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5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5)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사흉과의 악연.
천무련의 앞날.
그리고 백설지와의 관계.
“아…….”
소호는 탄식하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론은 생각보다 쉽게 났다.
천무련의 앞날과 백설지를 저울질하는 문제가 아니라,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못 잡아.”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톡. 톡.
섭주해가 부채로 손바닥을 치는 속도가 느려졌다.
“소호 형, 이유를 알려 주세요.”
“힘이 부족해.”
소호는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집혼기가 부서지면서 내공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어. 칠점법으로 그나마 남은 내공도 상당 부분 금제 되어 있고.”
“으음, 그래요? 지금은 약해져 있었군요. 그런데 금제는 왜 하게 된 거예요?”
“흑신의 할아버지가 한동안 중단전 부근의 내공은 가능한 쓰지 말라고 하셨어.”
“해혈을 하는 법은 알고 있어요?”
“알지. 아버지가 점혈하면서 직접 알려 주시더라고.”
“그래요?”
소호는 자신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풀어 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냐.”
“후훗, 형의 인내심을 시험하시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으음, 아마 그렇겠지?”
섭주해는 차분하게 소호를 바라보았다.
소호의 속내를 살피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소호 형, 그래서 지금 몸 상태로는 어느 정도 수준이에요? 비학문은 혼자서 처리했잖아요.”
“그 정도는 뭐……. 내공만으로는 일류 고수 정도야. 힘 싸움이 아니라 무공의 초식으로 싸우면 좀 더 잘 할 수 있고.”
그 말을 들은 섭주해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호는 항복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다 변명인 거 알죠? 형.”
“……변명이지.”
섭주해는 부채를 탁!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힘이 있으면요?”
소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집혼기가 안 부서졌다면? 그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다면 잡을 겁니까?”
섭주해는 소호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았다.
소호는 침묵했다.
섭주해의 말은 결국 결정을 내리라는 소리다.
천무련의 앞날이냐.
백설지와의 관계냐.
“으음…….”
소호가 한참 동안 뜸을 들이며 고민하는 동안 섭주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잡아야지.”
마음을 정하기까지가 어려웠을 뿐.
한번 마음을 정한 소호는 단호했다.
“만약 설지 선배의 오라버니가 정말로 사흉이라면. 왕진을 따르면서 죄를 지은 것 또한 사실이잖아. 그럼 죗값을 치르는 게 맞아.”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래. 그러니까 잡아야지. 그리고 ‘대의’를 위해서잖아.”
소호는 집무실의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천을 바라봤다.
―天武.
소호의 별호이자, 소호가 주축이 되어 모은 연맹의 이름이 용사비등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다행입니다.”
섭주해는 마음이 놓였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형이 사람을 쉽게 버리지 못해 망설였고, 그럼에도 큰 결정을 내릴 줄 알아서 다행이에요.”
“……이런 걸로 칭찬이라면 반갑지는 않네.”
“소호 형.”
“응.”
“어차피 힘이 부족하니 안 잡을 거죠?”
“그건 그렇지.”
소호는 양손으로 뒷머리를 받친 채 씩 웃었다.
“아까 말했듯이, 못 이겨. 지금 내 힘으로는.”
“잡는 방법에는 꼭 일대일 대결만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왜? 큰 희생을 내면서 싸우려고?”
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약에 ‘그 사람’의 무공이 아까 내가 느낀 수준이 맞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궁기나 유준이라면…….”
소호는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패원강 소협과 내가 합격을 해도 지금은 못 이겨.”
“……점혈을 풀어도요?”
“풀면 좀 더 잘 싸울 수는 있겠지. 그런데 이길 수 있다고 장담은 못하겠는데?”
소호는 평소에 약한 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섭주해는 진지한 얼굴로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 정도면 엄청나게 강하네요. 아버님과 비교하면요?”
“아버지와 비교할 수는 없지.”
섭주해는 그제야 안심한 듯 보였다.
“무림 십대고수와 무림오존 사이라는 말이군요?”
“그쯤이 아닐까 싶어. 물론 내가 아무리 감이 좋아도, 무공이라는 건 겨뤄 봐야 아는 거긴 하지만.”
“그렇군요…….”
“만약에 강호에서 누가 덤벼들든 그 사람은 쉽게 쓰러뜨릴 수 없을 거야. 난 집혼기의 힘을 잘 알아. 설령 팔파일방이라고 해도, 전대 고수까지 다 나와서 자기 문파의 사활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못 이길걸?”
소호는 고민하는 섭주해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 그리고 천무련을 위해서 싸우는 것도 좋아. 그런데 지금 당장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생사를 거는 건…… 솔직히 말하자면 내키지가 않네. 그 정도로 목숨 걸고 쫓아가서 죽여야 하나 싶기도 하고. 도철이나 도올처럼 평범한 백성들을 괴롭힌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죠. 궁기든 유준이든. 어찌 보면 황실을 위해서만 싸웠으니까요.”
“천무련의 이름을 날릴 기회는 아마 또 올 거야. 지금은 싸우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해.”
소호는 섭주해와 눈을 마주하며 단호히 말했다.
“형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할게요.”
섭주해는 앞으로의 일에 여지를 남겨 두면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혼자 남겨진 소호는 문득 백설지를 떠올렸다.
‘설지 선배도 고생이 많네. 황실의 무관이 되나 싶었는데, 사흉 출신 오라버니와 함께 도망이라…….’
안타까운 연민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
“뭐야, 왔어?”
해가 어스름하게 떠오를 무렵, 늘 하던 역근경 수련을 준비하던 소호는 까맣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쫓아서 대장간에 도착했다.
은은하게 타오르는 화로 앞에는 한 청년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아 있었다.
덩치는 평범했다.
머리를 대충 뒤로 묶고, 얼굴에는 검댕을 묻힌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시골 대장간의 도제 같은 모습이다.
“너 기옥이 맞냐?”
소호는 그 모습을 보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뭔 소리야?”
“감히 자기를 내려다본다고 성질부리면서 정강이를 걷어차던 게 엊그제 같은데, 혼자서 장작 가져다가 불까지 피웠어? 이렇게 기특해도 되는 거야?”
“뭐래. 지금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주기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 때문인지, 아니면 옛 생각에 쑥스러운 탓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그때야 내가 어려서 그랬지.”
주기옥은 옆에 쌓아 둔 장작 하나를 화로에 던져 넣었다.
새로운 장작이 들어가자, 기존의 숯에서 불똥이 퍽― 하고 튀어 올랐다.
“난 내가 뭘 잘못 배웠는지도 몰랐어. 주변에서 귀하다, 귀하다 말만 하니까 내가 귀한 줄 알았지. 그깟 피가 뭐라고. 오히려 그 피 때문에 집에서도 쫓겨나고 친형의 부하가 죽이려 들고 생난리도 아니었는데.”
소호는 타닥거리며 튀어 오르는 불똥을 보면서 주기옥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만 바라봤다.
“너도 집안 사정이 복잡했나 보네.”
“복잡한 정도가 아니지. 근데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잘됐다 싶어.”
주기옥은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난 복잡한 건 싫어. 어차피 큰 자리에 앉혀 놔도 잘하지도 못할걸? 그러니까 지금처럼 망치나 두드리면서 사는 게 좋아.”
“가족은? 만나고 싶지 않아?”
“뭐 가끔 생각은 나는데, 어차피 내가 눈엣가시로 보일 형을 만나서 뭐해. 솔직히 난 그 사람이 무서워. 보고 싶지도 않아.”
“그렇구나. 그럼 은자촌에서 살게 된 게 잘된 일이네.”
“그래.”
주기옥은 얼굴에 묻은 검댕을 툭툭 털어냈다.
“그러니까, 그 뭐냐. 부 씨 아저씨가 와도 거절하려고.”
“운화 삼촌?”
“솔직히 나를 왜 불러냈는지 상상은 되거든. 원래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하든가, 아니면 비슷한 자리에서 내 역할을 하라고 하든가. 근데 난 어느 쪽이든 하기가 싫네.”
“새로운 일이 재밌을 수도 있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딴 곳에 있으면 제 명에 못 살걸? 얼마나 독한 인간들이 많은데? 난 거기에 있으면 맨날 시름시름 앓다가 피 토하고 죽을지도 몰라.”
소호는 주기옥의 등을 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 그럼. 거절하고 안 가면 되겠네.”
“그냥 여기 눌러앉을까?”
“은자촌에 안 돌아가고?”
“젊을 때 나왔으니 세상 경험 좀 해야지.”
“그래?”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럼 이 대장간 너 가질래?”
“여기?”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지내. 안 그래도 우리 천무련에 대장장이가 필요했어.”
“그래? 힘든 일 시키고 그러는 건 아니지?”
“가끔 검이나 장비 같은 거나 고쳐 주면 되지. 싸울 때 필요한 무구 같은 거 있으면 심심할 때 만들어 줘. 광 할아버지가 인정했으면 실력도 있을 거 아냐.”
“실력은 꽤 있지. 여기까지 오면서 마을마다 대장간을 가 봤는데, 내가 웬만한 사람들보다는 낫더라고.”
“그래야지. 광 할아버지 제자인데.”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주기옥은 도도하게 웃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봉급은 얼마 줄 거야?”
“왜? 돈 필요해?”
“안 필요한 사람이 어딨어?”
주기옥은 생각보다 금전 감각이 있는 듯 보였다.
“일 시킬 거면 돈 주는 게 맞는 거야. 광 영감도 도제들 주는 돈만큼은 주겠다면서 꼬박꼬박 용돈을 줬어.”
“하핫! 하긴 그렇네.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 얼마나 필요한데?”
“가격은 잘 모르는데, 맛있는 거 먹고 살 만한 돈이랑…….”
주기옥은 영민하게 눈을 굴리더니 은근슬쩍 위험한 소리를 했다.
“화약만 좀 구해 주면 되겠네.”
“……뭐?”
소호는 어이가 없었다.
“야, 아무리 요즘 난세라지만 큰일 나.”
“아, 왜? 좀 구해 줘 봐. 광 영감 창고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
“그거야 그분이니까 그런 거고.”
“만들어 보고 싶은 화기가 있단 말이야.”
“시끄러워. 나중에 구하게 되면 줄게.”
소호는 주기옥과 웃으면서 툭탁거리다가 일어났다.
“편하게 지내.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화약.”
“그건 빼고.”
소호는 웃었다.
고향의 어린 시절 친구만큼 반가운 사람이 또 있을까.
복잡했던 기분을 깨끗이 정리한 뒤, 소호는 대장간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갔다.
사실 소호가 대장간에 도착했을 때쯤부터 바깥을 서성거리던 사람이었다.
“설지 선배.”
소호가 반갑게 웃자, 백설지도 어색하게 웃었다.
***
천무련의 무인 두 사람은 밤중에 닫아 두었던 대문을 열기 위해 다가갔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걸음걸이도 불편한 듯했다.
“련주님과 대련했더니 죽겠다…….”
“그게 그렇게 힘드나?”
“말도 마, 역근경을 써서 안 쓰던 근육을 단련한다는데, 련주님이 툭툭 건드린 부분만 자지러지게 아프다니까?”
“거 신기하네.”
“다 나으면 근력이 좋아진다더군. 끄응, 근데 다음 날은 지옥이다, 지옥.”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커다란 대문을 열어젖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누, 누구시오?”
그들은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에 손을 얹었다.
대문 앞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서 있었던 것일까.
그가 쓰고 있던 면포와 어깨에 밤이슬이 잔뜩 맺혀 있었다.
“천무공자를 만나러 왔소.”
사내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묘한 위압감마저 담겨 있어서, 그들은 상대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련주님께 누가 찾아왔다고 전해 드릴까요?”
“육모담.”
거구의 사내.
백검회 최강의 검객.
육모담은 성큼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말했다.
“화산파의 마지막 후예가 찾아왔다고 전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