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65화 (494/686)

15권 14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4)

백설지는 오라버니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나서지 말아 줘. 어차피 오라버니는 일만 명 다 모았잖아.”

“위험, 하면…….”

“알았어. 내가 위험하면 그때는 도와줘.”

궁기, 아니, 이제는 백설천이라 불러야 할 사내는 백설지의 말을 듣고도 불안한 듯 우물쭈물거렸다.

“신호, 필요하다.”

“신호? 어떤 신호? 아, 내가 위험하다는 신호?”

“그렇다.”

백설천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궁기였을 때의 기억이면서, 유준이었을 때의 기억이기도 했다.

무쌍귀를 상대하던 날.

유준이 위험해지면 돕기로 약속했었지만, 결국 그날은 둘 다 죽었다.

“오늘은, 안 된다.”

“뭐가 안 돼?”

“…….”

“오라버니는 이해하기가 힘들 때가 많아.”

백설지는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녀는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순순히 백설천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쓰고 있는 이 죽립이 날아가거나, 아니면 내가 스스로 벗어 던지면 위험한 걸로.”

“알겠다.”

백설지는 그녀의 오라버니가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본래 궁기라고 불리던 자.

집혼기에 일만이 넘는 혼백을 집어넣고, 진정한 신수로 거듭난 사람이 그녀를 지켜 주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 있을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백설지의 목소리는 자신만만했다.

***

쿵. 쿵. 쿵. 쿵.

태행산을 타고 오르는 잔도의 끝.

겨우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판자 다리가 끝나고, 녹색의 잎사귀들이 물결치는 넓은 공간이 시작되는 장소였다.

좁은 잔도 위를 날 듯이 달려오던 일단의 무리들이 멈춰섰다.

가장 선두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려 정지를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이딴 짓을 하다니.”

진주언가의 삼남, 언기창은 아버지를 쏙 빼닮은 커다란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육 척 장신.

어깨는 넓었고 양팔과 양 다리가 모두 크고 두꺼웠다. 소매를 접어 올린 그는 강인하게 단련된 팔 근육을 여실히 드러냈다.

언기창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건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급박한 성정.

과격한 투쟁심까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언기창은 잠깐의 지체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잔도를 부수는 정도로 우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언기창은 비웃었다.

잔도가 부서져서 길이 사라진 거리는 오 장(丈).

경신법을 익힌 무인이라도 한 번에 넘어가기엔 부담스러운 거리지만, 그건 정말로 발로 밟을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만장단애의 절벽을 뛰어넘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잔도의 좌측에는 큼직한 바위로 이루어진 협곡이 비스듬히 존재하고 있었다.

가파르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일 뿐.

일정한 경지를 벗어난 강호인에게 있어서는 걷기 좋은 계단처럼 보일 뿐이다.

“비호무영보(飛虎無影步)로 간다!”

언기창은 솔선수범해서 먼저 몸을 날렸다.

진주언가의 독문 신법인 비호무영보는 날개 달린 호랑이처럼 몸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신법이다.

그는 좌측의 바위벽을 발끝으로 걷어차면서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언기창을 시작으로 그와 함께 온 언가의 무인 오십 명이 일렬로 차례차례 몸을 날렸다.

그들은 절벽을 넘어다니는 산양 떼 같았다.

오 장의 거리를 건너는 건 순식간이었다. 언가의 무인들 중에 발을 헛디디거나 균형을 잃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언기창은 땅에 발을 딛고 내려서자마자 몸을 낮췄다.

선명한 무형기가 그의 몸에서 연기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언기창은 눈을 부릅떴다. 주변을 살피는 그는 경계심이 가득한 산짐승 같았다.

그는 주변을 살피며 작은 것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사람의 허리까지 오는 풀들이 많은 게 그의 심기에 거슬렸다.

성인 남성이 양팔로 감싸도 다 두르지 못할 만큼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 수백 그루도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상하군. 나라면 여기에서 매복을 하겠는데.”

입이 방정이었던 것일까.

언기창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사람의 머리통만 한 돌덩이가 그의 눈앞에서 급격히 확대되었다.

꽈아앙!

언기창은 정권 주먹으로 돌덩이를 후려쳤다.

허공에서 박살 난 돌덩이가 날카로운 파편들을 사방으로 튕겨 냈다.

“나왔구나!”

언가의 무인들이 언기창의 등 뒤로 속속 도착하는 와중에, 커다란 나무 뒤에서 한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호리호리한 체구.

새카만 피풍의로 몸을 감싸고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촘촘한 죽립을 푹 눌러쓴 인물이었다.

그는 바닥에 있는 돌멩이 하나를 발로 툭 차서 위로 띄우더니, 손바닥으로 강하게 밀어 언기창에게 날려왔다.

“이딴 장난질을!”

언기창은 분개하며 날아드는 돌멩이를 또다시 주먹으로 쳐냈다.

빠악!

언기창의 커다란 주먹이 돌멩이를 허공에서 박살 냈다.

“주먹이 단단하네. 다 도착했어?”

언기창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두꺼운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계집?”

“그래. 계집이야.”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이 가시처럼 날카롭다.

언기창은 뒤를 힐끔 보았다.

언가의 정예 무인 오십 명은 이미 그의 등 뒤에 도열한 채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육대 세가로 손꼽히는 진주언가에서도 고르고 고른 무인들이다.

대부분이 일류의 경지고, 몇 명은 자신과 같은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그들 모두의 힘이라면, 웬만한 무림 문파 하나를 불태우는 것쯤은 가볍게 할 수 있을 터.

‘다리를 건너올 때 기습을 했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이렇게 넓은 땅에 모이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다니. 전술을 배우지 못한 계집인가?’

언기창은 긴장을 풀면서 비웃었다.

팔목과 팔꿈치에 비구를 차고 격투를 준비하는 일류의 무인들이 그에게 자신감을 더욱 북돋아주었다.

“건방지군.”

그는 눈앞에 있는 계집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지금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사흉이다.

‘사흉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겠으나, 계집 하나쯤이야 어려운 상대도 아니지. 피할 것도 없다.’

언기창은 싸늘하게 웃었다.

“우리는 사흉을 잡으러 온 건데. 사흉은 어딨지?”

“사흉은 없어.”

“거짓말이군. 시간을 벌려고 나온 건가.”

언주명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나는 계집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나도 사내놈이라고 봐주지 않아.”

“……계집이 입만 살았군. 지금이라도 살고 싶다면 사흉이 있는 곳을 말해라.”

“흥.”

죽립 너머에서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겁이 많은 개가 많이 짖어. 여기도 그래?”

“이년……!”

언주명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는 돌덩이 같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말투를 보아하니 지방의 촌것인 것 같은데. 관짝을 봐야 후회를 하겠구나.”

“너야말로.”

죽립을 쓴 여인이 소매를 걷자, 마치 백옥처럼 새하얗고 매끄러운 양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기까지 한 그녀의 양손이 드러나는 순간, 언기창은 등 뒤를 스멀스멀 타고오르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관짝을 볼 테니, 후회하진 마.”

새파랗고 차가운 냉기가 훅― 하고 모두에게 끼쳐 들었다.

***

백설지는 어린 시절에 눈밭에서 뛰노는 것을 즐거워했다.

뽀득거리며 발밑에서 뭉쳐진 눈덩이는 단단하고 미끄러웠다.

호수에 가서 얼음을 깨고 낚시를 하면 팔뚝만 한 물고기가 잡혀 올라왔고, 나즈막한 언덕에서 썰매를 타며 놀 때는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곤 했다.

그때의 즐거움.

가슴이 뛰는 고양감.

눈의 미끄러움 위에 몸을 맡길 때 느끼는 그 짜릿한 해방감.

백설지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그때의 즐거운 감정을 생생하게 느꼈다.

건방진 진주언가의 무인들을 혼자서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그 기분은, 마치 가장 높은 언덕 위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올 때와 같았다.

후우우웅―.

언기창의 권격을 옆으로 피해 낸 백설지는 춤을 추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툭.

백설지의 손바닥이 언기창의 주먹을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렸다.

그 순간, 백설지의 손바닥이 푸르게 빛나며 언기창의 팔에 새하얀 설화(雪花)가 피어났다.

“크윽?”

언기창은 펄쩍 뛰어오르듯이 물러났다. 그는 빙백신기에 침식되어 허옇게 서리가 낀 왼팔을 오른손으로 붙잡았는데,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핏줄이 돋아났다.

“끄으으……!”

그는 팔을 마구 털었으나, 겉에 붙은 얼음만 후두둑 떨어질 뿐이다.

팔목을 파고 든 빙백신기는 그가 아무리 언가의 독문 심법인 잠호심공을 끌어 올려도 해결되지 않았다.

마치 동상을 입은 것처럼 그의 팔목이 벌겋게 변했다.

“사술을 쓰다니……! 크윽, 이 사악한 년! 이게 무슨 마공이냐!”

빙궁의 무공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에, 언기창은 그걸 마공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흥.”

백설지는 코웃음치고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언기창이 물러나는 순간 사방에서 오십 명의 언가무인들이 덤벼 왔지만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휘리리릭―.

백설지는 태극권의 묘리를 살려 양손을 부드럽게 회전시켰다.

가장 앞에서 용맹하게 덤벼 온 진주언가의 무인은 언기창 못지 않게 권격이 강맹했다.

팡! 펑!

그가 주먹을 뻗자 공기가 펑펑 터져 나간다.

백설지가 몸을 반회전시키며 뒤로 피하자, 이번엔 양옆에서 두 명이 동시에 덤벼 왔다.

콰앙!

퍼펑!

발뒤꿈치로 찍어 내리는 각법이 단단한 돌바닥을 박살 냈고, 상중하를 동시에 노려오는 정권 주먹은 바람을 일으켰다.

백설지는 크게 원을 그리면서 양손을 모았다.

왼손과 오른손의 손바닥을 마주하고, 꽃이 피듯 손가락을 펼쳐 권격을 날려오는 언가무인의 가슴 명문혈을 강하게 밀어쳤다.

뻐어억!

언가 무인의 몸이 직각으로 꺾였다.

울컥 뿜어낸 핏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푸확!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엔 어김없이 눈꽃이 피어났다.

가슴이 허옇게 얼어붙은 무인이 바닥으로 털썩 쓰러지자, 주변의 공기가 고요해졌다.

공포와 전의가 동시에 감돈다.

백설지는 이번엔 각법을 날려오는 무인의 옆구리에 강하게 일 장을 후려쳤다.

“쿠엑!”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가 무인 한 명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장타를 날려오자, 백설지는 피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마주 장타를 날렸다.

뻐어엉!

공기가 터져 나간다.

장법을 마주한 언가 무인의 소맷자락이 산산조각 나며 터져 나가더니, 근맥과 혈맥이 결대로 찢겨졌다.

손목, 팔꿈치, 어깨.

그의 오른팔을 완전히 박살 낸 힘이 그의 심맥에까지 닿았다.

“크륵……!”

장타를 마주한 무인은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막강한 내공이 상대방의 내부를 박살 내 버린 것이다.

무산학관에서부터 이미 내공이 강력하기로는 수위에 들던 그녀다.

게다가 집혼기에 혼백의 힘을 거의 다 모아 가는 설지의 힘은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막강한 내력!

빙백신기를 다루는 치명적인 장법까지.

“후우.”

죽립 뒤에 가려진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 위로 붉은색 기운이 일렁거렸다.

진주 언가의 무인들은 주춤거리며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순식간에 세 명이 당했다.

대책을 세우지않고 무작정 달려드는 건 자살행위였다.

“네가 사흉이었구나!”

빙백신기를 털어내고 다시 몸을 회복한 언기창이 버럭 소리쳤다.

집혼기를 지닌 신수가 아닌다음에야 이만한 무위라니.

다른 쪽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는 품에서 호각을 꺼내 불었다.

삐이이익―.

고요했던 태행산에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태행산 전체가 웅성거리는 듯했다.

백설지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바닥을 향해 장타를 날렸다.

파앙!

단단한 돌바닥에 그녀의 손모양이 깊고 진하게 새겨졌다.

그녀의 내공이 얼마나 깊고 심후한지를 보여 주는 한 수였다.

그녀는 당당하게 외쳤다.

“이 이상 넘어오면, 다 죽는다.”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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