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67화 (496/686)

15권 16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6)

푸른 나무들이 피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진주언가의 가주 언주명은 하얗게 서리가 낀 땅을 버적버적 밟으며 나아갔다.

점점 짙어지는 혈 향만큼 언주명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가주님! 이쪽입니다!”

무릎을 살짝 굽혔던 언주명이 폭발적인 속도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극성에 이른 비호잠영보였다.

허리에 황색 띠를 두른 언가의 무사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그와 똑같은 복색을 입은 자들이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이런 일이!”

언주명은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치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산전수전 다 겪은 강호의 명숙이다.

상대가 강한 만큼 희생이 없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다만 그 정도 격전은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헤쳐 나가야 하는 거라 생각했다.

상대는 고작 세 명인데 피해를 입어 봐야 몇 명이나 당하겠는가.

오십 명이나 되는 언가의 무인을 끌고 갔으니, 포위한 상태로 상대방을 몰아넣는 것뿐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기껏 죽어 봤자 몇 명.

이 정도 시간을 두면 희생자가 열 명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참에 풍진 강호에서의 경험을 쌓으라는 의미에서 먼저 보냈던 것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따로 보내질 않았을 것을!”

언주명은 깊이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주변의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배가 터져 나간 시신.

머리가 박살 난 시신.

칠공에서 피를 토한 상태로 빨랫감처럼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시신까지.

키가 팔 척이 넘는 거인이 날뛴 것처럼 시신의 위치가 제각각이었다.

“기창이는……! 기창이는 어디에 있느냐!”

“가주! 이쪽에 삼공자가 있소!”

언주명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중년의 사내가 그를 급하게 불렀다.

한달음에 다가가니 그를 닮은 청년이 푸른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놈!”

언주명은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안색이 새파랗다.

언기창은 입술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렇게 죽을 아이가 아니었다.

큰아들만큼은 아니라도, 매사에 똑부러지고 무공에 재질도 있던 아이다.

나이도 강호에서 한창 활약할 창창한 이십 대가 아닌가.

이런 죽음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변고였다.

“아, 아버님…….”

언기창은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

가쁘게 숨을 헐떡이는 모습은 화살에 맞은 사슴처럼 애처로웠다.

언주명은 굳은 얼굴로 언기창의 하반신을 보았다.

허리가 부러진 듯 아래가 축 늘어졌다. 가슴엔 커다란 짐승이 할퀴기라도 한 듯 발톱 자국이 남았고, 언기창이 눈, 코, 입에서 흘린 피는 턱 끝에서 딱딱하게 응고되어 있었다.

극한의 한기에 휩쓸렸는지 언기창이 흘린 피는 소나무에 엉겨서 얼어붙어 있었다.

“창아.”

언주명은 한쪽 무릎을 꿇고 언기창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미간에 내 천(川) 자를 그렸다.

부리부리하게 큰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새어 나왔다.

“원수가 누구냐?”

언주명은 길게 묻지도 않았다.

언기창의 상세는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못 살릴 만큼 심각하다.

원수의 이름 석 자 듣는 게 고작일 터.

“계집……, 죄송……, 소수(素手)……. 빙공이면서 사흉…….”

“계집? 그런데 사흉이라고?”

“용생…… 비호……잠영보로…… 피했어야…….”

언기창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모로 꺾었다.

숨이 끊어졌다.

초점을 완전히 잃어버린 눈은 이제 예전처럼 반짝거리면서 언주명을 바라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를 존경하고, 가주처럼 되고 싶다며 매일같이 외공을 수련하던 아이를 이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놈……!”

언주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소나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꽈앙!

우지직!

언주명의 권력(拳力)이 닿은 곳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중간에서부터 부러져 기우뚱 넘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강렬했다.

“못난 놈……! 이런 곳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선보인 원주명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한참을 씩씩거렸다.

“남 호법!”

“말씀하시오.”

“한 놈이지?”

“그렇소.”

언주명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이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알아차렸다.

언기창과 오십 명의 언가 무인들을 순식간에 몰살한 적이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바닥에 남은 족적.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언가 무인들을 압도한 자는 분명히 한 명뿐이었다.

“셋 중에 하나가 사흉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계집이었군. 쫓아간다. 오늘 태행산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내!”

언주명의 호통에 언가의 정예 무인 서른 명이 사방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두 명씩 짝지어 움직이면서 오래지 않아 소식을 전해 올 것이다.

언주명은 그때를 기다리며 활활 타오르는 살기를 애써 억눌렀다.

***

소호가 패원강, 대미미와 함께 태행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태행산 입구에서 사람들의 통행을 통제하는 진주언가의 무인은 표정과 말투가 모두 딱딱했다.

얼핏 적의까지 느껴질 정도로 경직되어 있던 그에게 소림사 계현대사의 친필 전서를 보여 주자, 그는 그제야 지금의 상황을 말해 주었다.

“소수마공(素手魔功)을 사용하는 마녀가 나타나 태행산이 들끓고 있소. 특히 우리 언가에서는 삼 공자이신 언기창 도련님과 무인들이 참혹하게 당하고 말았소. 죽은 자가 수십 명이나 된다오.”

언가 무인의 목소리 한마디, 한마디에서 짙은 살기와 원망이 느껴졌다.

소호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소수마공이라는게 뭐죠?”

“마녀가 쓰는 무공이오. 양손이 귀신처럼 새하얗다고 하오. 밤 중에 보면 번쩍번쩍 빛날 정도라던데. 그 위력이 무시무시해서 철검을 부러뜨리고, 방패를 찢고 얼린다고 했소.”

“손이 하얗고……, 강하다?”

소호는 침음성을 흘렸다.

힐끔 대미미를 쳐다보니 그녀도 똑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마녀……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아세요?”

“옥척협곡으로 몰아넣고 있기는 한데 희생자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소. 오늘 오전에는 아미파와 격돌했다던데, 그 결과는 아직 전해지지 않아서……. 계현 대사의 전서를 지니고 왔으니, 각파의 명숙분들께 직접 묻는 게 나을 것이오.”

언가의 무인은 소호 일행이 이 험악한 싸움을 함께 헤쳐나갈 동료라 생각했는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소호 일행은 평소엔 사람이 많이 찾지 않았을 것 같은 허름한 절간으로 안내되었다.

단출한 돌담 안에 불상이 놓인 법당 하나가 덩그러니 있을 뿐인 자그마한 절이었다.

소호는 절간 주변을 세 종류의 복색을 입은 자들이 제각각 거리를 둔 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황색 허리띠를 두른 자들, 녹색의 피풍의를 걸친 자들, 그리고 회색의 승복을 입은 비구니들이다.

진주언가, 사천당가, 아미파.

강호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거파의 무인들이 같은 공간에 있지만, 어째선지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천무공자가 왔군.”

소호 일행이 불당 앞으로 다가가자, 모여 있던 세 사람 중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금오가 소호를 알아채고 인사해 주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흉을 토벌하는 데 한 팔을 거들고 싶어서 왔습니다.”

“잘왔네. 마침 분위기를 쇄신할 필요가 있었는데 잘 와 주었어.”

당금오는 어째선지 지난번처럼 냉막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호를 반가워하기까지 했다.

“언 가주, 멸진사태. 지난 일은 시간을 두고 해결해도 괜찮은 일이오. 우선은 지금 당장 협곡 안으로 몰아넣은 사흉의 잔당들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겠소?”

진주언가의 가주 언주명과 아미파를 이끌고 있는 멸진사태는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호는 두 사람의 기세가 상당히 사나운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얼핏 피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언주명이 입은 무복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고, 그건 멸진사태도 마찬가지였다.

소호는 세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는 게 쉽지 않다고 느꼈다.

‘지난번에는 당가의 가주랑 아미파가 사이가 안 좋지 않았나? 그런데 오늘은 진주언가랑 아미파가 싸운 것 같은 분위기네.’

언가주 언주명이 먼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사흉의 잔당이 먼저지. 하지만 아미파는 믿을 수 없다. 당 가주의 계획은 나쁘지 않지만 우린 아미파랑 다른 경로로 공격하겠어.”

“언가가 이렇게 속이 좁을 줄이야!”

멸진사태는 오히려 언가의 가주가 실망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그녀는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언가가 먼저 나서 주었기에, 우리는 사흉의 잔당들 중 마녀를 제외한 나머지 놈들을 먼저 공격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지? 오히려 우리가 속은 거였어!”

멸진사태의 눈에서 살기가 타올랐다.

“돌아가서 공격했더니 오히려 검을 든 놈의 힘이 무시무시했다. 장담컨대 그 마녀 계집 따위와 비교할 바가 아니야. 이 내가 백 초를 겨루면서도 죽음을 생각했다고!”

“…….”

“언 가주. 당신만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우리도 복호승이 스무 명이나 죽었다. 그것도 허리가 잘리고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게 꽁꽁 얼어붙어서!”

“누군 그렇지 않았던가?”

언주명은 코웃음 쳤다.

“그리고 마녀 계집 따위? 우릴 우습게 보는군. 우리 언가의 황호대 오십 명과 내 셋째 아들이 별거 아닌 계집한테 당했다고 하고 싶은가?”

그의 큼직한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아미파가 아무리 손해를 봤다고 주장해 봤자, 내 셋째 아들놈이 호각을 불었을 때 신호를 무시한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싸움이 벌어진 것을 두 눈으로 봤으면서도 굳이 멀리 떨어진 다리를 돌아서 오다니. 내 아들이 처참하게 죽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게 명색이 팔파일방의 한 종파가 할 짓인가!”

“흥, 언 가주. 잘 알지도 못하는 사실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오만이 하늘에 닿았군. 본인의 식견이 좁으니 남들도 장님일 거라 생각하는가? 그 얕은 속내가 다 보인다. 멸진사태!”

“이자가 감히!”

쿵!

당금오가 불상 앞의 탁자를 내리쳤다.

“두 분 다 진정하시오! 까마득한 후배들이 보고 있소. 그대들은 각자 한 파의 종주이면서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멸진사태는 숨을 씩씩거렸고, 언주명은 냉랭했다.

“당 가주. 내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가문의 무인들이 약해서 졌으니 거기에 변명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미파는 못 믿어. 그 마녀 계집을 몰아넣어서 죽인다고 한들, 아미파와는 다른 길에서 공격하겠다.”

“흥, 누가 할 소리!”

멸진사태가 목소리를 높였다.

“약해 빠진 언가의 사내놈들 도움 따윈 애초에 필요도 없었어! 우린 우리대로 공격할 것이야!”

대화를 해결되지 않음을 깨달은 당금오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한발 물러나 있는 소호 일행도 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지도였다.

“각자 따로 나뉘어서 공격한다? 어차피 그렇게 할 거였소. 그러니 잘 보시오. 아무리 서로의 감정이 안 좋다고 한들 두 분 다 정도의 명숙이시니 ‘대의’는 지킬 거라 믿고 있소.”

당금오는 협곡의 한 지점을 짚었다.

“앞에는 헤엄쳐서 넘을 수 없는 깊은 강물이 있고, 양옆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오. 여기로 몰아넣었으니, 이제 이들이 향할 수 있는 방향은 오직 세 가지.”

당금옥의 긴 손가락이 지도의 한 지점에서 위로 쭉 올라갔다.

“하나는 가파른 길을 타고 협곡을 올라 태행산에서 빠져나가는 길이고, 다른 두 개는 강을 앞에 두고 좌측이나 우측, 둘 중 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오.”

모두가 지도를 살펴보니 실제로 그곳은 퇴로가 존재하지 않는 가파른 험로였다.

산을 오르는 협로 하나를 포함해 오직 세 개의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삼거리 같은 곳이었다.

“진주언가와 아미파. 두 분이 양쪽에서 동시에 움직여 주시오. 명심할 것은 진득하게 몰아붙여야 한다는 것이오. 괜히 절벽을 거슬러 앞지르려 하면 큰일 날 수 있소. 지반이 불안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산사태가 날지도 모르오.”

“그럼 사천당가는? 지난번처럼 또 뒷짐 지고 지켜만 볼 것인가?”

멸진사태가 대뜸 물어왔다.

당금오는 예상했던 것처럼 담담하게 답했다.

“우린 미리 협로 위에서 기다리면서 독공을 펼칠 것이오. 여기가 지대도 높고 바람도 아래로 부니 독공을 펼치기엔 최적이지. 그리고 나 비사문 당금오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막아세우겠소. 그사이에 두 분께서 들어오시면 독공으로 약해진 그들을 큰 손실 없이 잡을 수 있을 것이오.”

당금오의 계책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작전도 명확했다.

침묵에 빠진 두 사람.

특히 멸진사태의 두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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