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60화 (489/686)

15권 9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9)

“싫지. 당연히 싫지.”

소호는 냉철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내 아이를 낳고 싶다고 한 사람이 위험해지는데 당연히 마음이 불편하지.”

“뭐라고요?”

섭주해가 크게 동요했다.

“형, 설지 선배랑 그런 사이였어요? 대체 언제부터?”

“뭐? 아니, 그런 사이였던 적 없어. 그런 거 아냐. 그냥 이번에 이야기하다 보니 설지 선배한테 그런 말을 들었어.”

소호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다 다시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상에, 저는 전혀 몰랐네요. 설지 선배가 형한테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그건 모르겠어. 내 재능이 북해에 필요하대. 혼인 안 해도 되니까 아이만 낳아도 된다더라.”

“그건 또, 특이한 말…….”

섭주해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얼버무렸다.

“북해의 풍습이 원래 그런가요?”

“모르지. 근데 설지 선배도 부끄러워한 걸 보니 쉽게 하는 말은 아닌가 봐.”

“그럼 연정이 있는 건 맞네요.”

소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머리로는 답을 아는데, 그걸 선택하기가 싫었다.

“하아, 이래서야……. 주해야. 난 훌륭한 두목이 될 수 있을까?”

“두목이라뇨. 누가 들으면 무슨 산적들인 줄 알겠네.”

“차라리 산적이었으면 결정이 쉬웠겠지? 천무련을 위해서는 왕진과 선을 긋고, 신수들도 냉정하게 처단해야 하는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렵냐?”

섭주해는 한탄하는 소호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결정은 늘 소호가 한다.

섭주해는 여러 가지 방법만 알려 줄 뿐, 스스로 고민한 뒤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늘 소호였다.

섭주해는 절대로 그 권한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후우.”

소호는 바닥을 쳐다보면서 계속해서 움직였다.

마치 닭장 속의 닭처럼 계속해서 뱅글뱅글 돌았다.

그렇게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간다고.”

소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오문을 통해서 설지 선배한테 정보를 전달할 거야. 신수비처는 위험하다는 정도면 되겠지. 우리는……, 가만히 기다린다.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기다리겠어.”

소호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려고 했는데, 그럼에도 한 번 굳어진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소호 형, 만약에 백검회의 계획이 성공하면요? 신수가 되려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천무공자가 한 일이라고 하면요?”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알릴 거야.”

“천무련에는 별로 좋지 않은 방법이네요.”

“거짓말을 해서 나중에 들통나는 것보다는 나아. 아무리 목적이 중요해도 잘못된 수단을 쓰면 안 돼.”

“그렇기는 하죠.”

소호는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럼 백검회가 실패하고, 설지 선배 일행이 천무련으로 돌아오면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받아 줘야지.”

“그렇군요.”

섭주해는 소호의 안색을 힐끔 살피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병약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로 미간을 좁히고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소호 형이 그렇게 정했다면 다른 말은 하지 않을게요.”

“……비겁해 보여?”

“천무련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결정했는데, 비겁하다고는 할 수 없죠. 다만 예전의 형을 생각하면, 솔직히 저는 형이 지켜 주러 가겠다고 할 줄 알았어요.”

“그……래?”

소호는 늘 섭주해의 솔직한 직언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수긍하기가 힘들었다.

“지키러 간다……? 그랬구나.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

“형은 설지 선배를 지키러 가고 싶지는 않아요?”

“안 그래.”

소호는 단호하게 답했다.

이건 애정이나 친분의 문제가 아니었다.

“백설지 선배는 약한 사람이 아니야.”

“그렇긴 하죠.”

“구애에 가까운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지 선배는 내가 지켜 줘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이미 충분히 강하고, 그 곁에는 위험한 오라버니도 있잖아?”

때론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때가 있다.

소호가 지금 그러했다.

섭주해에게 설명을 이어 갈수록 백설지를 믿겠다는 마음이 견고해졌다.

“그렇네요. 소호 형이 지켜 줄 필요는 없는 사람이죠. 백설지 선배는 강하니까요. 신수가 되려는 사람이니까 집혼기도 갖고 있겠죠? 무산학관에서도 내공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 강할까요?”

“그렇……지.”

소호는 섭주해의 반응이 급격히 바뀌어서 조금 당황했다.

“말해 놓고 보니 부끄럽네요. 어쩌면 그들이 지금의 우리 천무련보다 훨씬 무력이 강하겠어요. 누가 누굴 지켜 준다고 생각한 건지 원.”

“으응.”

“괜히 걱정했네요.”

섭주해가 평소보다 말이 많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일까?

문득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쳐다보니 섭주해는 의뭉스럽게 웃고 있었다.

지자(智者)의 미소였다.

책사의 눈빛을 한 섭주해가 조용히 웃고 있었다.

“너……!”

소호는 그제야 알아챘다.

섭주해는 소호의 결심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슬슬 분위기를 잡으면서 대화를 여기까지 몰아 온 것이다.

“너 진짜, 후우, 날 너무 잘 알고 있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형.”

“고마워. 그렇지만 마음은 이미 잡았어.”

섭주해의 마음은 고마운 일이다.

항상 형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동생이 있다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 보자.”

“예. 저는 어떻게 일이 진행되든 대응할 수 있도록 생각을 해 볼게요.”

소호는 부드럽게 웃는 섭주해를 보면서 힘을 얻었다.

그렇다.

자신은 이렇게 뛰어난 동생과 함께 큰일을 해 보려 하고 있다.

이런 작은 일에 일희일비해서야 되겠는가.

“다시 힘내 보자!”

소호는 쾌활하게 말하며 백설지에게 보낼 전서를 쓰기 위해 붓을 들었다.

***

청명경 일만 자(字)는 신묘했다.

얼핏 보기엔 노자의 도덕경과 흡사한 도가의 경전으로 보였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불교의 묘리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를 수양하는 도(道).

내면을 살피는 관(觀).

한 단계 나아가는 승(乘).

소호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책 속에 펼쳐진 일만 자의 글귀에 집중했다.

한 자, 한 자.

뜻을 음미하며 읽다 보니 소호의 머릿속은 맑아졌고, 내뱉는 호흡은 장중하게 길어졌다.

‘아버지께서 이걸 나한테 주신 이유가 다 있구나. 마음이 평온해져. 번뇌가 사라져 간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글자를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소호의 눈에는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가 분명한데.

뜻을 이해하기에 앞서서 글자의 한 획, 한 획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잠깐, 서체의 분위기가 다른 평범한 책들과 뭔가 달라. 글자마다 끝이 뾰족해 보이는 게……. 서체를 마무리하는 이 손놀림은……….’

소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연히 생겨난 의심은 책을 계속 읽다 보니 확신으로 변했다.

붓글씨의 마무리.

한 획, 한 획을 그을 때의 예리함.

‘검사. 이 글을 쓴 건 검사야!’

무공을 판별하는 눈이 너무나 뛰어나 천무공자라고까지 불리는 게 바로 소호다.

소호는 흥미를 느꼈고, 청명경을 읽는 것에 더욱더 탐독했다.

마치 책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집중했다.

허리를 굽힌 채 책 내용에 집중하던 그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 휘광이 흘러나왔다.

소호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청명경 일만 자의 진결을 읽어 나갈 뿐이었다.

“아……!”

그러던 어느 순간.

소호는 청명경을 쓴 누군가의 붓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글자를 한 획, 한 획 써 내려가는 세필은 매우 가늘었다.

새끼손톱보다도 가는 붓을 들고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글자를 써 내려가던 의문의 사내가 갑자기 붓이 아니라 검을 든다.

그리고 허공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격, 일격.

마치 청명경의 글자를 쓰듯, 간결하고 명확한 검 놀림이 허공에 커다란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큽!”

바로 그 때 가슴 속의 혈기가 울컥하고 끓어올랐다.

야생동물 한 마리가 가슴 속에서 날뛰는 듯했다.

이를 악물고 버텨 봤지만 내장은 점점 더 격렬하게 비틀렸다.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소호는 입만 벌린 채 꺽꺽거렸다.

청명경 일만 자가 벌 떼처럼 눈앞을 덮쳐 왔다.

흠잡을 것 없이 깨끗한 검술이 한순간 만천화우처럼 사방에 펼쳐졌다가, 소호를 향해 쑥 밀려 들어오는 듯했다.

“컥!”

소호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헛구역질을 했다.

“으으……!”

책을 서둘러 내려놓았다.

반쯤 쓰러지듯 옆으로 이동해서 탁자에 몸을 기대고 나니 그제야 자신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숨결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게 무슨……?”

호흡이 거칠다.

소호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아직도 욱신거리는 가슴 부근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책을 보다가 검으로 공격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주화입마……?”

말로만 들었던 주화입마에 빠져든 것 같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기혈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소호는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청명경 책자를 노려보았다.

어째서일까.

커다란 깨달음을 줄 것처럼 소호를 몰입시키던 책이, 어째서 소호를 공격한 것일까.

“아버지, 대체 뭘 주신 거예요?”

소호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아니지. 책이 문제라는 보장이 없어. 책이 문제일까? 아니면 내가 문제인가? ……심마가 따로 없네. 이게 무슨 일이야?’

우연인지 정말로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책을 탐독해서 증명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소호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당장 만사를 제쳐 두고 책에만 몰입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나중에, 나중에 꼭 다시 읽어 보자.”

마음을 좀 가라앉히려고 읽기 시작한 청명경이 의외의 충격을 주었다.

소호는 청명경에 숨겨진 비밀이 자신에게 큰 힘이 될 거라 믿으면서, 책자를 옷 속에 밀어 넣었다.

“소호 형, 손님이 왔습니다.”

소호는 섭주해와 함께 집무실로 찾아온 한 사람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장한 체격에 선이 굵고 사내다운 외모.

좌측 허리엔 태극경을, 우측 허리엔 목탁을 차고 있으니 잘못 보려야 잘못 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선뜻 먼저 포권을 취했다.

“소형제.”

소호는 마주 허리를 굽히며 천무련을 찾아온 패원강을 정중한 예로 맞이했다.

팔파일방이 비밀리에 모든 힘을 집약시켜 키워 낸 정도의 후계자.

무림오존 중 공화존과 태극검존의 무공을 이은 최고의 후기지수가 천무련을 찾아온 것이다.

“패 소협, 드디어 오셨네요.”

“미안하오. 잠시 어르신들을 뵙고 오느라 늦었소.”

“괜찮아요. 그보다 이제는 천무련에 왔으니 패 호법이라 부르면 되죠?”

소호는 빙긋 웃었다.

지난번 술자리에서 나누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천무련을 도와라.

그리고 이왕 돕는 거 호법 자리 하나는 맡으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패원강은 못 이기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뭐요? 하핫! 그건 우리가 제대로 무공을 겨뤄 본 뒤에 정하기로 한 거 아니었소?”

“패 소협은 잘 모르지만, 내 내공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려요.”

“그렇소? 그렇다면 더더욱 급하게 일을 처리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사람이 한 번 사는 인생, 빨리빨리 하고 싶은 일들은 하면서 살아야죠.”

“여전히 언변이 청산유수로군.”

패원강은 친근하게 웃더니, 헛기침을 몇 번 터뜨렸다.

”크흠!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찾아왔소. 어르신들께 천무련 일을 돕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소형제와 함께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겨서 말이오.”

“제가 함께 해야 할 일이요?”

소호는 선뜻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제가 뭘 해야 하는데요?”

“무림맹주님께 함께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소. 이건 맹주님께서 그대에게 보내는 친서요.”

무림맹주.

일해검 백연의 서찰이 소호의 손에 건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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