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6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6)
소호는 백설지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조용한 집무실.
자그마한 화로 위에 올려 두었던 주전자는 다행히 따뜻한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쪼르륵―, 찻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은은한 차향이 방 안으로 퍼져 나갔다.
“설지 선배, 방은 편안했어요? 불편한 점은 없었고요?”
“응.”
백설지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곽 선배는요? 오라버니도 마음에 드신대요?”
“곽도엽은 편하든 아니든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어. 그런데 오라버니는 조금 불편한 것 같아.”
“어……, 그래요? 잠자리가 마음에 안 드신대요?”
“그건 아니고.”
백설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음……. 오라버니는 내가 위험하다고 한시라도 빨리 신수비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
“아…….”
“그리고…….”
백설지는 잠시 머뭇거렸다.
“오라버니가 너를 보면 호승심이 생기나 봐.”
“예?”
“싸워 보고 싶고, 덤벼들고 싶어서 참기가 힘들대. 그래서 자꾸 어서 가자고 말해.”
소호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호승심이라니.
백설지의 오라버니가 자신을 보면서 호승심을 느낄 이유가 있었던가?
‘궁기라고 생각했는데, 유준인 건가? 나한테 호승심이 생긴다면 유준인데……, 이상하네. 가지고 있던 내력은 분명히 빙백신기였는데.’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프고 답답했다.
“오라버니께서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시나 봐요.”
소호는 마음을 정했다.
이제는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지 선배, 이젠 물어봐야겠어요.”
“어떤 걸?”
“설지 선배의 오라버니는 유준이에요? 아니면 궁기예요?”
백설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표정한 표정이라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체형은 유준과 똑같은데, 내공은 궁기와 똑같은 빙백신기를 지니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해가 되질 않아요.”
“……오라버니는 유준도 아니고 궁기도 아냐.”
백설지는 단호했다.
“오라버니의 이름은 백설천. 북해빙궁의 하나뿐인 후계자야. 유준도 궁기도 아냐.”
“그래……요?”
“응.”
평소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설지였지만 이번은 달랐다. 흔들림 없는 눈빛과 단호한 얼굴이었다.
‘이건 더 파고들 수는 없겠는데.’
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의심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백설지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소호는 침음성을 흘리다가 포기하고 찻잔을 들었다.
“알겠어요. 그럼 설지 선배 오라버니가 ‘유준’도 ‘궁기’도 아니길 진심으로 바랄게요.”
“아냐.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일 뿐이야.”
소호와 백설지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백설지는 한참을 뜸을 들였다.
소호는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찻물을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난 네 아이를 낳고 싶었어.”
“큽.”
소호는 오랜만에 머릿속이 완전히 하얗게 변해 버리는 경험을 했다.
“뭐, 뭘 낳아요?”
“입에서 차가 흘러. 옷이 젖었어.”
소호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놀랐는데, 백설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소호는 황급히 옷에 묻은 찻물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아, 음. 괜찮아요. 마르겠죠. 물은 마르는 거니까요. 예.”
어찌나 당황했는지 소호는 자꾸만 허둥댔다.
“북해빙궁은 위험한 상황이야. 오라버니는 최근까지 실종 상태였던 탓에 후계자도 없어. 그래서 나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를 낳고 싶어. 그리고 궁주가 될 거야.”
“아…….”
“넌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나. 네 아이를 낳고 싶어.”
소호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싸늘한 감정과 약간의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재능.
재능이었다.
소호가 좋다거나, 연정을 느껴서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창 건장한 청년인 탓일까. 온갖 생각이 다 들면서 줏대 없이 심장은 쿵쾅거렸다.
“그……, 고마운 말이지만, 인륜지대사인 혼인을 그런 이유로 결정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왜?”
“사람의 됨됨이나 성품 같은 걸 따져 봐야 하고……, 애정도 중요하잖아요? 무공의 재능만으로 아……, 음, 아이를……, 낳고 싶다니.”
소호는 말해 놓고도 자신이 왜 이런 걸 가르치고 있나 혼란을 느꼈다.
그런데 백설지는 순진한 건지 당돌한 건지 모를 얼굴로, 푸른색 눈동자를 담담하게 빛냈다.
“됨됨이나 성품도 마음에 들어.”
“네?”
“애정도 있어. 무산학관에서 오랫동안 보아 왔어.”
소호가 깜짝 놀라서 백설지를 살펴보니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 진짜인가?’
마음 같아서는 이런 일에 동요하지 않는 멋진 남자이고 싶은데 소호는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설상가상.
백설지는 더더욱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게 마음에 걸린다면 꼭 혼인을 할 필요는 없어.”
“……네?”
“아이만 낳으면 돼.”
소호는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찻잔이 기울어졌어.”
“…….”
“바지가 젖고 있어.”
“앗차.”
소호는 찻잔을 황급히 탁자 위에 올려다 놓고 옷에 묻은 찻물을 털어냈다.
“놀랐어?”
“네. 당연히 놀라죠.”
“넌 천무련이 있어. 나에겐 북해빙궁이 있고. 어차피 혼인은 힘들어.”
소호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래서, 아이만 낳자고요?”
“응.”
소호는 당황스러웠다.
순간적으로 앞날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이 스치듯 상상되었다.
백설지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휘연에게 등짝을 맞는 장면까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 음…….”
자꾸만 백설지의 혈색 좋은 입술이나 새하얀 목덜미가 눈에 보인다.
소호는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그런 일은…….”
“고민돼?”
백설지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 그래도 고민해 줘.”
“어……, 음, 네. 그럴게요.”
“우리가 언제 떠날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신수비처에 다녀오면,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자.”
조용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백설지는 무표정한 얼굴을 계속해서 유지했다.
소호는 조금 분했다.
자신만 당황하는 건가?
사실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데.
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또래의 여인에 불과한데 어째서 그녀는 저렇게나 여유로운가.
‘음?’
그런데 소호는 발견했다.
살짝 시선을 돌리고 있는 백설지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빛도 차분하고 얼굴색도 평온한데 신기한 일이다.
“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생각해 볼게요.”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다시 찻잔에 찻물을 따르기 위해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소호 형!”
그때 멀리서부터 그를 부르며 한 사람이 다급히 달려왔다.
“주해?”
평소에는 급한 일이 있어도 여유를 잃지 않던 동생이 지금은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섭주해는 상기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소호의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백설지를 보며 설핏 안색이 굳어졌다.
“설지 선배도 계셨네요.”
“자리를 비켜 줄게.”
두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백설지를 도리어 섭주해가 말렸다.
“아닙니다. 설지 선배, 잠시만요. 저랑 같이 나가시죠.”
“왜?”
“드릴 말씀도 있어요.”
섭주해는 백설지를 잠시 기다리게 한 뒤 소호에게 말했다.
“소호 형,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새벽부터 대문 앞에서 기다리신 손님이라 잠시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일각 동안 쉬시라고 말씀드렸어요. 그 후에 이곳 집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누군데?”
“중요한 손님이에요. 화산파 사람입니다. 정중하게 맞아 주세요.”
“응?”
“설지 선배. 가시죠. 소호 형, 손님이 올 때 같이 올게요.”
섭주해는 소호가 되물을 기회도 주지 않고, 급하다는 듯이 곧바로 백설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섭주해는 평소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소호에게 의견을 묻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섭주해가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소호는 집무실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백설지가 사용한 찻잔을 치우고, 새로운 찻물을 주전자에 담아 화로 위에 올려놓았다.
집무실의 풍경이 깨끗하게 바뀌었을 때, 섭주해는 기골이 장대한 중년의 사내와 함께 들어왔다.
“그대가 천무공자인가.”
수십 년간 써서 낡은 농기구처럼 거칠고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낡고 헤진 복색을 한 채 수염을 잔뜩 기른 그는 야인(野人)처럼 보일 지경이다.
허리에 찬 아무런 특색도 없는 평범한 검에 유난히 눈길이 갔다.
마치 한 자루 검을 앞에 둔 듯한 느낌.
검집에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극도로 잘 갈린 검을 품 안에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사내였다.
그는 입고 있던 흑갈색 피풍의를 벗어 왼쪽 팔에 둘둘 말았다.
그러자 평생 동안 몸을 단련해 온 자 특유의 단단하고 강인한 육체가 골격을 드러냈다.
‘이 사람, 엄청나게 강하다.’
소호는 경각심을 가진 채 상대방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단전에서 고요하게 흘러나온 역근경 진기가 소호의 두 눈에 금빛 법광을 일으켰다.
‘뒤꿈치를 들고 바닥을 미끄러지는 듯한 발놀림. 오른손 중지 이하는 뭉개진 것처럼 굵고, 검지는 길쭉한 가운데 굳은살이 단단하게 잡혔다. 검사야. 그것도 오른쪽 어깨가 극도로 발달한 검객.’
육체에 대한 평가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소호의 시선은 육모담의 단전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었다.
거대한 힘.
강하게 뭉쳐진 수많은 혼백들의 집약체.
‘집혼기? 집혼기라니?’
경악은 잠시.
소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새롭게 등장한 인물에게 인사를 건넸다.
“강호 동도들께서 그렇게 불러 주십니다. 장소호입니다.”
초면인 사람에게 보여 주는 ‘명가의 자제’로서의 모습이었다.
상대방은 잠시 소호의 예법을 묵묵히 지켜본 뒤 정중한 포권으로 소호의 예를 받아 주었다.
“반갑소. 오매검마 육모담이라고 하오.”
“역시.”
소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이긴 하지만, 화산파의 무인이면서 집혼기를 가진 이 정도 수준의 검사.
백검회의 일검 말고는 떠올릴 수 없었던 탓이다.
오매검마 육모담.
한때는 오매검협이라 불리며 정파의 희망이었던 자다.
최근에 녹림의 후촌에 살던 아이들까지 베어 버리는 냉혈한 행보를 취한 후, 개방에서는 육모담을 오매검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본인이 스스로를 검마라고 부를 줄은 몰랐는데.’
소호는 내심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요.”
처음엔 소호가 육모담을 살폈다면, 이번엔 육모담이 소호를 살폈다.
서늘한 시선, 단단하고 강인한 무형기가 소호의 내면을 살피듯 불꽃처럼 넘실거렸다.
‘마치 거대한 나무 같다. 튼튼한 무형기야.’
소호가 그가 지닌 무형기의 형태에 감탄하는 사이, 육모담의 눈가에는 노골적인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엔 믿을 수 없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재차 이어진 탐색 끝에 그는 자신의 속내를 숨김없이 토로했다.
“나는 천무공자의 업적에 탄복했던 사람이오. 앞으로 정도의 무림을 이끌어갈 사람은 천무공자밖에 없겠구나 생각하기도 했소. 그런데…….”
육모담의 서늘한 시선이 소호의 가슴 한가운데에 닿았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그대의 무공은 내가 그동안 들은 것과 다른 것 같소.”
“그런가요? 세상이 저를 과대평가하고 있기는 합니다.”
소호는 동요하지 않고 선선히 웃었다.
“세상이 그대를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이제 막 약관에 오른 청년이 대단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저 최선을 다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뿐이죠.”
은자촌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소호는 느낀 점이 있었다. 강함은 중요하다. 하지만 모두에게 인정받고 강할 필요는 없다.
소호가 강해 보이지 않는다?
상관없다.
약하면 약한 대로 그렇게 보여 주면 그뿐이다.
소호에게 있어서 육모담에게 인정받는 사실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호오.”
그런데 그 모습이 의외였는지 육모담의 눈빛이 또 한 번 일변했다.
“도올과 도철을 쓰러뜨렸다고 들었소. 그 나이에 그만한 성과. 전대고수들의 내공을 전수 받은 이례적인 후기지수이거나, 왕진에게 집혼기를 받은 신수라고 생각했소.”
육모담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 어느 쪽도 아니군. 대체 어떻게 도올과 도철을 쓰러뜨린 것이오?”
“그때는 힘이 있었어요.”
“부상을 입었나?”
“네. 하지만 저는 집혼기 없이도 강해질 겁니다.”
소호의 확신에 찬 눈빛이 심금을 울렸을까.
육모담은 헛웃음을 흘렸다.
“집혼기가 없이도 강해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육모담의 손이 허리춤의 검집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