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61화 (490/686)

15권 10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0)

소호는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순백의 가죽으로 잘 마감된 손잡이가 잡자마자 손에 착 감겼다.

살짝 뽑아 보니 새하얀 검신 위로 날카로운 예기가 감돌았다. 깊이 팬 혈조는 흠잡을 곳 없이 깨끗한 직선이고, 학의 날개 문양은 섬세하다.

천익검(天翼劍).

비학문의 날개라고 해서 비익검이라고도 부른다고 들었다.

소호는 비학문 문주의 신물이었던 그 검을 검집 안에 다시 집어넣고 허리춤에 걸었다.

‘무게도 적당하네. 천익검은 좋은 검이야.’

얼마 전에 천무련에 찾아온 나성호 지현이 직접 전해 준 검이었다.

그는 검을 전달하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비학문의 문주와 주요 가솔들은 모두 자신의 죗값을 받고 처형되거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었다.

관도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고생은 끝이라고.

천무련이 비학문을 몰아내고 관도를 잘 관리할 거란 소문이 돌았다.

비학문주의 신물과 비학문이 보유하고 있던 재산 또한 자연스럽게 천무련의 소유로 들어왔다.

‘잘된 일이야. 나도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해. 그를 위해서는 관도 출신의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고.’

소호는 문을 열고 나가서 연무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일찍 나왔네요? 약속은 반 각 뒤였는데.”

연무장에 서서 기다리던 스물다섯 명의 사내들이 잔뜩 긴장한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로서는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다.

이곳 천무련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그들은 유난히 이질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천무공자의 명성을 좇아 천무련에 투신한 낭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천무공자가 탐을 내서 직접 손을 내밀어 데려온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죄를 짓고 망해 버린 일문에서 건져진 운 좋은 인물들.

대체 지금 어떻게 사지 멀쩡하게 서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양명기와 비학문의 문지기였던 장씨가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굳어 있었다.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기강이 바짝 선 모습은 마치 군문의 병사처럼 보였다.

“먼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련주님!”

양명기가 나서서 먼저 포권을 취하자, 뒤에 서 있던 나머지 비학문 출신의 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양명기의 말을 따라 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련주님!”

스물다섯 명의 목소리가 커다란 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소호는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네요.”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을 모은 이유는, 앞으로 제가 할 일들을 알려 주기 위해서예요.”

소호는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함이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우선 비학문에 대해 이야기할게요.”

공포는 사라지질 않았다.

양명기와 비학문 출신 무인들의 눈빛이 잔뜩 겁에 질렸다.

“비학문주와 다섯 명의 제자들은 처벌받았습니다. 모두가 과거에 저질렀던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았어요.”

몇 명은 깜짝 놀랐고, 몇 명은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비학문주는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다섯 제자들도 비교적 죄가 없었던 일학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처형되었습니다. 관도의 지현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자들은 모두 처형되어 죽었어요.”

소호는 잠시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떨까요? 여러분은 비학문주나 오학검에 비하면 죄가 적겠지만, 그래도 비학문주의 밑에서 그들의 일에 동조하며 살아왔습니다. 무고하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괜찮나요? 여러분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나요? 만약 자신이 결백하고 아무런 죄도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 저에게 말해 주세요.”

소호는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아무도 손을 들거나 나서는 자가 없었다.

“아무도 없네요.”

소호는 씩 웃었다.

“저지른 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저를 믿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 주었죠. 그러니 제가, 여러분께 속죄할 기회를 드릴까 합니다.”

반응은 빨랐다.

양명기는 제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련주님의 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양명기를 시작으로 모두가 일제히 절을 올리며 소리쳤다.

“련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런 예를 받자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또한 여러분이 죗값을 갚아야 하는 대상도 제가 아니구요.”

소호는 손가락으로 천무련의 담장 너머, 관도가 있을 방향을 가리켰다.

“천무련은 앞으로 비학문이 지배하던 관도를 다스릴 겁니다. 아! 다스린다는 말은 너무 과하네요. ‘관리’한다는 말로 표현할게요.”

무릎 꿇고 절을 하던 자세 그대로, 양명기가 고개를 들어 소호를 올려다보았다.

“련주님께서는 관도를 잘 관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도록 노력해야죠. 그런데 제가 관도에 대해 너무 몰라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그들은 무림 문파의 어떤 도움을 바라는지. 관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이 필요해요. 마침 여러분은 모두 관도 출신이죠?”

“예.”

소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날카로운 예기가 충천하듯 솟구쳤다.

모두가 놀라서 바라보는 가운데, 소호가 들고 있는 천익검이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비학문주의 신물인 천익검이에요. 괜찮은 검이죠. 그런데 저랑은 안 맞아요. 이 검 자체가 만들 때부터 비학검을 쓰는 사람에게 어울리도록 만들어졌어요. 가운데 패여 있는 혈조와, 중간에 묘하게 낙차가 있는 두께 덕분에 검술을 쓸 때 강한 떨림을 만들어 내거든요.”

소호는 왼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검날을 한 번 쓰다듬었다.

허공에 가볍게 휘두르자 웅-하고 벌 떼가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비학검의 정수를 가르치고, 검술을 가장 잘 익혀 강해지는 분에게 이 천익검을 넘기려고 합니다.”

“……!”

모두가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비학문의 신물인 천익검.

아무리 작은 무파의 신물이라고 해도, 천익검만큼 잘 만든 검은 무림 강호에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얼마나 뛰어난 병기를 지녔는지에 따라 목숨과도 직결되는 게 무림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그냥 넘긴다.

게다가 비학검의 정수까지 가르쳐주다니.

비학문에서는 후반부 초식이 포함되어 있는 진정한 비학검은 비학문주의 다섯 제자만 배울 뿐, 일반 무사들에게 껍데기뿐인 기본공을 가르쳤었다.

“세상에…….”

“정말로……?”

비학문 출신 무인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굳어 있었다.

이는 그들의 일생일대에 찾아올 귀한 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가 왜 여러분께 무공을 가르치고 좋은 검도 주려고 할까요?”

대답은 없었다.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 뿐.

“관도를 관리하는 일은 쉽지 않을 거예요. 우선 관도의 백성들은 여러분을 비학문의 문도로 기억하겠죠. 그들과 똑같은 죄인으로, 그러면서도 천무련으로 거처를 옮겨 살아남은 비겁자로 볼지도 몰라요.”

“으음…….”

“게다가 천무련에는 앞으로 적이 많이 생길 거예요. 시기해서 음해하려는 자들도 있겠죠. 그렇기에 힘이 필요합니다. 관도 사람들을 괴롭히려는 자가 있으면 목숨을 걸고라도 막아서세요.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천무련이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드세요. 힘들다고요? 당연히 힘들어야죠. 지은 죄가 있는데.”

소호는 눈에 강한 힘을 담았다.

모두가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조용하지만 압도적인 소호의 기세에 그들은 지배되고 있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세요. 모든 힘을 다해 비학검을 익히는 것에 몰두하고, 그리고 강해졌을 때, 천무련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의 고향인 관도를 위해 일하면 됩니다. 다만 나태한 것은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초심을 잃고 자신의 죄를 잊는다면, 저는 여러분의 무공을 다시 ‘회수’할 것입니다.”

소호가 말하는 무공의 ‘회수’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는 알고 있었다.

비학문에서 벌어진 일방적인 참살.

그 자리에 있었던 이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소호는 검끝으로 모두를 한 번씩 가리켰다.

“그게 여러분의 속죄입니다.”

소호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로 희망도 주었다.

“모든 걸 이겨 내세요. 그럼 천무련의 무인으로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제가 최선을 다하죠.”

침묵은 길지 않았다.

모두는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자, 일생일대의 천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먼저 화답한 것은 양명기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결연하게 외쳤다.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련주님! 저희는 모두의 힘을 모아 속죄할 것입니다!”

하나둘씩 일어선 무인들이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같은 눈빛으로 소호를 응시했다.

“속죄하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강해지겠습니다!”

“관도 사람들의 신뢰를 되찾겠습니다!”

단지 천익검이라는 귀물 때문이 아니었다.

죄를 씻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

그 모든 것들이 모두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잘 봐요.”

소호는 천익검을 들고, 그가 비학문주나 송문과 겨루면서 익힌 비학검의 초식들을 직접 시연해 보였다.

허리는 꼿꼿이 세운 채, 보폭을 넓게 벌려 걸으면서 당당하게 검을 휘두르는 학과 같은 검술.

처음엔 순서대로 보여 주고, 그다음엔 소호가 생각할 때 가장 효율적일 거라 생각되는 순서대로 초식을 펼쳤다.

열을 맞춰 선 채 소호의 무공시연을 바라보는 그들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집중하고 있었다.

소호는 도합 두 번의 시연이 끝난 뒤, 한 명 한 명의 무공 실력을 직접 시험하며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항상 허리는 굽히면 안 됩니다.”

“보폭을 더 크게 하세요. 내가 학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마음이 급하면 안 되죠. 항상 명경지수의 마음으로, 차분하게 상대를 옭아매세요.”

소호의 지적을 받고 자세가 교정된 그들은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실력이 일취월장할 것이 분명했다.

“귀학검이라는 게 있던데, 그건 필요 없습니다.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요. 더 좋은 방식으로 힘을 집중시키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 지금은 비학검에 몰두하세요.”

소호는 양명기를 포함한 모두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확인한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한은 제가 무림맹에 다녀올 때까지입니다. 그때까진……, 이 검은 제가 갖고 있을게요.”

소호는 검술에 몰두해서 정신이 없는 모두를 놔둔 채 뒤돌아섰다.

이제는 련에서 처리할 일이 없었다.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

소호가 탄 마차는 대로를 질주했다.

길이 험한 탓에 깨나 덜컹거렸지만, 의자에 깔린 푹신한 모피가 충격을 흡수해 주었다.

보기 드문 쌍두마차는 고관대작들이나 탈 만큼 커서 자리에서 일어나도 머리가 천장에 닿지 않았다.

소호는 반대쪽에서 서로 최대한 어깨가 닿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앉은 두 사람을 보았다.

한쪽은 묘한 표정으로 계속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패원강이었고, 다른 한쪽은 새빨간 비단 장포를 어깨에 걸친 여인이었다.

그녀는 계속 소호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미미가 함께 와 줄 거라곤 생각도 못했네. 요즘 바쁘지는 않아?”

“응! 안 바빠!”

대미미는 쾌활하게 답했다.

어찌 보면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요즘 봐달라는 서류가 너무 많아서 귀찮아. 대산 아저씨가 알아서 해 줄 거야.”

“대산 아저씨가?”

“응.”

키도 크고 책임감도 강해서 기녀들 사이에선 무산철공주라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라던데.

이렇게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면 은자촌에서 소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대미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면 옛날부터 대미미는 복잡한 걸 싫어했다.

미미의 어머니께서 화려한 솜씨로 수놓는 걸 가르치고 있으면, 늘 어머니 몰래 천 조각은 던져놓고 소호랑 같이 산과 들을 뛰어다니던 활달한 소녀다.

예쁜 것을 좋아하고, 꽃 한 송이가 죽는 것도 슬퍼하던 아이.

그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컸다.

‘엄마가 날 보는 기분이 이럴까?’

소호는 흐뭇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도망친 거야? 머리 좀 식히려고?”

“그런 것도 있고…….”

대미미는 소호의 눈치를 힐끗 한 번 살핀 뒤에 말했다.

“주해가 그랬어. 오라버니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으니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어? 그랬어?”

“응. 자기가 직접 같이 못 가는 걸 굉장히 아쉬워하더라.”

소호는 천무련의 입구에서 배웅하던 섭주해의 모습을 떠올렸다.

표정이 많이 아쉬워 보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뿐인 총사까지 련을 비우면 굴러가질 않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미미가 와 주니까 다행이다. 믿음직해.”

대미미는 말없이 씩 웃으면서도 조금 부끄러워했다.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대쪽에 앉아 있던 패원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소호와 대미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렇게 한 사람만 빠져도 되는 일이 없으니. 아무래도 인재가 더 필요하겠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패 호법? 어서 천무련에 들어와서 일을 도와야 할 것 같죠? 이번에 다녀오면 열심히 일해야 할 것 같죠?”

“크흠! 난 아직 호법이 아니지 않소?”

“호법이에요. 내가 그렇게 정했어요.”

“나 참.”

패원강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하더니,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소형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소형제는 대미미 소저의 정인(情人)인 것이오?”

“예?”

서로를 마주 보는 소호와 대미미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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