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11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1)
“정인?”
“정인이라니…….”
소호와 대미미가 당황한 건 같았지만, 둘의 반응은 달랐다.
소호는 소리 내어 웃었고, 대미미는 얼굴이 빨개진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린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미미는 제 친동생이나 다름없어요.”
“그렇소? 그래도 일반적인 동네 친구보다는 훨씬 친해 보이는 것 같소.”
“하핫, 당연하죠. 가족인데요.”
소호는 환하게 웃었다.
패원강은 그런 소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난 소형제가 정인도 있는데 화화공자처럼 사는 줄 알았소.”
“……예? 뭐라고요?”
소호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학관에서도 수많은 누이들이 소형제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다고 하지 않았소? 다행이오. 이런 아름다운 소저를 정인으로 두고 그렇게 살았다면 아무리 영웅호색이라고 하더라도 용납지 못했을 것이오.”
패원강은 씩 웃기까지 했다.
처음 객잔에서 봤을 때의 그 유쾌했던 모습.
호쾌하기까지 했던 얼굴 그대로였다.
“패 소협, 생각보다 소심하네요. 지금 복수하는 거죠? 연애 경험 없다고 놀렸다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
패원강은 의뭉스럽게 웃을 뿐이다.
그는 힐끗 옆을 보았다. 패원강의 눈에 비친 대미미는 멍하니 얼굴을 붉힌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소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학관에서 누이들이랑 놀았어? 언제?”
“아냐, 그런 거.”
“학관 다니면서 난 다 보고 있었는데? 오라버니, 정인 만든 적 없잖아?”
“크흠!”
소호는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고, 패원강은 흥미롭다는 듯이 손으로 턱을 문질거렸다.
“대미미 소저도 무산학관 출신이었소?”
“네, 맞아요.”
미미의 대답은 무감정했다. 그녀의 관심은 소호에게 쏠려 있었던 탓이다.
“이건 대미미 소저가 사실을 잘 몰랐거나, 아니면 소형제가 없는 일을 말했던 모양이군.”
“내가 몰랐을 리는 없어요. 난 학관 다니면서 오라버니를 항상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흐음?”
“오라버니는 정인이 없었어요.”
대미미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소호를 바라본다.
소호는 어이가 없어져서 고개를 저었다.
“미미야, 아무리 그래도 네가 어떻게 나에 대해 다 알겠어. 그리고 패 소협, 정인은 없었어요. 그냥 이것저것 많이 듣고 배운 건 사실이지만.”
“누구한테? 설지 언니?”
“아냐, 아냐.”
소호는 손을 내저었고, 대미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의문에 휩싸였다.
패원강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랬군. 뭐 어쨌거나 정인이 없었다면 나랑 똑같은 것 아니겠소?”
“와, 난 패 소협이 그때 그 말을 담아 두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담아 두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그보다 소형제, 그리고 미미 소저, 목적지에 거의 다 온 것 같소.”
패원강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험한 산세를 병풍 삼아 나무로 된 목책을 얼기설기 엮은 소박한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호는 현판에 적힌 글씨를 읽어 보았다.
“하남……표국?”
“그렇소. 하남표국의 지부 중에 하나요.”
패원강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무림맹은 보는 눈이 많아서. 이번 회합은 하남표국에서 하게 될 것이오.”
“하긴 동창의 정보력은 조심해야죠. 패 소협, 그럼 이건 비밀 회합인 거죠?”
“그렇소.”
패원강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차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비밀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
남들에게 보여선 안 되는 일.
사람들에게 알려져선 안 되는, 조심스럽고 긴밀한 일이라는 게 모두에게 긴장감을 주었다.
마차는 금방 하남표국 안으로 들어갔다.
패원강이 혼자 내려 인사를 하고 뭔가를 보여 주자, 아무런 문제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소호와 대미미.
그리고 패원강을 포함한 세 사람은 표국 안으로 들어갔다.
***
“대체 왜 저자가 여기에 있냐는 말입니다!”
신경질적이고 분노가 가득한 외침이 건물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패원강을 앞에 세운 채 방 안에 들어가려던 세 사람은 당황하여 서로를 응시했다.
“아미타불, 멸진사태(滅盡師太). 진정하고 앉으십시오. 큰일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큰일을 위해 왔으니 이러는 겁니다! 저자가 누굽니까! 사천 땅을 버리고 간신의 편에 붙은 무림의 배신자가 아니냐고요!”
“허어! 멸진사태!”
“난 저자를 믿을 수 없습니다. 파불신니가 어떻게 가셨는데!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멸진사태라고 불린 이의 원한은 깊었고, 목소리만 들어도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난감해진 건 방 안에 들어가려던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잠시 고민했다.
“분위기가 좀…….”
“그러게요. 그래도 들어가죠. 기다린다고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아요.”
“으음, 그렇긴 하오.”
이렇게 멀뚱히 서 있는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소호는 당황하는 패원강을 격려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 이상으로 단출한 모습이었다.
딱히 장식품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고 그저 탁자 위에 찻주전자와 찻잔만 놓여 있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방 안에는 네 사람이 있었다.
소호는 그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우선 탁자에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이마에 계인을 찍은 소림승이 한 명, 그 옆에서 녹색의 비단 무복을 입고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의 사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탁자와 동떨어진 벽에 기대선 채 눈살을 찌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는 거구의 사내는 특이했다. 고급스러운 옷의 소매를 걷어서 굵은 팔뚝을 다 드러낸 모습은 산적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흑단처럼 새카맣고 긴 머리를 비녀 하나로 고정하고 있는 아미파의 중년 여인이 있다.
그녀가 바로 멸진사태.
파불신니가 죽은 후 아미파의 최고수라고 불리는 깐깐하고 고지식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가소롭군.”
멸진사태를 향해 일침을 날린 것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중년 사내였다.
그는 찻잔을 들어 그 향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말했다.
“그 당시 황실의 이름을 등에 업은 흑시군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는 무적의 기세를 뽐내고 있었소. 지금도 결과를 보시오. 강호 무림에서 그 방약무인한 흑시군을 짓밟은 자가 존재나 하는가? 이 중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사내는 비웃었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는 문제였다.
“계현 스님, 제 말이 틀렸습니까?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 굳이 싸워서 가족들이 죽는 꼴을 보란 말이오? 한 문파를 이끄는 인물로서 어찌 그런 어리석은 짓 따위를 할 수 있겠소?”
“뭐라? 어리석어?”
“그렇소. 어리석지. 심지어 굳이 그 어리석은 길을 택해 놓고는 힘이 부족해서 졌으면서 남을 탓한다? 말할 가치도 없소. 가소롭군.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오.”
“이놈!”
멸진사태는 들고 있던 선장으로 바닥을 쿵― 하고 내리찍었다.
분기탱천한 얼굴.
눈가의 주름이 깊어진 채 살기를 드러내는 그녀에게서는 심상치 않은 기세가 쏟아졌다.
“네놈이 당문의 가주라고 하더라도, 본파를 그리 업신여기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무사하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당문의 가주.
손짓 한 번에 죽음을 뿌리는 자.
아미파불, 당가사문.
(峨嵋破佛, 唐家死門).
사천 땅에서 최고의 고수를 가리자면 언제나 거론되던 두 사람이었으나, 이젠 파불이 죽었으니 오로지 비사문만이 남았다.
명실공히 사천의 최고수인 당문주 당금오는 멸진사태의 위협에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냉철해진 모습.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는 위협적이다. 맹독을 잔뜩 품은 독사가 똬리를 튼 채 머리를 꼿꼿이 세운 것처럼 섬뜩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파불은 죽었고, 장문인인 정허는 주화입마로 쓰러졌다지. 반쪽만 남은 아미파 따위가 우리 당가에 위협이나 될 것 같은가?”
“이……!”
멸진사태는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었으나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거칠게 씩씩대던 숨을 가라앉혔다. 멸진사태는 한풀 꺾인 채 독설만을 내뱉었다.
“이래서 세가라는 것들은 안 되는 것이다. 협이 무엇인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파불신니께서 맞선 것은 무림 강호의 정기를 지키기 위해서였거늘! 그저 가문, 가문! 돈, 돈!”
멸진사태가 경멸하듯 외친 말은 지금은 꽤 구태의연하게 느껴지긴 해도, 팔파일방과 무림 세가들의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팔파일방은 무림 세가를 가문과 돈밖에 모르는 세속적인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무림 세가는 팔파일방을 자존심과 협에 휘둘리는 고리타분한 곳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서로 간의 간극이 좀처럼 좁혀지질 않는 것이다.
“아미타불, 그만 진정해 주십시오.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 가야 할 정기 넘치는 후배들이 왔는데, 이리도 싸우고만 있을 것입니까?”
소림승.
계현이 중재에 나서자, 그제야 방 안의 사람들이 패원강과 소호, 그리고 대미미를 쳐다봐주었다.
멸진사태는 분이 가시질 않은 표정이었으나 한발 물러섰다.
그녀와 맞서던 당금오 또한 굳이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고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선배님들,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맹주님의 서찰을 전하고 천무련의 천무공자와 함께 왔습니다.”
패원강은 이미 모두와 안면이 있는 듯했다.
그가 공손히 포권을 취하면서 인사하자, 모두가 가볍게 눈인사만 건넨 채 소호를 바라보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호오, 그대가?”
“도철과 도올을 쓰러뜨렸다던?”
계현 스님의 두 눈에는 호기심과 따스함이 느껴졌고, 당금오에게서는 시험하는 듯한 냉엄한 시선이 느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멸진사태는 소호에게 그리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예상 밖의 행동을 한 것은 벽 쪽에서 가만히 기대어 있던 한 사람.
코밑의 수염을 양 갈래로 기른 채, 근육질 팔뚝을 드러내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곧바로 소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 것이다.
“천무공자라고? 하늘이 내린 무(武)라니. 광오한 별호라고 늘 생각했었다.”
대뜸 날려오는 말투가 전쟁터를 전전하는 낭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거칠었다.
“난 진주언가의 가주 언주명이다. 들어 본 적 있겠지?”
소호는 모두에게 차례대로 정중하게 포권을 취한 뒤 대답했다.
“장소호입니다. 붕산철권(崩山鐵拳)의 위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학관에서 황보 교관님께서 늘 말씀하셨어요. 외공(外功)을 단련하는 데에 언가의 가주님만큼 철저한 분은 없다고.”
“흥, 황보가의 애송이가 가르치긴 잘 가르쳤군.”
언주명은 말투는 거칠었지만 소호의 말에 기분은 좋아진 듯했다.
“묘하군, 묘해. 가볍게 서 있는 걸 보면 권사 같기도 한데, 왠지 풍기는 예기를 보면 검사나 도수 같기도 하니 종잡을 수가 없다. 천무공자, 너는 뭐지? 권사인가? 검사인가?”
“무인입니다.”
소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저 그때그때 싸움에 맞춰 필요한 무공을 사용할 뿐. 다른 것은 중요치 않다고 믿습니다.”
“그저 잡다한 것 아니냐?”
“아직 그런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 있게 웃는 소호가 오만해 보였던 탓일까.
언주명의 고집스러운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는 다혈질로 보이는 성격답게 곧바로 소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탓!
소호는 다짜고짜 자신의 견정혈을 제압하려 드는 언주명의 손을 피하기 위해 손바닥을 마주쳤다.
우우웅―.
“……!”
소호의 장심(掌心)을 타고 태산 같은 힘이 몰려들었다.
‘익숙한 방식이다.’
소호는 밀려드는 힘을 외공을 이용해 풀어내면서 발밑으로 흘려보냈다.
콰득!
소호의 발밑에 있던 나무 바닥이 발 모양으로 움푹 패 자국이 남았다.
힘의 집중.
사량발천근과 천근갑의 묘리였다.
‘무례하네. 곧바로 손을 쓰다니.’
소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젠 자신이 어떻게 반격할까 고민하는 사이 변화가 일어났다.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언주명은 곧바로 감탄하며 한 걸음을 물러난 것이다.
“천근갑을 기가 막히게 다루는군. 황보 놈이 헛가르치진 않았어.”
언주명이 마치 소호를 인정하듯 칭찬하면서 물러나 버리니, 소호는 화를 낼 기회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짜고짜 공격을 하고 실력을 시험하다니.
소호가 반쯤 당황하고, 반쯤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또다시 계현이 중재를 하듯 나섰다.
“아미타불, 반갑소이다. 천무공자. 그대는 이곳에 어찌하여 불려왔는지 알고 있소?”
“……함께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만 들었습니다, 스님.”
“틀린 말은 아니오. 하지만 정확하진 않군. 오늘 모인 우리는 다 같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모였다오.”
계현의 말은 마치 모두가 들으라는 듯했다.
멸진사태와 언주명, 그리고 당금오가 제각각 헛기침을 했다.
“한 가지 목적이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스님.”
“간단하오. 왕진이 만들어 낸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