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12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2)
“괴물……이라고 하시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계현은 불호를 외우면서 들고 있던 커다란 염주를 손안에서 굴렸다.
“사흉의 잔당을 뜻함이오. 장 시주께서는 도올과 도철을 쓰러뜨렸으니 잘 아시겠지요.”
소호는 너무 당황해서 입까지 벌리고 굳어 버렸다.
소호는 무림맹에서 그를 부른 까닭은 패원강과의 협력이나, 다른 이유로 부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흉의 잔당이라니.
‘여기도 그 이야기야? 오매검마…… 육모담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사흉의 잔당이 설지 선배 말고 또 있을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소호는 속마음은 감춘 채, 그저 놀라운 말을 들었다는 듯 신음성을 흘렸다.
“사흉의 잔당이라고 하시면 궁기나 혼돈인데. 그들이 살아 있나요? 얼마 전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요.”
“아미타불,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도 사흉의 잔당으로 보이는 의심스러운 자를 찾았다는 정보가 들려왔고, 현재 모든 이들이 백방으로 노력해서 뒤를 쫓고 있는 중이라오.”
“지금 쫓고 있다고요?”
“그렇소.”
“혹시 의심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려진 게 있나요? 젊은 사내인지, 아니면 거구의 사내인지, 일행이 있는지 같은…….”
“허허, 이리도 열정적으로 나서 주니 그야말로 정도 무인의 귀감이라 해야겠소. 우리는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오. 소수의 인원이라는 것은 들었소. 세 명 정도 된다던데.”
“……!”
세 명.
백설지 일행 또한 세 명이었다.
소호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는 당금오. 이제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소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아미파의 멸진사태.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 진주언가의 언주명까지.
‘이 사람들이 추격을 하고 있구나. 사흉의 잔당을 쫓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야.’
소림사.
사천당가.
아미파.
진주언가.
이들의 공통점은 딱 하나였다.
“여기 계신 분들은…… 으음, 하남에서 북경으로 가는 경로에 존재하는 정도(正道)의 거파네요. 여기 계신 분들께서 사흉의 잔당들을 쫓는 것이군요?”
“바로 맞추었소.”
계현은 소호의 영특함이 기꺼운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이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오. 이곳에 모인 분들은 모두가 사흉을 처단하는 것에 동의한 분들이지요.”
계현은 허허 웃으면서 소호에게 자리를 권했다.
“우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소? 그리고 뒤에 계신 여시주께선 누구신지?”
계현의 시선이 소호의 뒤에 한 발짝 물러나 있는 대미미에게로 향했다.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그녀는 자신이 호명되자 앞으로 나서서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대미미라고 해요. 천무련에서 일을 돕고 있어요.”
목소리가 낭랑하면서도 발음이 명확했다.
소개가 끝나자마자 물러나려는 그녀를, 패원강이 붙잡듯이 한마디를 보탰다.
“대 소저는 뛰어난 무인입니다. 무산학관 출신인 데다 무산철공주라는 별호까지 얻었습니다.”
“오오, 그렇구려.”
“무산철공주? 들어 본 적 있어.”
대미미의 별호가 튀어나오자 계현은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멸진사태도 이채를 띈 눈으로 대미미를 응시했다.
“아이야. 초패왕 같은 신력을 타고났다던데? 정말이냐?”
“외공은 항상 단련하고 있어요. 감히 초패왕과 비교하는 건 그저 강호에 떠도는 소문인지라 자랑할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미미는 담백하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멸진사태는 깐깐하고 괴팍해 보이는 여인이었으나, 대미미에게는 날카롭게 굴지 않았다.
그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대미미를 살필 뿐이다.
‘미미가 생각보다 당차다. 말을 잘하네. 멋있을 정도야.’
놀란 것은 소호도 마찬가지였다.
하오문과 함께 일하면서 기녀들과 지낸 탓일까?
볼 살이 발갛게 올라 항상 수줍어하면서 우물쭈물하던 미미의 모습이 엊그제 본 것처럼 선명한데, 지금의 대미미는 단호하고 당차다.
사나운 인상의 멸진사태를 앞에 두고도 천하 여장부가 따로 없지 않은가.
“미래가 기대되는 동량들이 이리도 많으니, 강호의 홍복이지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계현은 껄껄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세 사람 모두를 앉히고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장 시주, 이번에 장 시주를 부른 이유를 알고 계시는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어요. 여기에 뛰어난 선배님들이 많으셔서 제가 감히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명성과 달리 겸손하구려. 천무공자는 하늘이 내린 재능만큼, 지닌바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고 들었건만. 강호의 소문이 얼마나 헛된 건지 잘 알겠소.”
“제가 그렇게 소문이 났나요?”
“당 가주께서는 어떻소? 그렇게 듣지 않으셨소?”
당금오는 기품 있게 찻잔을 내려놓은 뒤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게 듣기는 했습니다. 천무공자는 모르는 무공이 없다.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그 나이 대에 뛰어남을 뽐내던 후기지수들은 늘 자신만만했으니 특이할 건 없겠지요.”
“허허, 그건 그렇지요. 후기지수들은 늘 자신감이 넘치는 법이지요.”
“그럼에도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청년은 겸손해 보입니다. 물론 그 안에 어떤 마음이 숨겨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당금오는 역시나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날카로운 눈빛.
꼿꼿하게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모습에서 먹잇감을 탐색하는 뱀 같은 서늘함이 감돌았다.
소호는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지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요.”
그에 반해 계현 대사는 정 반대다.
두 눈은 따뜻했고 표정은 온화하다.
긴 수염을 쓰다듬는 노승은 마치 세상사 모든 이치를 깨우친 현자 같은 면모를 보였다.
“부끄럽습니다.”
소호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최근에 그 자존심이 깨질 만한 일을 연달아 겪어서요.”
“허어, 어떤 일을 겪었기에 그러시오?”
“아버지께 혼나고, 만만하게 봤던 가장 친한 친구한테도 혼쭐이 났어요. 이쯤 되니 제가 좀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싶어서요.”
한숨을 푹 내쉬는 소호에게선 제 나이 또래가 아닌, 오륙십 대의 연륜이 담긴 것 같은 회한이 흘러나왔다.
젊고 생기 넘치는 외모에 세상 다 산 듯한 한탄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보는 사람이 실소를 흘릴 광경이었다.
그래도 소호가 솔직하게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니, 방 안의 공기가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가슴의 그 봉인과 관련된 일이구려.”
“네. 크게 내상을 입고 점혈을 해 두었어요. 역시 알아보시네요?”
“허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장 시주가 우리 본파의 역근경을 배운 덕분이지요.”
“그랬구나. 예. 소림의 불법은 무한해서 제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주었어요.”
“허어, 나는 장 시주 같은 사람은 불법이 불요(不要)하다 생각했소. 그리 말해 주니 승려로서 참으로 기꺼운 일이오.”
소호는 의뭉스럽게 웃는 계현이 왜 그리도 소호를 친근하게 대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불요신승! 땡중 할아버지!’
은자촌에서 항상 소호에게 호들갑을 떨면서 소리치던 파계승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달마도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퉁퉁하고 푸근하게 생긴 그는 늘 소호에게 호통을 쳤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자상한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역근경을 가르쳐 줄 때의 기억.
얼마 전에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만났었던 모습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 때문에 소림에 다시 가셨다더니. 그래서 계현 대사도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거구나.’
소호는 방긋 웃었다.
“이 세상에 불법(佛法)의 힘이 필요 없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허헛, 장 시주가 그리 말해 주니, 황실에 역근경을 빼앗긴 것도 그 가치가 있었다고 말해야만 하겠소. 아미타불.”
서로간의 격의를 한순간에 줄여 버리는 게 소호의 매력이지 않던가.
친근하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야기에 계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당금오에게서도 서늘한 기색이 많이 사라졌다.
“참으로 잘된 일이오. 장 시주, 고생은 좀 했을지언정 내상을 입은 것은 좋은 일이라오.”
“좋은 일이라고요?”
“그렇고말고. 자고로 젊을 때 오만함이 깨어져야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법이지 않소. 본승 같은 노물이 자부심을 잃으면 다시 일어설 수도 없겠지요. 허나 장 시주 같은 젊은이들은 다르다오.”
“그런가요?”
“우리 나한전의 기고만장하고 고집스런 놈들도 장 시주처럼 고생을 좀 하고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구려.”
“허.”
자신의 소림사를 낮추는 계현의 말에 소호는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위험한 말씀이세요. 제가 겪은 일이 그리 가볍지 않은데. 그러다 스님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파계라도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 또한 인연이 아니겠소? 못 견디고 숭산을 떠날 녀석이면 애초에 소림의 사람이 아니었겠지요.”
농담 반 진담 반.
서로를 탐색하던 친근한 대화는 이제 끝났다.
계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장 시주를 부른 이유는, 이 넓은 강호 무림에서 정말로 ‘신수’를 쓰러뜨린 적이 있는 자는 장 시주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라오.”
“아……!”
“신수라는 자들은 사람과는 다른, 알 수 없는 힘이 있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멸진사태?”
계현에게 불린 나이 든 비구니.
멸진사태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선장으로 바닥을 쿵쿵 두드리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상한 힘이 있지요. 사술(邪術)이라 불러야 마땅해요. 그 괴상한 힘 때문에 파불께서……, 그 고명한 무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악적의 손에 당하고 만 것입니다.”
“사술이라……. 정확히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겁니까?”
“저희 아미파가 본 도철은 기이한 힘을 썼습니다. 양손이 빨간 기운으로 뒤덮이더니 강철처럼 단단해졌습니다. 바위를 깨고, 강철을 부러뜨리는 힘이었어요.”
“무공이 아닙니까? 언가주처럼 뛰어난 외공을 수련했을 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창밖만 내다보던 언주명도 관심이 생긴 듯 멸진사태를 힐끗 바라봤다.
“무공과는 달라요. 그건……, 말로 설명하기 힘들군요. 도철은 짐승이에요. 그런 도철을 쓰러뜨렸다고 주장하는 천무공자가 직접 이야기해 봐요.”
멸진사태는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소호는 가만히 있다가 느닷없이 얻어맞은 기분이라 당황스러웠다.
‘쓰러뜨렸다고 주장? 사실인데 그걸 내가 왜 주장해? 말이 이상하네. 멸진사태는 날 싫어하나?’
소호는 기분이 좀 상했지만, 그걸로 따지긴 싫어서 순순히 답해 주었다.
“맞습니다. 용생이라고 해서, 도철은 양손에 핏빛 강기를 씌우고 강철도 부러뜨릴 수 있는 조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어요.”
“강기. 강기라…….”
“무공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거기엔 신수 특유의 상식을 벗어나는 힘이 있기는 했습니다.”
계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개한 채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강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림에서 십 대 고수의 칭호를 받은 이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봐야겠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지 않나요? 천무공자, 당신은 그런 강한 자를 어떻게 쓰러뜨린 거죠?”
멸진사태의 두 눈엔 의심이 가득했다.
불신, 불만.
소호를 숫제 싫어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의 분위기였다.
‘대체 왜?’
소호가 대답하기 전에,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당금오가 먼저 나서서 소호 대신 대답했다.
“그야, 파불신니보다 천무공자가 뛰어났기 때문이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