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4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4)
“왕진이 죽었다고……?”
백설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홱 돌려 곽도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왕진은 살아 있다며?”
“당연히 살아 있……!”
곽도엽도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소호가 평온한 안색인 것을 보더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얼마나 돈을 썼는데, 그걸 잘못 알았을 리가 없어. 정보를 파는 자들이 그런 걸 거짓말할 리가 없어.”
“널 믿어도 되는 거야?”
“내가 이걸 거짓말해서 얻는 게 뭐야? 명심해. 네가 쫓기면 나도 쫓기는 거야. 우린 한 배를 타고 있다.”
곽도엽도 확신에 차 있으니, 백설지는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소호와 곽도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호야, 정말로 왕진은 죽었어?”
“네.”
장기린이 직접 한 말이다.
소호는 조금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확실해요.”
“……그렇구나. 이상하네.”
“정보를 파는 곳에서는 왕진이 살아 있다고 했어요?”
백설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왕진이 살아 있다고?’
소호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런 걸 거짓말할 분이 아냐. 직접 목숨을 거뒀으니 죽였다고 하셨겠지.’
소호는 옆에 앉아 있는 섭주해를 힐끗 바라봤다.
섭주해는 모두의 시선이 소호를 향하는 사이, 백설지와 곽도엽, 그리고 죽립을 쓴 사내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지금의 대화 주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보였다.
“저는 확신해요. 믿을 만한 분에게 들은 정보니까요. 왕진은 죽었어요.”
“으음…….”
“죽었다가 되살아났다면 모를까. 지금 왕진이 살아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네요.”
소호는 왕진은 분명 죽었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어째선지 백설지와 곽도엽의 표정이 그 순간 오묘해졌다.
그들은 당황하면서 백설지의 오라버니라는 자를 힐끔거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백설지와 곽도엽은 서로를 힐끗 보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둘 다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네.”
“……네?”
“왕진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지금의 우리는 솔직히 황실과 엮여서 좋은 꼴은 못 볼 사람들이야. 그래서 부탁을 하러 왔어. 우리가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여기서 잠시 지내도 괜찮을까?”
백설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호는 그녀의 두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청금석처럼 영롱한 눈동자가 불안을 담아 떨리고 있었다.
‘이건…… 거절할 수 없겠네.’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설지 선배.”
“응?”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어디로 갈 거예요?”
“……안 돼?”
“아뇨, 만약에요. 천무련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설지 선배가 어디로 갈지 알고 싶어서요.”
백설지는 당황했지만 순순히 목적을 말해 주었다.
“난 신수가 되러 가야 해.”
“야, 백설지. 잠깐…….”
“괜찮아. 소호에게는 숨길 필요 없어. 어차피 얘기하려고 했어.”
백설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소호 너도 집혼기를 받았지? 이건 오라버니가 말해 준건데, 집혼기에 혼백을 모아 힘을 얻고, 그다음에 제대로 ‘신수’가 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대.”
“문제……요?”
“정확히 어떤 문제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오라버니는 마음이 급한 것 같아. 한시라도 빨리 나를 데리고 거기로 가고 싶어 해. 신수가 되지 않으면 큰일 나는 모양이야.”
백설지의 뒤에 서 있는 그녀의 오라버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랬군요. 신수……. 신수라…….”
“응, 그러니까.”
백설지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가 큰 결심을 한 듯 말했다.
“소호도 함께 가자.”
“아…….”
“같이 신수가 되는 게 좋을 것 같아. 넌 흑저 도올을 쓰러뜨렸잖아. 그 정도 힘이면 집혼기에 혼백은 다 모은 거지?”
이건 정말로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소호는 솔직히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아졌다.
백설지의 순수한 호의다.
자신과 똑같은 상황인 소호를 걱정해 주는데 어떻게 기분이 나쁠 수가 있겠는가.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설지 선배.”
“……응?”
“그런데 난 아마 소용이 없을 거예요.”
“왜?”
“집혼기가 부서졌거든요.”
“……!”
백설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곽도엽도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요. 그래서 사실 지금 제가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아요. 집혼기가 없으니까 탈력감이 심하네요.”
“아…….”
“혼백을 다 모은 뒤에는 신수가 되는 과정이 필요하구나……. 응,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요.”
소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도철을 쓰러뜨렸을 때의 일이다. 사흉을 더 베면 안 된다는 말을 하면서, 나중에 분명 자기의 도움이 필요할 거란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올랐다.
“으음, 어찌 됐든, 나한테는 이젠 의미가 없는 일일 것 같네요.”
“……응, 그랬구나.”
“그래도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천무련에는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머무르다 가세요. 다른 사람은 다 거절해도, 설지 선배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죠.”
소호는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천진난만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우리가 내공 수련하면서 태극권 추수를 겨룬 게 몇 번인데요? 그렇죠?”
“그러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정말 빨라요.”
백설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곽도엽도 침묵했다.
그 후에 학관 시절의 이야기를 잠시 하긴 했지만, 원래의 밝은 분위기로는 돌아오지 못했다.
소호는 자리를 마무리한 뒤 섭주해와 함께 그들이 지낼 객실에 데려다주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섭주해와 소호는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알고 있었지?”
“네.”
섭주해는 소호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채고 대답했다.
“왕진은 왜 살아 있다고 알려진 거야?”
“가능성은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섭주해는 들고 있던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첫 번째는 대역.”
“대역? 가짜라고?”
“아버님이 가짜를 죽였을 리는 없겠죠?”
“당연하지. 아버지가 그걸 구분하지 못했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지금이 가짜일 수 있겠네요. 왕진 정도 되는 인물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원래 암살 위협이 있을 때, 살수들을 속이기 위해서 주인의 역할을 대신하는 신하는 역사상 늘 있어 왔으니까요.”
“아니, 그건 그런데. 저기는 황실이잖아. 왕진이 평범한 환관도 아니고, 사례감 태감 역할을 가짜가 해내는 게 가능해?”
“불가능하죠. 그런데, 왕진이 워낙 평소에도 얼굴에 분칠을 하고 특이하게 하고 다니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으음…….”
“두 번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경우.”
소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니.
강시라도 된단 말인가?
“대역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는 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방금 그들의 반응을 보고 좀 고민하게 되네요.”
“그들? 설지 선배 일행?”
“네.”
섭주해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백설지와 곽도엽. 그 두 사람의 반응이 이상했어요. 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정말로 본 적이 있는 것처럼요.”
“그랬나?”
“아까 형도 봤죠? 형이 죽었다 살아나지 않는 한 왕진이 살아서 걸어다닐 리가 없다는 말을 하니까 두 사람의 태도가 변했잖아요?”
“아…… 그때 말이구나.”
“네. 그 이후에 두 사람이 말을 바꿨어요. 뭔가를 납득한 것처럼요. 어쩌면 소호 형과 그 사람의 말이 둘 다 맞을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긴 했어.”
“의심스럽네요. 분명히 숨기는 게 있어요. 하지만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은 아니고. 왕진에 대해서는……. 그들도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죠. 아무튼 저는 좀 더 알아보도록 할게요. 하오문 쪽에도 연락을 해 봐야겠어요.”
섭주해는 매우 심각한 표정이었다.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서 초조함이 엿보였다.
“왕진의 생사는 중요한 문제니까 제대로 알아봐야 해. ……근데 난 아버지를 믿어. 아버지가 죽였다고 하셨으니 죽었을 거야. 그건 확실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만사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그보다 소호 형,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섭주해는 질문을 던지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소호가 초조해질 정도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설지 선배의 오라버니라는 사람. 그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들었어요?”
“……솔직히 이상했어.”
“어떤 점이요?”
“난 처음에 유준인 줄 알았어. 한 자루 검 같은 그 느낌, 거기에 체형……. 익숙한데, 잘못 볼 리는 없는데.”
소호는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다.
눈앞에 뿌연 안개가 끼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렴풋이 보이긴 하는데, 명확하게 안 보일 때의 그 답답한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없이 불쾌했다.
“그런데 내면은 전혀 달라. 맹인이 아닌 데다, 진기의 흐름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궁기…… 그래, 그 사람을 닮았어.”
“……무산제전 때 왕진을 호위했던 그 남자 말이죠?”
“응. 그것도 이상한 일이야. 그때 그는 대석 삼촌 같은 거구였잖아. 체형은 다른데……. 느껴지는 분위기나 빙백신기는 굉장히 비슷해. 본인인 것처럼.”
“그렇군요. 유준의 체형에 궁기의 내력이라.”
소호는 혼란스러운데 섭주해는 반대로 개운해진 분위기였다.
다만 사안이 심각한 듯 진지한 표정은 변하질 않았다.
“뭔가 알겠어?”
“글쎄요, 저도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으음…….”
소호는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오늘 너무 다사다난하네.”
“후훗, 그렇네요.”
“손님이 너무 많은 하루야. 기옥이가 와서 안내를 했더니, 설지 선배까지 찾아오고.”
“소호 형.”
“응?”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섭주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게요.”
“이야기? 어떤 거?”
“천무련이 앞으로 싸워야 할 상대요. 첫 번째가 남쪽에서 발호한 혈교였고, 두 번째를 이야기하다가 말았잖아요.”
“아! 그래. 맞아. 그랬었어. 그러고 보니 그때 왕진과 휘하에 어쩌고…… 그러지 않았어?”
“맞아요.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설지 선배가 찾아왔어요. 운명처럼.”
“……응?”
“요즘 강호에 소문이 하나 돌고 있어요.”
섭주해의 이어지는 말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왕진은 습격을 받았다. 예전처럼 무림 강호를 좌지우지할 힘이 없다. 그런데, 사흉 중의 일부가…… 습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런 이야기예요.”
“……!”
소호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깊게 생각에 잠겼다.
말이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다고 소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습격자는 아버지잖아? 아버지가 황실로 쳐들어갔는데……. 그 앞을 막았던 자들이 살아남았다고? 정말로? 아버지를 적대해서 싸우고도 살아남았다고?”
“모르죠.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요. 정말로 죽었다가 살아났는지. 그러고 보니 이것도 그렇네요. 대역이나 가짜일지. 아니면 정말로 죽었다가 살아났을지.”
“으음…….”
“강호가 들끓고 있어요. 이제 무림의 힘을 보여 줘야 할 때다. 그동안 무림인들을 억압하고 괴롭혀 온 사흉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 대체 그놈들은 어디에 있냐?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이런 내용이죠. 상상이 되죠?”
“……응.”
“천무련 군사로서 말할게요. 이건 기회입니다. 무림 강호에 우리가 왕진과 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리고, 무림을 결집시킬 만한 유일무이한 깃발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선…….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예요.”
“사흉의 잔당을 잡아서 쓰러뜨리는 게 우리여야 한다는 말이지?”
“네. 정확해요.”
섭주해는 진지한, 조금은 차가울 정도로 냉철한 눈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니 물을게요. 소호 형, 만약에 설지 선배의 오라버니가 사흉의 잔당이면? 잡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