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58화 (487/686)

15권 7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7)

소호는 자연스레 시선을 육모담의 손끝에 고정했다.

검에 손을 가져가는 것.

전투의 의지다.

육모담은 검집을 툭툭 두드리면서 씁쓸하게 말했다.

“화산파는 늘 말했소. 화산이야말로 정도 제일의 검문이다. 뿌리 깊은 화산의 매화나무는 언젠가 큰 꽃을 피워 내리라. 흥.”

육모담은 소리 내어 비웃었다.

“하지만 그 결과 어찌 되었나? 화산파는 지금 도문(道門)만 남았을 뿐, 무문(武門)은 몰살당했소.”

“그건…….”

그건 왕진이 ‘황실’의 이름값을 내걸고 흑시군을 이용해 벌인 일이 아닌가.

소호는 단순히 힘으로 비교할 일이 아니라고 반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육모담은 이미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대고 화산파도 강했다는 말을 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천명이란 그런 것이지. 순리대로 흐르지만 사람을 배려하지 않아. 시간이 부족하오. 사람에게 주어진 세월은 너무 짧으니 나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소.”

스릉―.

육모담은 검을 뽑았다.

소호는 그제야 허름한 검집 안에 들어 있던 검이, 화산파의 상징인 매화검임을 깨달았다.

새하얀 검신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매화 문양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오매검마라 불리는 육모담.

그는 검마라 불릴 지언정 매화검은 버리지 않은 것이다.

“어째서?”

소호는 육모담에게서 적의를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검을 빼 드는 순간 기이한 압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길게 내뱉는 호흡, 살짝 몸을 비트는 발동작.

소호의 중단을 향해 겨누는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하다.

‘오매검마가 이 정도로 강했었나?’

소호는 기수식 하나만 보고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강호에서도 백검회의 일검이 강하다는 소문은 심심찮게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두고 보니 그 정도 명성은 오히려 실력에 못 미치는 것 같았다.

검귀(劍鬼)가 되어 오로지 검술에만 몰두해서 살아온 자가 눈앞에 있다.

소호에게 있어서는 아버지가 떠오를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검끝.

날카로운 첨단이 소호의 숨통을 짓누르는 듯했다.

“무인에게 무슨 대화가 필요한가. 검화(劍話)를 나눠 봅시다.”

“육 대협.”

“난 대협이라 불릴 자격은 없소.”

육모담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억지스러울 정도로 싸움을 고집했다.

“고집을 좀 부려보겠소. 검마라고 불리니 그 이름값을 해야지.”

“저를 쓰러뜨리러 오신 겁니까?”

“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소.”

“으음…….”

“천무공자, 몸은 안 좋아도 무형기는 쓸 수 있을 테지?”

“……쓸 수 있습니다.”

“그럼 겨뤄 봅시다.”

그 순간, 소호는 육모담의 어깨 위로 견고한 무형기가 쑥쑥 자라나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육모담의 무형기는 특이했다.

그는 산속 깊숙이 뿌리내린 거목처럼 단단하고 중심이 잡힌 무형기를 선보였다.

육모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제자리에 서서 검으로 중단을 겨루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무형기가 넘실넘실 흔들리며 사방에서 소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무형기로 나를 상처 없이 제압하려 하는구나. 싸움은 피할 수 없어.’

이유는 모른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육모담의 속내가 무엇인지 상상도 되질 않는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우웅―.

소호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역근경의 무한한 법력이 소호의 전신을 빠른 속도로 휘돌았다.

가슴이 칠점법으로 막힌 탓에 임맥은 쓸 수 없으나, 독맥은 사용할 수 있었다.

기해(氣海)에서 회음으로.

그리고 회음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가 백회혈로 올라가는 독맥을 통해 빠른 속도로 진기가 회전했다.

소호의 전신에서 은은한 법광이 흘러나왔다.

육모담은 감탄하며 말했다.

“전륜법광!”

은은한 광채를 휘감은 소호가 눈을 번뜩이는 순간, 소호의 몸에서 특유의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무형기가 뿜어져 나왔다.

소호는 자세를 낮추었다.

하체를 살짝 굽히고, 정면을 바라보며 단전 앞에서 작은 원을 그리듯 양손을 모았다.

‘어차피 초식은 아니다. 기공의 싸움. 그렇다면……!’

소호는 정신을 집중했다.

무형기란 것은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무인들만의 힘.

그 크기와 힘은 잘 단련된 상단전의 크기와 비례한다.

상단전이 크면 무형기도 그만큼 강해질 수 있는가?

맞는 말이지만, 하단전의 진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무형기는 제대로 쓸 수 없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내공이 제한된 소호에게는 매우 불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핑계 없는 싸움은 없지. 내가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려면……, 무형기를 모아서…… 진짜 초식처럼!’

소호는 아지랑이같이 퍼지던 무형기를 과감하게 한 군데로 집중시켰다.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무형기란 것은 본래는 무인들끼리 겨룰 때 서로 간의 간극을 조절하고 기세 싸움을 하는 데만 쓰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허?”

육모담은 소호의 시도에 흥미를 느낀 듯했다.

절정고수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무형의 기 싸움.

그 와중에 소호는 눈앞에 삼 척 길이의 칼 같은 집약된 무형기를 만들어 냈다.

“갑니다!”

연륜도 실력도 상대방이 위다.

소호는 당당하게 선공을 가했다.

후웅―.

바람이 생겨났다.

두 사람 모두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기운들이 집무실 곳곳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서류들이 흩날리고, 화로 위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주전자가 바닥을 나뒹굴며 찻물을 쏟아냈다.

육모담의 무형기는 마치 커다란 매화나무가 가지를 뻗는 듯한 모습이었다.

앙상한 가지 하나가 소호를 향해 뻗어 오는가 싶더니, 그 끝에서 여러 개의 매화꽃이 봉오리처럼 맺혀서 피어나고, 그곳에서 폭발하듯 터진 꽃잎들이 하늘하늘 눈앞에서 흩날린다.

그런 가지가 수십 개.

꽃잎들은 시야를 가득 덮을 정도였다.

우우웅―!

소호의 하나뿐인 칼날은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가지를 꺾고, 꽃대를 치고, 흩날리는 꽃잎들을 폭풍처럼 베어 냈다.

고오오오―.

두 사람 사이에 치솟은 날카로운 예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고 있었다.

‘좌상단에서 손목을 비틀고, 우하단으로.’

소호의 눈이 빠른 속도로 좌우를 왕복했다.

‘우상단에서 세 번 찌르기……, 아니다, 허초다! 좌하단!’

소호와 육모담의 공방은 갈수록 그 속도가 빨라졌다.

촤아악―.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종이들이 예리하게 잘려서 옆으로 날아갔다.

‘점점 익숙해진다. 눈에 보여. 이다음엔 첫 번째 공격을 두 번 반복하겠지?’

소호의 반응은 눈부시게 빨랐다.

“허어.”

육모담의 입에서는 탄성이 연이어 흘러나왔다.

일각이란 시간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수백, 수천에 달하는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보고 있었을 뿐이니 재미있는 일이다.

철컹.

육모담은 어느 순간, 무형기를 모두 거둬들인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새하얀 매화검은 보잘것없는 검집 안으로 다시 몸을 숨겼다.

거대한 고목 같던 무형기가 사라지고, 소호의 눈앞에는 건장한 중년 사내 한 명만이 묵묵히 서 있었다.

싸움은 끝났다.

소호는 잔뜩 긴장해서 굳어 있던 몸을 늘어뜨렸다.

“후우…….”

소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대단하오.”

육모담은 탄식하듯 찬사를 보냈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눈빛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간신히 막기만 했는데, 칭찬받기는 민망하네요.”

소호는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면서 힘없이 웃었다.

지친다.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불과 일각 만에 끝난 싸움인데, 마치 하루 온종일 칼질을 한 것처럼 전신이 아파 왔다.

“그대는 매화검을 모두 익혔소.”

“아……!”

소호는 깜짝 놀랐다.

“그게 역시 매화검이었어요……?”

“화산무공의 핵심. 이십사 수 중의 낙매분분(落梅紛紛)까지요.”

중간부터 왠지 가르치는 듯한 느낌이 든 건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매화검은 화려하네요. 검술을 쓰는데 손목의 움직임이 많이 필요하겠어요. 보통 검끝이 화려하면 무공 자체가 가볍기 마련인데 매화검은 가지가 튼튼해서 잘 꺾이지 않았어요.”

“올바른 평가로군.”

처음 봤을 땐 노골적으로 실망한 데다 어딘가 평가하는 듯했던 육모담의 눈빛이, 이제는 소호에 대한 경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정도 수준의 내공만으로 내 무형기를 막아 내다니. 단지 당장의 힘이 부족할 뿐 그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충분히 알 수 있었소.”

육모담은 갑자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는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천무련에 찾아온 손님 같은 태도를 취했다.

뻔뻔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소호는 괜스레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어……, 차를 드리고 싶은데, 싸우면서 다 쏟아져서 없어요.”

“상관없소.”

소호는 찻물을 사방에 흘려보낸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주전자를 주워서 수습했다.

“묻고 싶은 게 있소.”

“저한테요?”

“그렇소. 천무공자는 백검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서운 곳.”

소호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대답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곳. 백검회의 회주라는 높은 사람조차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판돈으로 거는 곳.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녹림의 자식들이라도 후촌의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이는 냉정하고 잔인한 곳.”

소호의 평가는 신랄했다.

싸움 끝에 매화검법을 보여 주고 가르쳤다?

그것만으로 만족하기엔 소호는 백검회에 대해 갖고 있는 실망감이 매우 컸다.

비학문을 처리하기 얼마 전에도 그는 백검회의 손속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작은 마을 안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신들.

그리고 그 시신들 사이에서 새카맣게 탄 채 굳어 있는 고사리 같은 손들.

“이기적이에요. 아마 집혼기 때문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이까지 베는 모습에 구역질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소문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육모담 또한 그들과 그리 손속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육모담은 눈빛이 깊어지긴 했으나, 소호에게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았다.

육모담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노려본다.

소호는 긴장했지만, 겉으로 그걸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게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시시비비는 가리지 않겠소. 헌데 내 면전에서 그런 걸 말하다니. 배포가 크구려.”

“천무련에 오자마자 련주에게 힘자랑을 한 분에게 그런 말을 듣자니. 쑥스럽네요.”

“입심이 깨나 세군.”

육모담은 헛웃음을 지었다.

“좋소. 아주 좋아.”

“예?”

“힘에 굴복해서 아부만 늘어놓는 멍청이들보다는 백배 낫소. 믿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육 대협을 욕한 게 믿어 줄 이유라고요?”

“그렇소.”

육모담은 여전히 독선적이지만, 한편으론 처절해 보였다.

“그대는 내가 보기에 강하오. 천무공자, 그리고 황실뿐만 아니라 백검회도 경계를 할 만큼 현명하군.”

“……!”

“그러니 이제, 내가 신수비처에서의 은혜를 갚을 때가 온 것 같소.”

“비처에서의 은혜요……?”

소호가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못하는 사이 육모담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 백검회는 신수비처를 모두 장악하고 있소. 천무공자, 그대가 예전에 신수비처를 뒤집어 놓은 덕분이오. 그 덕분에 우리는 아무런 희생도 없이 신수를 만드는 방법도 알게 되었고, 지금처럼 함정도 팔 수 있게 되었소.”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굳어졌다.

“함정……이요?”

“왕진이 키우던 사흉의 잔당들은 이제 신수비처로 올 것이오. 나는, 아니, 우리 백검회는 그를 이번에 죽일 것이오. 그리고.”

육모담의 손끝이 소호를 가리켰다.

“그 명성은 그대가 가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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