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8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8)
소호는 멍하니 굳어졌다.
육모담이 해 준 말을 머릿속에 모두 받아들이기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잠깐만요.”
소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사흉의 잔당이 신수비처로 온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신수가 되려면 반드시 비처로 돌아와야 한다더군. 신수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자가 그렇게 말했소.”
“……혹시 그 사람 간씨입니까?”
“역시 알고 있었군. 그렇소.”
소호는 신수비처에 갔을 때 마주쳤던 자를 떠올렸다.
‘이름이 간평이었나?’
광기에 침식돼서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인물이다.
지금도 황실에서 일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알기로 신수가 되기 위해 힘을 모으던 자들이 꽤 있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비처로 돌아와야 한다는 소리고, 황실에 변고가 생겼으니 그들은 빠른 시일 내에 신수비처로 돌아오게 될 것이오.”
“그걸 기다렸다가 잡겠다는 거군요?”
“그렇소.”
소호는 겉으로 동요하지 않는 척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백설지.
곽도엽.
백설지의 오라버니.
그 세 사람이 생각난다. 그들의 미래가 육모담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백설지의 오라버니는 오매검마를 이길 수 있을까?’
섣불리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박빙의 승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명성을 가지라는 이야기는……?”
“신수를 베더라도, 나는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오.”
육모담은 아무런 욕망도 없는 사람처럼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육 대협 말씀은, 그들을 제가 벤 걸로 하겠다는 말이죠? 사흉을 쓰러뜨린 명성을 제가 가지라고요?”
“그렇소.”
“세상에.”
소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오?”
“밤이 되면 해가 지듯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어째서 칭송을 들어야 합니까?”
“흐음!”
육모담은 침음성을 냈다.
“한 번만 입을 다물면 커다란 대의를 이룰 수 있는데 수단이 중요하오?”
“중요합니다.”
“천무련에 도움이 될 것이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모르죠.”
“흐흣.”
육모담은 나직하게 웃었다.
소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의 대화 어디에 웃을 구석이 있단 말인가.
“그런가. 그대에겐 수단이 중요한가?”
“네.”
“하지만 천무공자. 이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오.”
“어째서요?”
“그대도 하나의 단체를 이끄는 자로서 왕진의 개들을 없애는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텐데.”
소호는 조금 당황했다.
그는 육모담이 화산파의 복수만 생각하는 복수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대세’를 보는 충고를 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탓이다.
“내가 지금은 검마 소리를 듣지만, 한때는 화산파를 이끌 대제자로서 교육을 받던 사람이오. 백검회가 하려는 일. 흉명을 떨친 신수를 없애는 일이 강호 무림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소. 천무공자, 그대는 앞으로 정파 무림을 하나로 결집시킬 인재가 아니던가? 그걸 위해 천무련을 만든 게 아니었소?”
“그건…….”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그대의 명성을 떨쳐야 하지 않겠소? 신수를 처리하는 이런 중요한 일을 다른 단체에 넘기고도 웃어넘길 만큼 천무련이 여유로운 것이오?”
소호는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육모담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로 전날에 섭주해와 대화를 나눴던 내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긍할 수도 없는 일이다.
“대의가 그렇다고 한들, 남의 공적을 채 가는 게 옳은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육 대협은 백검회의 소속이 아닙니까. 이럴 때일수록 백검회의 명성을 높여야 하지 않나요?”
“…….”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그걸 원치 않는 겁니까?”
육모담의 속내를 모르는데 어찌 한배를 탈 수 있겠는가.
신수는 자신들이 죽이고 공적은 천무련에 주겠다?
순순히 믿기는 힘든 일이다.
막말로 함정을 파고 소호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의심스러울 수도 있겠군.”
그런데 육모담은 확실히 특이한 면이 있었다.
백검회의 사람이라면 백검회를 위해 말해야 하거늘.
그는 소호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싫은 내색을 보였다.
“그렇소. 나는 백검회가 이 이상 명성을 얻는 것을 원치 않소.”
“……!”
육모담은 품 안에서 두꺼운 서책 두 권을 꺼내 다탁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천지일기공과 신학검. 그리고 청운적하검이오.”
소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청성파의 무공이란 말입니까?”
“본래는 문파의 후계자만이 익힐 수 있는 절공이라더군.”
“그걸 왜 꺼내십니까?”
“주겠소.”
소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째서요?”
“백검회는 맹목적인 곳이오. 애초에 문파의 복수만을 위해 모인 곳이니 당연하겠지.”
육모담은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런 백검회가 망가지면? 나는 지금의 강호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그대뿐이라 생각하고 있소.”
“강호의 대의입니까?”
“대의라. 그런 거창한 건 아니오. 그저 백검회가 더 망가지지 않기를 바랄 뿐.”
“으음…….”
“매화검은 이미 익혔으니, 이 비급을 연구하면 이제 백검회의 무공은 모두 속속들이 알게 되겠군.”
육모담은 소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호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용히 시간이 흘러갔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맞닿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육 대협은……, 참 알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예전엔 알기 쉽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나 보오.”
무표정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육모담에게서 어째선지 쓸쓸함이 느껴졌다.
“육 대협은 이 일이 끝나면 떠날 셈이군요?”
“북쪽으로 갈 것이오. 별호처럼 마(魔)의 길을 걷는 자가 될 것이니 그 이상은 알려 줄 수 없겠군.”
“어째서 마의 길을 걷습니까?”
“그래야 하니까.”
육모담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바닥에 쏟아져 있던 찻물을 손가락으로 찍더니 자신의 입술 위에 적셨다.
“차 잘 마셨소. 나는 이만 떠나리다.”
벌떡 일어나는 육모담을 따라 소호도 몸을 일으켰다.
“육 대협, 그들이 신수비처로 오지 않는다면? 어찌할 겁니까?”
“그럴 리가 없소.”
육모담은 단언했으나, 그 후에 첨언을 붙였다.
“만에 하나 비처로 오지 않는다면……, 그래도 상관없소. 제때 신수가 되지 못하면 광자가 되어 죽을 테니.”
육모담은 소호를 향해 짧게 포권을 취했다.
소호도 마주 예를 표하자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천무공자는 내 제안을 잘 생각해 보시오. 아까 나를 안내한 그 책사는 공자와 생각이 달랐으면 좋겠군.”
떠나가는 육모담의 발걸음은 바람처럼 홀연했다.
‘주해의 모습만 보고도 그가 내 지낭인 줄을 알았구나. 생각보다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다.’
소호는 그가 천무련의 대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게 뭐야.”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온갖 생각과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소호는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애써 부여잡았다.
“잠깐, 잠깐…….”
소호는 문득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지 선배!’
소호는 천무련의 대문이 닫히자마자 곧바로 몸을 날렸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가 장성을 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소호가 천무련의 객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요한 건물.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소호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 안.
잘 개어 놓은 침구와 아련하게 남아 있는 은은한 백합 향만이 이곳에 누가 머물렀는지를 증명했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소호의 시선이 정처 없이 허공을 헤맸다.
“벌써 간 거야……?”
백설지와의 마지막 대화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음……. 오라버니는 내가 위험하다고 한시라도 빨리 신수비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
“설마, 진짜로 바로 간 거야?”
소호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싶어서 잠시 멍하니 서 있자니, 천무련의 정문 쪽에서 섭주해가 다가왔다.
“소호 형.”
“주해야.”
소호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설지 선배 어디 갔어? 아까 데리고 나갔잖아.”
“오매검마와 마주치기 전에 떠나라고 조언했어요.”
“뭐……?”
“설지 선배 일행이 오매검마와 마주치면 큰 싸움이 벌어질 테니까요. 그런 위험은 가능한 한 회피해야 하잖아요?”
“그……!”
소호는 울컥 화를 내려다가, 섭주해의 생각은 사실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점 또한 떠올렸다.
마주치면 어찌 되었겠는가?
복수귀나 다름없는 육모담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살검을 뽑을 것이고, 사흉 출신으로 추측되는 백설지의 오라버니 또한 전력을 다해 육모담과 싸울 게 뻔했다.
“하아…….”
폐부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깊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소호 형……?”
소호의 반응이 이상함을 눈치챈 섭주해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왜 그래요? 설지 선배는 제대로 인사를 못한 건 아쉽지만, 안 그래도 곧 떠날 생각이었다면서 제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빨리 볼일을 보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던데요?”
“그래……? 돌아오겠대?”
“네.”
“후우, 아냐. 주해 너는 잘했지.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소호는 당황하는 섭주해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육모담이 와서 소호와 무형기 싸움을 벌인 것이나, 매화검을 가르쳐 주고 청성의 무공 비급도 건네주고 간 것을 말해 주었다.
그가 백검회와 함께 신수비처를 장악했으며, 백설지와 같은 신수가 되려는 자들을 기다렸다가 죽일 계획이라는 점도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오매검마와 백검회가 설지 선배 일행을 죽이려고 신수비처에서 기다린다는 겁니까?”
“응.”
“그리고 그 업적을 형한테 넘기고 싶어 하고요?”
“……응.”
소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손바닥의 따스한 열기로 이마를 누르자, 지끈거리는 두통이 조금은 안정되는 듯했다.
“그래서 신수비처에 가지 말라고 설득하려 뛰어왔는데, 벌써 떠나고 없네? 지금 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정말로 막막한 심정이었다.
차라리 마음을 확실히 결정했다면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호는 백설지 일행을 어떻게 대할지 확실하게 노선을 정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고민되었다.
“설지 선배 일행은 떠난 지 얼마나 됐어?”
“마차를 타고 간 지 반 시진이 넘었죠.”
“그 정도면 안휘 밖으로 나가고 있겠네?”
“넘었죠. 뒤쫓는 건 지금은 불가능해요. 전해야 할 말이 있다면 하오문을 통하는 게 빠를 거예요.”
“그렇……네.”
섭주해는 접혀 있는 부채를 손바닥에 탁탁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결국 핵심은 똑같네요. 형, 어제 했던 대화를 이어서 하죠.”
“뭐라고?”
“소호 형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어제 형은 ‘어차피 힘도 부족하니까.’ 사흉 출신인 설지 선배의 오라버니를 잡지 않고 놓아준다고 했었어요.”
“그랬……지.”
“그런데 오늘은 힘이 있는 누군가가 그 사람을 잡아 주고, 거기에 형이 잡은 것처럼 소문도 내준다고 하네요.”
섭주해는 멍한 얼굴이 된 소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거절할 이유가 없어? 야.”
소호는 손을 내저었다.
“수단은 중요해. 그러다가 칭송이 아니라 원한을 얻으면? 그리고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어떻게 뻔뻔하게 세상에 알리겠어?”
“그런가요?”
“그런 거지.”
“소호 형.”
“응.”
“설지 선배를 버리기 싫어요?”
섭주해의 비수 같은 한마디가 소호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소호는 떠올렸다.
백설지가 했던 말들.
그 충격적인 내용.
“난 네 아이를 낳고 싶었어.”
“아아, 정말.”
소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