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66화 (495/686)

15권 15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5)

“건방진!”

언기창은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렸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는 언가의 무인들을 시켜 백설지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잠호멸살진(潛虎滅殺陳)을 펼쳐라!”

언기창의 명이 떨어지자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사십칠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본래는 사흉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준비된 진법이지만, 그들 중에 의문을 표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백설지가 보여 준 무공이 그만큼 강렬했던 탓이다.

신수라고 불릴 만한 힘.

막강한 내공과 가공할 장법도 보여 주었다.

상대는 여인이라고 해서 무시할 상대가 아니다.

언가 무인들이 가진 바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할 강력한 적이 분명했다.

우우웅―!

백설지는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녀가 땅에 새겨 놓은 흔적을 넘어서는 순간 장법을 날렸다.

그녀의 왼쪽 발이 바닥에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색 피풍의가 허공에서 펄럭였다.

춤을 추듯 아름다운 동작.

절도 있는 움직임은 아니지만, 동작에 막힘이 없고 내공의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후우웅―.

언가의 무인은 자신의 가슴 앞에서 양팔을 십자로 교차한 채 몸을 낮췄다. 공격을 하기보다는 그녀의 공격을 막으려 들었다.

파팡!

그녀의 오른손이 상대방과 닿는 순간 언가의 무인은 조약돌처럼 튕겨져 나갔다.

“쿠억!”

그는 일격에 내상을 입은 듯 기침을 끊임없이 토해 냈다.

부릅뜬 눈은 실핏줄이 다 터졌다.

그의 양팔은 십자로 교차한 모습 그대로 하얗게 얼어붙어 따로따로 떨어지질 않았다.

스스슥―.

채챙!

그 틈을 타서 백설지의 주변을 진주언가의 무인들이 원형으로 둘러쌌다.

백설지가 장법으로 쳐 낸 무인은 어느새 뒤로 물러나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백설지는 제자리에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가의 무인들은 모두가 극도로 절제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양손에 철로 된 수투를 낀 채 각자 주먹을 내밀고 백설지를 경계했다.

그녀는 그들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사사삭―.

그들은 백설지가 다가가는 만큼 물러났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의 뒤쪽에 있던 자들도 백설지가 움직임만큼만 움직여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깡! 깡!

그 와중에도 철 수투를 서로 맞부딪쳐서 깡깡거리는 소리를 내니, 마치 짐승이 경계하며 짖는 것처럼 보였다.

‘늑대 같네.’

백설지는 북해에 살 때 커다란 곰과 대치한 늑대 떼를 본 적이 있었다.

힘과 악력, 그리고 두꺼운 지방과 가죽까지, 정면으로 싸워서는 곰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게 늑대다.

그런 늑대들은 곰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잔뜩 경계하기만 했다. 짖고, 으르렁거리면서 곰이 스스로 지쳐 도망갈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모습은 경이로웠기에 백설지의 기억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지금 언가 무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 늑대 떼와 비슷했다.

그들은 경계하며 끊임없이 백설지의 허점을 노린다.

이런 식으로 피하기만 하면서 그녀의 신경을 갉아먹는 전술이라면 실제로 백설지에게도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전의 나라면 그랬겠지.’

백설지는 양손바닥을 펼쳤다.

윤기가 흐르는 새하얀 손가락위로 차가운 빙백신기가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자신이 신법에는 그리 뛰어난 재능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호처럼 상대방의 동작을 읽는다거나, 곽도엽처럼 엄청나게 빠른 신법으로 날아다니는 듯한 움직임은 불가능했다.

다만 한 가지.

내공.

내공만큼은 무산학관에서 최고라 자부할 수 있었다.

두근!

백설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목에 걸고 있는 집혼기가 그녀의 전의(戰意)를 느끼고 강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그녀의 안광이 섬뜩한 붉은색으로 빛났다.

“빙백(氷魄).”

백설지는 양손의 손등을 붙였다가, 마치 꽃을 피우듯 양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신장(神掌).”

화아악―.

백설지의 단전에서 치솟은 빙백신기가 그녀의 양손에서 한 마리 용처럼 뻗어 나갔다.

“흡!”

언가의 무인 한 사람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충격은 한순간.

커다란 백룡에게 물린 것처럼 그는 새하얀 기파에 얻어맞았다.

파스스스―.

빙백신기에 휩쓸린 그가 새하얀 서리에 뒤덮였다.

“끄으으!”

그는 점점 온몸이 얼어붙어가는 공포 속에서 덜컥, 무릎을 꿇고 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는 내공을 끌어올리며 발악했으나 결국 이겨 내지 못했다.

쿵.

마침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그의 모습은 언가의 무인들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끄으윽!”

심지어 쓰러진 무인의 옆에 있던 자도 빙백신기에 휩쓸려 한쪽 팔이 얼어붙었다.

그는 한쪽 팔을 붙잡은 채 사색이 되어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얼어붙은 피부는 퍼렇게 죽어 가더니 제 색깔로 돌아오질 않았다.

“거리가 소용없다!”

“조심해!”

마치 소림의 신공(神功)인 백보신권을 보는 듯했다.

언가의 무인들은 공포에 질려 황급히 원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개진(開陣)! 상황이 바뀌었다! 달라붙어!”

언기창이 발작하듯 외쳤다.

그는 언가무인들이 일제히 백설지에게 거리를 좁히는 것을 확인 한 뒤, 자기 자신도 주먹을 든 채 달려들었다.

함께 온 언가의 무인들 중 절정의 경지를 넘은 세 사람이 그와 행동을 함께했다.

파파팡!

비호잠영보를 펼친 그들이 호랑이처럼 뛰어올라 제각각 팔방의 방위에서 백설지를 덮쳤다.

퍼펑!

“컥!”

백설지는 태극권의 묘리를 살려 덤벼드는 사내들을 쳐 내고, 꺾고, 밀어냈다.

빙백신장처럼 강력하지는 않지만, 극한의 한기가 담긴 장타는 그녀에게 한 번만 얻어맞아도 함부로 운신을 할 수 없도록 상대방을 괴롭혔다.

쳐 내고, 쳐 내고, 또 쳐 냈다.

퍼엉!

쾅!

콰득!

백설지는 무아지경으로 몸을 움직이며 일정한 간격으로 덤벼드는 언가의 무인들을 사정없이 날려 버렸다.

꺾고, 후려치고, 부순다.

동작은 마치 춤을 추듯 아름다웠으나, 그 결과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이년!”

그러던중 커다란 그림자가 정면에서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터엉!

그녀의 손이 처음으로 상대를 쳐 내지 못하고 막혔다.

까드득!

상대의 발밑에 길게 자국이 남았다.

백설지는 한쪽 손을 내뻗은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언기창이었다.

“막았다……!”

그는 철판을 덧댄 수투를 끼고, 양손으로 백설지의 장타를 간신히 막고 있었다.

핏발 선 눈, 양팔에는 두꺼운 힘줄이 불끈거리며 돋아났다.

“드디어, 잡았다. 이년.”

언기창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잠깐의 시간을 번 사이, 세 사람의 절정고수가 언기창을 도왔다.

한 명은 언기창의 등 뒤에서 내공을 전해 주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백설지의 손목을 붙잡아 그녀를 제압하려 들었다.

“흐으읍!”

언기창이 승모근과 삼각근을 부풀어 올리며 몸에 힘을 주자, 처음으로 백설지의 몸이 뒤로 조금 밀렸다.

“챠하앗!”

언기창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소리쳤다.

“흥.”

백설지는 코웃음쳤다.

공격이 막힌 상황.

주변은 포위되었고, 눈앞에는 만만치 않은 절정의 고수 네 사람이 그녀를 막기 위해 힘을 합하고 있다.

선택지는 몇 가지 존재했다.

지금이라도 언기창과의 힘싸움을 그만두고 피하는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막았다고?”

백설지는 그동안 언기창보다 강한 사람을 아주 많이 봤다.

무산학관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소호처럼 만능의 천재는 제쳐두더라도, 사람이 아닌 것처럼 강한 신력을 타고난 대미미나 이태산 같은 사람도 있었고, 섬세하기 그지없는 무공 운용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유준이나 태성천 같은 인물도 있었다.

외공과 체술을 극도로 단련한 철웅이나 봉천 같은 인물도 까다롭다.

그녀가 장타를 한 번 시전할 때마다, 수십 가지의 방법으로 반격하는 법을 알고 있을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언기창과 진주언가의 절정 고수 네 명?

우습다.

직접 겨뤄 보니 더욱 수준의 차이를 느낀다.

백설지가 내공이 강하다고 해서, 절정 고수 네 명의 내공을 한데 모아 그녀에게 대항하려는 발상 자체가 가소롭다.

그녀는 양손을 모아 장저를 붙였다.

후우웅―!

붉은색 안광이 죽립을 뚫고 보일 정도로 강렬하게 뿜어졌다.

그녀가 장저를 붙인 상태로 양손가락을 구부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입처럼, 그녀의 손가락 열 개에 각각 붉은색 강기가 치솟아 올랐다.

“용생(龍生).”

백설지가 나직하게 그 이름을 말하자, 마주하고 있던 언기창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였다.

까드득―!

“끄아악!”

단단한 현철로 만들었을 언기창의 수투가 마치 잘 익은 무처럼 잘려 나갔다.

지금 백설지의 양손은 짐승의 입과 같다.

송곳니처럼 날카로워진 손가락으로, 언기창의 손을 넘어 그의 손을 받쳐 주던 절정고수들의 팔까지 베어 냈다.

“끅, 그거! 그건!”

언기창은 정신적 충격이 육체의 고통보다 더 컸던 모양이었다.

그는 한순간의 실수로 양손이 너덜너덜해졌음에도,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백설지를 향해 소리쳤다.

“도철! 도철이다! 도철과 무슨 관계냐아!”

전의를 잃지 않았다는 점을 칭찬해야 할까.

언기창은 그 상태로도 주먹을 날려왔다.

진주언가의 독문 권법.

언가권이다.

백설지는 용생을 발동한 양손으로, 신수의 힘을 더욱더 끌어 올렸다.

“용아(龍牙).”

푸확―――!

언기창의 앞을 몸으로 가로막은 절정 고수 두 사람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분수처럼 치솟은 핏물이 백설지의 온몸을 적셨다.

촤아악!

그녀는 그 상태로 한 발을 더 나아갔다.

양손을 뒤덮은 용아의 강기.

거기에 더해 차디찬 빙백신기를 끌어 올려 빙백신장의 자세를 취했다.

“빙백신장. 용아!”

하얀 서리로 뒤덮인 용의 이빨.

백룡아(白龍牙)였다.

고오오오―.

처음엔 빙백신장과 같은 극한의 냉기가 언기창과 그의 주변에 있던 무인들을 덮쳤다.

새하얗게 얼어붙는 몸.

코와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결마저 얼어붙으며, 그들의 몸을 딱딱하게 굳혀 버렸다.

그 뒤에 터져 나오는 용아의 참격!

푸화아아악!

언기창의 복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간 날카로운 예기가 사람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쿠왁.”

엄기창은 피를 토하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삼공자님을 지켜라!”

“잠호멸살진을 유지해라!”

언가의 무인들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각오로 달려들었으나, 한 번 집혼기의 힘을 써서 살기를 드러낸 백설지의 눈에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허무해 보일 뿐이다.

푸화악―!

촤악!

뻐억!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도살이 시작되었다.

새하얀 손을 지닌 북해의 마녀.

소수마공(素手魔功)이라 불리는 전설의 시작이었다.

***

끊어진 잔도를 반대편에 둔 협곡 위에서 일단의 무리가 건너편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색의 승복을 입고, 긴 머리를 단출하게 묶은 여인들.

한 손에는 날카롭고 단단한 선장을 든 그 여인들은 아미파의 고수인 멸진사태와 복호승들이었다.

“사숙, 사흉을 마주쳤단 신호음이 들리지 않았습니까? 저들을 그냥 두고 보실 겁니까?”

금정사태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지금 그들은 넓은 강물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덤벼든 진주언가의 무리들이 흑색 피풍의를 입고 머리에는 죽립을 쓴 단 한 명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신수의 힘은 무시무시합니다. 거기다 저 무공, 신니를 쓰러뜨린 그 용생의 무공이 아닙니까?”

가만히 침묵하던 멸진사태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쓰러뜨리긴 누가 쓰러뜨려!”

“죄, 죄송합니다.”

“그건 신니께서 방심하신 탓이었다. 복호사의 무공에 패배는 없다.”

멸진사태는 모두의 의혹을 짓밟듯이 잠재웠다.

“우리 아미파는 이미 혼자 나서서 싸우다가 큰 손해를 입었다. 이젠 저들도 그 역할을 해 줘야지. 저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길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간악한 사천당문이 원래는 했어야 할 일이야.”

멸진사태는 그 생각이 그저 비겁한 이기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믿음이 강했다.

“저쪽엔 언가 가주도 안 나왔다. 진정한 정예는 따로 있어. 근데 도철……, 도철이라고?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그놈은 죽었어. 그럼 후인인가? 어느 쪽이든 살려 둬선 안 될 악인이다.”

멸진사태는 홀로 중얼거리더니 결론을 내렸다.

“피가 강처럼 흐르는구나. 악인이다, 악인이야.”

“사숙.”

“건너가자. 대신, 천천히 간다.”

“예? 사숙, 외람된 말씀이지만, 지금 저쪽은 한시가 급해 보입니다.”

“내 말을 의심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사숙.”

“강을 헤엄쳐서 건너자는 게야? 그래선 안 되지. 아이들 다치지 않게, 안전한 길로 둘러가야겠다. 저기 다리를 건너서 가는 게 좋겠다.”

주변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없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하는 모습에서 금정은 대화의 여지가 없음을 느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언가의 무인들을 바라본 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사숙.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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