아했는데요.”

“속물적인 자들이라 그렇다. 미래에 대한 가치를 무공으로밖에 못 보는 놈들이야.”

혀를 차는 곽도엽은 여전히 염세적이면서도 지적으로 뛰어난 사내다.

예전에는 백호방의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친근감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소호는 흥미로워하는 곽도엽은 제쳐 두고 나머지 마지막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저분은…….?”

무심코 옆을 쳐다본 소호는 죽립을 쓴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음?”

움찔.

그 순간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폐부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다.

‘이게…… 뭐지?’

단전의 내공이 본능적으로 움직임을 보였다.

전신에 휘몰아치는 진기.

비록 칠점법으로 내공의 일부가 점혈되어 있지만, 남아 있는 힘이 소호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강해 보인다. 무공의 경지가 짐작되지 않아. 이 정도면……. 도철 이상인데. 내 착각인가?’

소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체형도 많이 본 것처럼 익숙해. 그리고 이 느낌…… 잠깐, 설마……?’

소호는 마치 호위무사처럼 백설지의 등 뒤를 지키고 있는 사내의 체형이 낯설지 않았다.

소호는 무심코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촘촘한 죽립 너머, 푸른색 안광이 일렁거린다.

얼굴까진 보이지 않았다.

대략적인 얼굴형과 강렬한 눈빛만이 보일 뿐이다.

키는 보통.

팔다리는 긴 편이고, 소매 너머로 나와 있는 양손의 피부가 백설지처럼 하얗고 매끈했다.

‘유준이라니. 아냐, 설마? 손이 달라. 눈빛도 다르고. 그런데 체형이 너무 똑같은데……. 착각인가?’

그가 아는 유준은 맹인이었는데, 혹시 눈을 다시 뜨기라도 한 것일까?

소호의 두 눈에서 황금빛 휘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역근경 진기를 눈으로 움직여, 상대방의 내공이 어떻게 흐르는지 관조했다.

스윽―.

죽립을 쓴 사내가 허리에 찬 검병으로 손을 가져간다.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백설지는 당황했고, 곽도엽도 깜짝 놀라서 반보 뒤로 물러섰다.

소호는 개의치 않았다.

먼저 역근경 진기를 끌어 올렸을 때부터 그가 거부감을 표할 것은 예상했다.

죽립을 쓴 사내의 하단전과 중단전 사이가 특이했다.

두 개의 커다란 내단(內丹)이 마치 서로 싸우듯 내공을 주고받으며 견제하고 있었다.

“소호야. 잠깐…….”

소호가 내공을 끌어 올리자 싸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설지가 말리려 들었다.

호사가들이 ‘천무삼보’라고 이름 붙인 소호의 통찰력은 순식간에 상대방의 내공을 꿰뚫어 보았다.

“……빙백신기?”

두 개의 내단 중에 하나는 잘 안 보이지만, 다른 한 개의 내력은 분명히 백설지의 것과 똑같은 극한의 한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호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매끈하고 하얀 손등으로 향한다.

그리고 다시 백설지를 바라봤다.

똑같은 느낌.

극한의 빙백신기를 온몸에 머금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똑같다.

똑같은 푸른색의 안광.

그리고 매끈하고 새하얀 손.

‘유준과는 달라. 내공이 전혀 다르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한 거지?’

소호는 직접 물을 수밖에 없었다.

“소협은 누구십니까?”

백설지가 나서서 대답했다.

“내 오라버니야.”

“……설지 선배의 오라버니라고요?”

“내가 오랫동안 찾던 사람이야. 사실 무산학관에 들어간 것도 오라버니를 찾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최근에……. 드디어 만나게 됐어.”

소호의 굳은 안색은 풀리지를 않았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황은 이해했다.

하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점은 또 있었다.

“집혼기도?”

“…….”

“저 분이 집혼기도 원래 갖고 있었어요?”

“……응.”

백설지는 머뭇거렸으나 숨김없이 대답했다.

“혹시 사흉인…….”

“소호 형.”

더 캐묻고 싶었으나, 뒤에서 묵묵히 상황을 관조하던 섭주해가 소호를 말렸다.

“손님이 오셨으니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응, 그렇지. 우선 안으로 들어가요, 우리.”

소호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세 사람을 안으로 이끌었다.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급격히 어색해져 있었다.

자리에 앉고, 하인이 끓여 온 찻물을 각자의 찻잔에 따라 주는 와중에도 그들은 단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백설지의 오라버니는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마치 정말로 호위무사인 것처럼 백설지의 등 뒤에 시립해 있을 뿐이었다.

“설지 선배,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섭주해였다.

“응, 주해도 오랜만이네.”

“선배는 그대로네요. 졸업하고 이 년 만인가요? 학관에서 볼 때와 변함이 없으시군요.”

“그런가? 난 내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죽립을 벗은 백설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얗게 빛나는 피부는 상아와 같고, 파랗게 빛나는 두 눈은 보석처럼 맑았다.

한족(漢族) 미의 기준과는 다르지만, 분명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소호 형이 설지 선배를 많이 걱정했었어요. 그렇죠? 형?”

“……응, 그랬지.”

“도올을 토벌할 때 만났었다면서요?”

“응.”

백설지는 그때를 떠올리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도올 토벌전.

이태산과 태성천이 함께했던 그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던가. 무산학관 출신 기대주들의 싸움이라고 하기엔 결과가 너무 처참했고, 또 한편으론 왕진에게 버리는 패 취급을 당했기에 안 좋은 기억뿐이었다.

“그때 소호 형이 도올을 쓰러뜨렸죠. 힘겨운 싸움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소호 형도 만신창이가 되어서 겨우 이겼다고 하더라고요.”

“힘든 싸움이었어.”

소호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백설지의 오라버니라는 자가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백설지만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다시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설지 선배.”

“으응, 그렇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계속 황실의 일을 했어요?”

“비슷……해, 그런데 최근에 사정이 많이 달라졌어. 지금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요?”

백설지는 솔직하게 말했다.

옆에서 곽도엽이나 죽립을 쓴 사내가 놀란 듯 백설지를 바라보는 모습만 봐도, 그녀가 지금 소호에게 얼마나 마음을 터놓고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힘들었나 보네. 원래 무뚝뚝하고 거칠어 보여도 여린 사람이었지.’

백설지는 원래 그랬다.

모든 이들에게 냉랭하게 대해서 쉽게 친해지기는 어렵지만, 방 안으로 돌아와서는 조용히 백합을 기르는 소녀였다.

조서인의 무공을 손볼 때도 그러했다.

처음 소호가 조서인을 돕겠다고 했을 때 왜 서인이냐고 내키지 않는 투로 물었지만, 한번 돕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본인의 무공 지식을 아끼지 않고 제공해 도와주던 여인이다.

‘오라버니라는 사람은 의심스럽지만, 백설지 선배는 어떤 일을 겪든…… 도와줘야지.’

가까이서 마주해 보니 백설지는 안 그래도 갸름하던 얼굴이 볼이 들어간 것처럼 보일 만큼 말라 있었다.

수척한 느낌.

처마처럼 길게 내려온 속눈썹 아래 우수 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황실로 돌아가기 싫으면 돌아가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되는 걸까?”

“왕진은 죽었으니까요.”

소호의 말에 놀란 백설지와 곽도엽,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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