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13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3)
“뭐라?”
멸진사태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쿵!
그녀가 내리친 선장이 큰 울림을 만들어 냈다.
“신니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네놈이 감히 신니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
“또 그 이야기인가.”
당금오는 싸늘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신니에 대한 거로 나를 원망하시는데, 분명히 말해 두겠소. 싸우기로 한 건 아미파의 결정이었소. 그리고 신니를 죽인 것은 왕진과 흑시군이지. 대체 왜 나를 원망하는 것이오?”
“너희 당문이 사천 땅을 버리고, 흑시군 앞에 납작 엎드렸기 때문이다! 먼저 싸움을 시작했다면……! 아니면 우리와 힘을 합쳐 싸웠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 당가가 아미파의 방패막이라도 됐어야 한다는 소리요?”
“뭐?”
“그런 논리라면 황실과 싸우지 않기로 결심하고 맹주령을 소집하지 않은 무림맹도 원망할 것이오? 싸움을 피한 소림사, 무당파도 모두 원망하시오?”
멸진사태는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분기탱천했으나, 무림맹과 다른 거대 종파 두 개의 이야기가 나오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줄 알았지.”
당금오는 비웃으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구파의 협만 협인가? 세가에도 우리 방식의 협이 있소.”
“그게 무슨 소리냐……!”
“멸진사태께서 화산이나 청성처럼 아미파랑 똑같이 황실과 대립한 문파를 옳게 보고 있다는 건 잘 알겠소. 하지만 그걸 강요하진 마시오. 우리가 살아남았기에, 지금 이렇게 왕진에게 한 방 먹일 만한 일도 계획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 달라는 소리요.”
멸진사태의 호흡이 뚝 끊어졌다.
상대방의 무공을 꿰뚫어 보는 눈을 지닌 소호에겐 보였다.
그녀의 숨소리가 달라지는 모습.
내면에 흐르는 진기의 흐름이 급변하는 광경.
소호는 그 순간 분명히 보았다.
멸진사태의 마음속에 있던 어떠한 선이 끊어졌음을.
거칠었던 숨소리가 완벽하게 차분해지면서, 그녀가 속으로 중요한 결심을 내렸다는 걸 직감했다.
“내가 평정을 잃고 너무 흥분했네요. 사과하죠.”
심지어 멸진사태는 사과하기까지 했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선심을 베풀 듯이 한 사과긴 했지만, 그게 얼마나 뜻밖이었는지 뱀처럼 싸늘하던 당금오조차 미간을 좁힌 채 잠시 당황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멸진사태는 당금오가 사과를 받아들이자마자 고개를 훽 돌렸다.
그녀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소호를 쏘아보았다.
“아이야. 아까 내 질문에 대답해 보거라. 너는 어떻게 그 괴물 같은 자들을 쓰러뜨렸지? 너도 들었듯이, 그 괴물은 우리 아미파의 신니를 쓰러뜨렸다. 우리에겐 굉장히 예민한 문제이니 잘 말해야 할 것이야.”
소호는 당황스러웠다.
아미파가 도철과 흑시군에게 당했다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뭘 어떻게 잘 말해야 한단 말인가?
숫제 당금오와의 싸움으로 인해 생긴 화를 소호에게 푼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는 민초들을 괴롭히던 도철과 만나서 맞서 싸웠고, 싸워 보니 제가 좀 더 강했을 뿐이에요.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었습니다.”
“……내 눈에는 네가 그렇게까지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그 일이 거짓이었다면, 저는 천무련이라는 곳을 세울 수는 없었겠죠.”
소호의 말투도 딱딱해졌다.
굳이 멸진사태를 설득시킬 필요가 있을까?
사천당문과의 싸움에 대한 화풀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그의 무공실력을 믿지 못하겠다고 결정지은 사람의 생각을 왜 노력해서 굳이 바꿔야 하겠는가.
“이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매우 중차대한 문제야. 너는 정말로 도철을 쓰러뜨린 게 사실인지 내게 소상히 밝히는 게 좋을 것이다.”
멸진사태가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며 소호의 무공을 시험하려 드는 그때였다.
“왔다!”
창밖을 내다보던 진주언가의 가주 언주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급히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상기된 얼굴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머리는 산발을 한 사내 한 명이 구를 듯한 기세로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사내는 방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조금 당황했으나, 이내 언주명을 향해 가장 먼저 포권을 취했다.
“가주님! 그리고 여러 강호의…….”
“됐다! 됐어! 기다리다 지쳐서 숨 넘어 갈 것 같으니 빨리 말해! 어떻게 되었냐! 그놈들이 맞아? 사흉이 맞아?”
언주명이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자, 보고를 위해 찾아온 사내는 기가 죽어서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마, 맞습니다. 그놈들, 저희가 들었던 정보와 똑같았습니다. 얼굴을 감춘 사내 둘에 여인 하나. 저희가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곧바로 도망쳤고, 개방의 도움을 받아서 쫓고 있습니다.”
“들켰다고? 하긴, 상대가 사흉이니. 그래서! 그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지금 언가의 사람들을 총 동원해 태행산(太行山) 쪽으로 몰고 있습니다. 옥척협곡 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있는데, 지리가 넓어서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래?”
언주명의 눈이 번뜩였다.
“다친 놈은?”
“그놈들이 일단 도주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갔던 자들 말로는……, 그놈들 실력이 엄청나답니다. 맞부딪치면 일격에 목이 날아갈 것 같다고 했습니다.”
“흥, 사흉이니 그 정도는 하겠지. 알겠다!”
언주명은 우렁찬 목소리로 계현을 향해 소리쳤다.
“계현 대사! 방향이 나왔소! 이제 사냥을 나갑시다!”
“아미타불.”
계현은 불호를 읊으며 염주를 굴렸다.
“언 가주.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또 그러십니다.”
“허어, 소림은 정말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지요. 소림과 무당에는……, 사시사철 저희를 감시하는 동창 요원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쳇, 이제 그것도 다 때려부숴야 할 것이오. 언제까지 환관 놈의 눈치를 볼 거냔 말이오.”
“아미타불. 때가 되면 몰아내야지요. 그러니 이번에는 원래 이야기가 된 대로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계현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당금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기일지 혼돈일지 모르겠으나 사흉, 그자는 저의 암기와 독술로 처리하겠습니다. 나 비사문 당금오와 당가타의 녹풍대가 옥척협곡 잔도를 지키며 그들에게 정도의 힘을 보여 줄 것입니다.”
당금오의 말에는 진실로 일이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위험천만한 암기를 던져 대며 사정없이 독을 뿌려 대는 사천당가의 가주와 녹풍대.
그들의 모습이 당장 눈앞에 있는 거처럼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당가의 호기 넘치는 외침이 모두의 가슴에 불을 붙인 듯했다.
쿵!
아미파의 멸진사태도 선장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흥, 당가로는 부족하지. 그놈들은 우리 아미파의 동지들이 베어 죽일 것이오. 우리의 원한은 하늘까지 닿아 있어! 아미파의 복호승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맹자들이니.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협이 무엇인지 보여 주지요. 사흉이라니. 흥!”
멸진사태는 자신 있게 외쳤다.
“그 벌레 같은 놈이 기른 자들은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어!”
복수심과 광기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멸진사태의 얼굴은 섬뜩했다.
말의 내용도 그랬지만, 그녀의 눈빛에선 살기가 폭사되고 있었다.
“우리 언가의 사내들이 태행산을 샅샅이 훑으며 그들을 몰아넣을 것이오. 혹시 모르지, 내 눈앞에 보인다면 이 두 주먹으로 그놈들의 머리를 부숴 버리겠소!”
언가주 언주명은 호기 넘치게 소리쳤다.
강하게 움켜쥔 주먹.
강인하게 불끈대는 근육들이 그의 존재감을 한층 강하게 만들었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계현은 온화한 얼굴로 염주를 굴렸다.
“이리도 협의가 넘치는 분이 많으니 강호 무림이 평온한 것이지요. 여러분의 계획이 성공하길 기원하겠습니다.”
계현의 간접적인 허가가 떨어지자, 세 사람은 곧바로 표국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목표를 위해.
아미파, 사천당문, 진주언가.
이 세 개의 거파가 일제히 움직임을 시작했다.
“계현 대사님.”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호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도 쫓아가서 저 일에 한 손을 보태고 싶어요.”
소호는 간절했다.
흔들리는 눈빛,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선 초조함이 흘러나왔다.
언주명의 부하는 분명히 ‘사내 둘, 여인 하나’라고 말했다.
함부로 확신해선 안 되겠지만, 이쯤 되면 쫓기는 자들이 백설지 일행이라는 건 확실했다.
‘추격대를 쫓아가야 해. 상황을 보고, 구해 낼 수 있으면 구해 내야지.’
이미 사태는 소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 소호의 간절함을 다르게 해석한 것일까.
계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천무공자가 이토록 강호 무림을 위해 힘쓴다는 사실을 이 노승은 절대로 잊지 않겠소.”
계현은 패원강의 어깨를 두드렸다.
“원강아.”
“예, 사형.”
패원강의 스승은 소림의 최고수인 공화존자고, 이는 배분상 계현과 같은 항렬의 사제가 된다.
패원강은 계현을 사형의 예로 대했다.
“너는 어찌 하고 싶으냐?”
“천무공자를 돕겠습니다.”
“그렇지. 네가 꼭 깃발을 들 필요는 없다. 모든 일에는 인연이 따로 있는 법. 네게는 너의 길이 펼쳐질 것이야.”
“사형, 저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
“아미타불, 훌륭하구나. 협의로 가득한 시대의 천재가 또 다른 천재를 만났으니. 정도의 미래는 밝아.”
계현은 염주를 굴리던 행동을 멈춘 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장 시주, 원하는 대로 하시오. 다만, 그대들은 정도의 미래이니 목숨을 아껴 주시게.”
“명심하겠습니다.”
소호는 계현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한 뒤, 표국 밖으로 빠져나왔다.
“소형제, 그들을 쫓을 생각이오?”
“네.”
“사흉의 잔당을 쓰러뜨리기 위해서인가?”
“우선 만나 볼 거예요. 그런 뒤에 판단하려고 합니다.”
소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냥 둘 수는 없네요.”
“그런가. 그럼 나도 함께하겠소.”
패원강은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미미야, 너는? 같이 가도 괜찮겠어?”
“응.”
대미미는 숫제 왜 그런 걸 묻냐는 듯한 태도였다.
“당연히 가야지.”
“그래. 고마워.”
세 사람은 마차에 타고 곧바로 태행산으로 향했다.
시대를 바꾸는 격전지.
강호 무림을 흔들어 놓을 사건이 태행산 옥척협곡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태행산은 드넓은 산자락이 하남에서 북경까지 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웅장한 산세를 자랑한다.
푸르게 빛나는 호수는 곤륜산 서왕모의 전설을 본 딴 요지(瑤池)라 불리며, 호수 주변을 깎아지를 듯한 산세가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절경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태행산은 보기에는 좋지만, 산세가 험해 걸어다니기는 쉽지 않은 곳이었다.
산이 워낙 가팔라서 절벽에 판자를 박아 넣어 잔도를 만들어 두었는데, 어린아이가 아니면 두 명 이상 한꺼번에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길이 좁고 험했다.
“후우.”
태행산 산로를 정신없이 질주하던 세 사람.
머리에는 죽립을 쓰고, 검은색 피풍의로 몸을 감추고 있던 그들 중 한 명이 더는 참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싸워야겠어.”
그녀가 멈추자 모두가 멈췄다.
그들이 멈췄음에도 나무로 만들어진 잔도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호수 위로 부는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쿵. 쿵. 쿵. 쿵.
일정한 박자를 가진 흔들림이 느껴진다.
굽이굽이 휘어 있는 잔도 너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쫓아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싸우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혈로(血路)를 뚫는 거야. 자비 따윈 없어. 우리가 살려면 다 죽여야 해. 자신 있어?”
세 사람 중 곱추처럼 허리가 굽은 추남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싸워야지. 어차피 떨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죽립을 살짝 끌어 올린 그녀는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를 강하게 빛냈다.
“그리고 우리가 더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