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68화 (497/686)

15권 17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7)

“당문은 윗길을 틀어막고, 우리는 양옆에서 밀어붙여서 막다른 곳에 몰아넣는다? 거기에 독공을 써서 그들을 약하게 만들 것이고?”

멸진사태의 물음에 당금오는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바로 그렇소.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바람은 산 위에서 강 쪽으로 불고 있군. 독공을 펼치기엔 최고의 날씨지요. 천(天)과 지(地)가 돕고 있으니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오.”

“불안하군. 바람이 위에서 아래로 분다면 밑에서 쫓아가는 우리도 독공에 당하는 것 아닌가?”

언주명의 질문은 타당했으나, 당금오는 그 말을 단호히 일축했다.

“걱정하는 것은 이해하오. 그러나 우린 사천당가요. 우리의 용독술은 강호 최고를 자부하니 불필요한 인원까지 중독될 일은 없소.”

“세상사가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일을 하다 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다.”

“그건 그렇지요. 그럼 이건 어떻겠소? 정해진 시점에 우리가 깃발로 신호를 하도록 하겠소. 협곡에 진입한 악적들에게 먼저 독술을 쓰고, 그다음에 언가와 아미파가 진입하면 아무런 피해도 없을 것이오.”

“우리가 협로에 들어서기 전에 신호를 확인하고 들어서라?”

“바로 그렇소.”

언주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흔쾌히 수긍했다.

“그리하지. 다만 협곡을 쫓아가기 전에 그 계집이 나한테 덤벼들면…… 계획이고 뭐고 먼저 죽여 버릴 것이다.”

언주명은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음을 미리 선포했다.

“죽일 수 있다면 죽이시오. 어차피 죽여야 할 악적. 그저 내 계책은 최대한 우리의 손해를 줄이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오.”

당금오는 이번엔 멸진사태를 보면서 당부했다.

“다만, 절대로 뒤쪽으로 놓쳐서는 안 되오. 여기서 놓쳤다간 지난한 추격전을 얼마나 더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흥.”

멸진사태는 냉랭하게 말했다.

“너나 잘해라, 당가. 이번에도 몸을 사리다가 놓치면, 이번엔 너희가 사흉과 한패라 의심할 것이야.”

“멸진사태는 여전히 성급하고 말이 과하군. 알겠소. 본인이 직접 나서서 싸울 것이니 그런 걱정은 접어 두시오.”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침묵에 잠겼다.

똑같은 정도(正道)의 문파.

왕진에게 복수하겠다는 똑같은 목적을 갖고 움직이고 있음에도, 이들은 진심으로 협력할 수 없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으음.”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던 소호는 답답함을 느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정파 사람들은 협과 명분을 중요시하는 거 아니었어?’

당당한 영웅과 협사가 활약하는 정파의 모습은 그저 꿈일 뿐일까?

시대가 바뀐 것일까.

아니면 소호가 아직 뭘 잘 모르는 탓일까.

“장소호입니다.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장 소협.”

소호는 자신의 질문을 받아 준 당금오에게 물었다.

“진주언가, 사천당가, 아미파. 이만큼 강한 분들이 계시잖아요. 지금도 주변을 지키고 있는 각파의 무인들도 약하지 않습니다. 그럼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는 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쓰러뜨려야 하지 않나요?”

“장 소협의 말은, 그러니까. 정정당당하게 결투라도 하라는 것인가?”

“네.”

소호의 질문은 상대방의 어색하고 난감한 웃음으로 돌아왔다.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세 사람이 이번엔 서로를 보며 피식 웃기까지 했다.

“장 소협은, 으음, 순진하군.”

“그립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흥! 무지는 죄지. 강호 경험도 좀 했다고 들었건만, 아직 저리 세상 물정을 모를 줄이야.”

세 사람은 소호에 대해 각자의 평가를 내렸다.

그들이 소호를 바라보는 눈빛은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러워졌으나, 정작 본인인 소호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만약 상대가 왕진을 따르는 자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우리 무림 문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던 사흉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무림의 뭇 군웅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잘잘못을 가리고 당당하게 처단했을 걸세.”

당금오는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장 소협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네. 상대는 시간이 흘러 성장하면 무림 강호를 옥죌 악의 씨앗이야. 여기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뿌리를 뽑아야 할 터. 거기에 지금 이곳 태행산에서 생겨난 희생만 떠올리더라도……. 관용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당금오는 탕! 하고 탁자를 살짝 내리쳤다.

“악적은 단호하게 처단할 뿐! 멸사봉공(滅私奉公)!”

언주명과 멸진사태도 당금오의 의견에 동의했다.

“옳은 말이군.”

“처참하게 죽여서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이야.”

그들의 의견은 한결같았다.

그들에게 대화의 여지는 없었다.

소호는 주변을 쭉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섰다.

“제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어르신들께 많이 배웠습니다.”

“허헛.”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저도 한 팔을 거들게 해 주십시오. 사흉들이 독공에 당했는지 확인하고,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저와 제 일행이 하고 싶습니다.”

“허어.”

당금오는 잠시 고민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일일세. 적들의 감각이 뛰어나서 들키지 않고 정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될 거야.”

“괜찮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데 겁을 내서야 되겠습니까?”

“흐음, 옳은 말이군. 우리 정도 무림의 앞날이 밝아.”

당금오는 냉철한 인상이었지만, 같은 정도의 후배들에게는 친절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계획은 지금으로부터 한 시진 이후일세. 우선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에 대해 정하도록 하지.”

소호는 그 후에 당금오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뒤 모두와 함께 마차로 돌아갔다.

***

“소형제, 무엇을 노리는 건가?”

마차로 들어오자마자 패원강은 넌지시 물어 왔다.

그는 마차의 창밖으로 무형기를 일렁거리며 혹시 모를 귀를 경계했다.

“난 비록 소형제와 오랫동안 함께한 건 아니지만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알겠군.”

“그래요? 이상해 보여요?”

“솔직히 묻겠네. 저분들의 생각에 정말로 동의하는가?”

소호는 대답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패원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탄식했다.

“저분들, 으음, 정도의 선배들이니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솔직히 좋아 보이지는 않아. 서로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명성이 자자한 정도의 대문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일세.”

패원강은 아무래도 소호만큼이나 실망한 모양이었다.

착 가라앉은 눈빛.

어두워진 분위기가 그의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그동안 황실의 지배하에서 봉문이 너무 길었던 탓이겠지…….”

패원강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눈빛이 또렷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고도 할 수 없지 않나. 분명히 상대는 사흉의 잔당인 데다, 지금은 언가와 아미파에서 사람들을 잃었으니 이성을 잃을 만도 하지.”

“그렇죠.”

소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독공을 쓰고 우르르 몰려가서 칼침을 놓는 것은 전혀 명예롭지 않지만요.”

“……그렇기는 하군. 그래서 이상하다는 걸세.”

패원강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대체 왜 이 사건에 발을 담그고 함께하려는 거냐고.

“소형제가 평소답게 행동했다면 그 자리에서 할 말을 다 하고 당당하게 나와서 다른 길을 걸었을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나?”

“와아, 저를 제대로 관찰하고 있었네요.”

“난 지금 장난치는 게 아닐세. 위험한 상황이 되기 전에 소형제의 뜻을 알고 싶어.”

“저도 장난치는 것 아니에요.”

소호는 환하게 웃으면서 툭 던지듯이 호칭을 바꿔 불렀다.

“패 형.”

“으음, 소형제, 전에도 말했지만 호형호제는 함부로 하면 안…….”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패 형을 믿고 말할게요.”

소호는 대미미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는 패원강을 못 미더워하는 듯 보였지만, 소호가 담담하게 웃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마 저분들이 쫓는 사흉의 잔당이라는 사람. 제가 아는 사람일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패원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산학관에서 친했던 사람이에요. 겉으론 차가워 보여도 속은 따뜻한 여인인데……, 오라버니를 찾기 위해 왕진과 약속을 했죠.”

“약속……?”

“집혼기를 갖고 사흉이 되라는 거였대요. 그런데 버려졌어요. 도올이라는 자 들어 봤어요? 흑저라 불리면서 꽤 유명했었는데.”

“악명은 익히 들었소.”

“학관을 나오자마자 별 준비도 없이 그자를 상대하러 보내졌어요. 희생양이었죠. 당연하게 그들은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고……, 그래도 그 사람들 덕분에 저는 상처 입은 도올을 조금 더 수월하게 쓰러뜨릴 수 있었어요.”

패원강은 나직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가 천무공자라는 명성을 떨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도운 셈이군.”

“맞아요. 왕진의 안배였죠. 아무튼, 그 사람이 그렇게 버려지고 별다른 관심도 못 받는 사이에 상황이 변했어요.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오라버니를 만났고, 그들은 이젠 황궁으로는 돌아가지 않기로 했대요. 집혼기의 부작용을 치료해야 하니 마지막으로 비처에만 한 번 들렀다가 북해로 떠나거나, 아니면…… 천무련으로 오겠다고 약속했어요.”

패원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깍지 낀 손이 초조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그게 지금 쫓기는 저들이군.”

“네.”

소호는 패원강을 마주 보았다.

“패 형, 저는 그들을 구해 줄까 해요.”

“무모한 짓이오.”

패원강은 단언했다.

“그들이 정말로 황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그들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소. 소형제가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이니 나도 의심할 필요 없겠지.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구려.”

패원강은 손가락으로 마차 밖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들이 조금 전에 떠나온 곳.

불상 앞에 모여 있을 사천당가, 진주언가, 아미파를 가리킨 것이다.

“그녀의 일행이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이미 저들과는 원수가 되었소.”

“그렇긴 하죠.”

“죽음을 뿌린다고 해서 비사문이라 불리는 당가의 가주와 녹풍대가 함정을 파고, 강맹한 진주언가와 완고한 아미파가 퇴로를 막고 목을 조일 것이오. 저곳을 뚫고 그들을 구해 내겠다고?”

패원강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호연지기가 있으니 마음이 들뜨긴 하는군. 하지만 이건 시도해선 안 될 일이오. 그리고 만에 하나 성공한다고 한들, 그들을 천무련에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아뇨. 힘들겠죠.”

“바로 그렇소. 그러니 이건 실리도 없는 싸움이란 말이오.”

“실리를 따지지 않는 것이 정도 문파의 힘 아니었어요?”

패원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옳은 일을 하는 것.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검을 드는 게 정도 문파의 진정한 힘 아니었냐고요.”

“소형제…….”

“이 일은 옳지 않습니다.”

패원강은 소호를 만류하고 싶은 듯 안타까운 눈빛이 되었다.

“어째서 옳지 않소? 그렇소. 소형제의 말이 맞아. 어쩌면 그게 옳은 일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진주언가와 아미파의 무인들이 수십, 어쩌면 백 단위로 죽어 나갔소. 그 은원은 어떻게 할 것이오?”

“저들이 먼저 덤볐어요. 강호의 무인으로서, 상대가 자신을 죽이고자 달려들었는데 순순히 죽어 줄 수는 없는 일이죠. 그녀가 정도 문파를 말살시키겠다면서 싸운 것도 아닌데 원망하는 건 잘못된 것 아닐까요?”

“…….”

“그리고 저 사람들, 저는 솔직히 의문이 듭니다. 그녀의 일행이 왕진을 따르지 않고, 사흉의 잔당이 되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안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까요?”

패원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

“저들에게 필요한 건 ‘악적’이 아니에요. 왕진에게 한 방을 먹이고, 정도 문파의 부활을 알릴 화려한 희생양이 필요할 뿐이죠.”

“으음.”

“난 솔직히 저분들과 사파나 마교를 왜 구분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소호는 냉철하게 독설을 내뱉었다.

“그러니 난 구해 낼 겁니다. 그녀가 잘못도 없이 궁지에 몰려 죽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어요.”

마차 안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패원강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신음하듯 입을 열었다.

“소형제는, 성군(聖君)이 될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패왕(霸王)의 자질이었군.”

“패 형, 그건 칭찬입니까?”

“아니, 욕이오.”

패원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강한 의지는 부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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