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18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8)
패원강은 씁쓸한 얼굴이었다.
“소형제.”
“네, 패 형.”
“소형제를 돕겠소.”
“괜찮겠어요?”
소호는 자신이 부탁하고도 패원강의 대답에 놀랐다.
소호와 패원강은 입장이 다르다.
소호는 연고가 없으니 정 안 되면 정파 무림과 연을 끊어도 되는 사이지만, 패원강은 무공 내력에서부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고 했소. 천무련을 돕겠다고 약조했으니 도와야지.”
“패 형……!”
“소형제가 옳은 일을 한다고 확신하니 그를 믿어 보겠소. 그러나 나는 저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은 피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소호는 망설임 없이 수긍했다.
“네, 미리 생각해 둔 방법이 있어요. 저들과 생사결을 치를 필요는 없을 겁니다. 큰 결정을 내려 줘서 고맙습니다, 패 형.”
상대가 호의를 보일 때 그에 상응하는 예로 화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소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렇다면 좋소.”
패원강 또한 마주 포권을 취하며 웃었다. 패원강이 보여 준 신뢰에 소호도 그를 더욱 믿게 되었다.
“제 계획은 이래요.”
소호는 앞으로 두 시진 후에 벌어질 일들을 대비해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절간 안에서 세 사람이 함께 보았던 지도를 상기시키며 두 사람이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세 개의 세력을 분리시켜 틈을 노리겠다? 대범한 계획이군. 나는……, 직접 가 봐야 알겠지만 아마 가능할 거요. 내 실력을 알고 계획을 세운 건가?”
소호는 말없이 웃었고, 패원강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좋소. 그 정도는 해 줘야 천무공자라는 명성이 안 아깝겠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소저 쪽은…….”
패원강은 대미미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대미미는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아, 오라버니.”
“미미라면 그렇게 말해 줄 거라 생각했어.”
소호는 환하게 웃었고, 대미미 또한 배시시 웃었다.
패원강은 놀란 듯이 눈빛이 흔들리더니 시무룩하게 표정이 가라앉았다.
“설지 언니를 데려와야지.”
“그래.”
소호는 마음을 다시 강하게 먹었다.
앞으로 두 시간 뒤.
계획대로만 되면 그들은 백설지 일행을 구해 낸다.
“다시 데려와야지.”
***
아미파의 금정은 삼십 대 중반의 나이였다.
무림 강호가 멀쩡할 때였다면 이젠 후기지수가 아니라 실력을 인정받는 무인으로 명성을 떨칠 나이다.
아미파의 일대 제자 중에는 무공의 성취가 제일이며, 그녀의 난피풍검(亂披風劍)과 표설천운장(飄雪穿雲掌)은 아미파가 사실상 봉문이나 다름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강호에 조금씩 소문이 퍼졌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녀는 이번 아미파의 출정을 문파가 도약할 큰 기회로 생각했다.
흑시군의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 세력의 판도가 바뀔 강호 무림.
그 안에서 아미파가 크게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아미파가 욱일승천할 기회라고 생각했었는데…….’
금정의 생각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태행산에 온 뒤로 멸진사태의 행동이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과격했던 탓이다.
“사숙.”
금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재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것아.”
멸진사태는 혀를 찼다.
“이 한심한 것아. 무엇을 그리 겁을 내.”
“그래도 이건……, 이건 정말 모르겠습니다.”
“쯧쯧, 사천당가가 어떤 곳이더냐? 신니께서 쓰러지고, 아미파가 그 큰 굴욕을 당하게 된 게 바로 그놈들 때문이 아니냔 말이야? 그런데 뭘 그리 망설여?”
멸진사태는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
곧 벌어질 사태가 못내 즐겁다는 듯.
어서 그 광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닙니다, 사숙. 아미파가 당한 굴욕, 신니께서 쓰러진 것은 우리가 약했기 때문이에요.’
금정은 생각이 달랐으나 감히 아미파의 최고수이자, 문파의 큰 어른인 멸진사태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생각이 다르다는 티를 내는 것.
그게 금정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을 뿐이다.
“금정아.”
“예, 사숙.”
“이 일은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도 최선이다. 잘 생각해 보거라. 저 악적들이 자신들이 독공에 당할 거라 생각하면 어찌 행동하겠느냐?”
“독공을 피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거나……, 당가를 먼저 습격하지 않을까요?”
“바로 그거다. 어느 쪽이든 우리 아미파가 공격할 때는 그 악적 연놈들의 힘이 줄어드는 것이야.”
멸진사태는 자신의 생각이 흡족한 듯 껄껄 웃었다.
“이야말로 탁월한 계책이 아니겠느냐? 아까도 보지 않았니. 당가주 놈. 잔머리를 굴리면서 언가와 우리가 방패막이가 되어서 막고 있길 바라지 않더냐? 자기들은 멀리서 독이나 뿌려 놓고, 우리가 중독이 되든 말든, 나중에 어부지리나 챙겨 갈 속셈인 게야.”
멸진사태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내가 그런 잔수에 당할 사람이 아니지. 이래서 세속적인 세가 놈들은 안 된다는 것이야. 협의를 위해 희생할 줄을 몰라. 역시 강호 무림은 역사가 깊은 우리 팔파일방이 이끌어 가야 한다. 암! 그렇고말고.”
멸진사태는 광기에 가까운 신념을 드러냈다.
희뿌옇게 빛나는 두 눈에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신만이 가득할 뿐이다.
꾸욱.
금정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단단한 손바닥을 느꼈다.
멸진사태는 아미파의 표설천운장과 항룡복마인(降龍伏魔印)을 평생 단련한 사람답게, 돌처럼 단련된 손바닥으로 금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금정아. 악적들에게 여기 이 서찰을 던져 주고 오거라. 그들은 분명 서찰에 적힌 내용을 믿을 것이야.”
“사숙…….”
“우리 복호승들 중에는 네가 제일 신법이 뛰어나질 않니. 나는 네가 해낼 거라 믿고 있단다.”
인자하게 웃는 멸진사태가 두렵게 느껴진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멸진사태의 차디찬 눈빛은 그녀의 반론을 허용치 않고 있었다.
금정은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합장을 하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숙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금정은 멸진사태의 따가운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며, 사건의 중심지인 옥척협곡으로 향했다.
***
“동생. 실력, 늘었다.”
어눌하고 뚝뚝 끊어지는 말투 속에 진득한 애정과 칭찬이 담겼다.
백설지는 피식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옷이 진득한 피로 끈적거리는 것만큼이나, 백설천의 칼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백설지가 진주언가의 무인들을 쓰러뜨린 것만큼, 그녀의 오라버니인 백설천도 아미파의 복호승들을 쓰러뜨렸다.
백설천은 자신이 쓰러뜨린 복호승들의 숨통을 끊는 것은 백설지에게 일임했다.
그녀의 집혼기에 혼백의 힘을 하나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이는 북해에서 사냥을 할 때 종종 하던 일이었다.
두 사람만의 의식.
그때도 오라버니인 백설천은 백설지의 약한 마음을 단련하겠다며 사냥감들을 그녀가 숨통을 끊도록 시키곤 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위력으로 무공을 쓸 수 있다는 거. 재밌네. 상상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것 같아.”
백설지는 시시각각 자신이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새하얀 설산 위에서 눈덩이를 굴리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크기가 커지는 법이다.
자그마한 눈덩이 하나가 마지막엔 눈사태처럼 커지기도 한다.
집혼기를 토대로 한 그녀의 내공이 바로 그러했다. 싸움을 거듭할수록 거대해져서 이제는 다루기가 힘들 지경.
그녀가 손바닥을 한 번 흔들기만 해도 온몸의 혈도를 타고 흐르는 내력이 살아 있는 용처럼 꿈틀거렸다.
백설지는 ‘전능한 무력’이 어떤 것인지 그 가닥을 잡기 시작하는 중이다.
“그런데 힘이 세지는 만큼, 충동이 커져. 내 생각보다 손속이 과하달까.”
백설지는 은어처럼 하얗고 긴 손가락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푸른 보석 같은 그녀의 눈동자 위로 붉은색 기운이 일렁거렸다.
“내장에 타격을 주려고 하면 상대방의 몸이 터져 나가. 팔을 옆으로 쳐 내려고 하면 뼈가 부러져서 튀어나올 정도야.”
백설지는 크게 심호흡하며 지금도 두근거리며 끓어오르는 전의를 애써 억눌렀다.
“난폭해. ……응, 그 단어가 좋겠다.”
백설지는 자신의 상태를 최대한 냉정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난폭. 좋다. 강한 거다.”
“그래? 좋은 걸까?”
“많은 건, 좋다. 부족한 건, 나빠.”
백설지는 백설천의 어눌한 말에 위안을 받았다.
“난폭한 말은, 빠르다. 길들여서 올라타. 그럼, 명마다.”
“그렇구나. 하긴, 그럼 잘 길들여야겠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곽도엽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이 질문했다.
“심성(心性)은?”
“뭐라고?”
“심성은 어떠냐? 백설지. 예전과 달리 변한 건 없냐?”
곽도엽의 말투는 삐딱했지만, 그 내용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심성도 좀 달라.”
“어떻게 다른데?”
“싸우고 싶어. 피를 보고 싶어.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 보이는 족족 싸우고 싶어. 그럼 더 강해지겠지?”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그 어떤 상대와도 싸우고 싶은 마음.
그건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일이다.
“일만 명을 채워 가니……, 변하긴 하는가 봐.”
“그럴 테지.”
곽도엽은 담담하게 수긍했다.
“예전에 왕진 태감 밑에 있으면서 서류를 몇 개 본 적이 있다. 신수비처에서 그러더라고. 일만의 혼백에 가까워질수록 집혼기를 지닌 신수 후보자는 성정이 짐승에 가까워진다고.”
“짐승? 정말로?”
“그래. 집혼기의 힘과 네 이성은 늘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중이다. 평범한 사람이 일만의 혼백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 그 영향을 안 받을 리가 없지.”
“나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거야? 집혼기가 나를 간섭한다고?”
“확실해. 이곳 태행산에 오고부터 너는 손속이 잔인해지고 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어. 자꾸 적을 만들고 손에 피를 묻히니 냉정해지지가 않는 거다.”
곽도엽이 구부정한 자세로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은 마치 작은 야생동물 같았다.
“지형도 좋지 않아. 어서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백설지가 그 말에 수긍하며 빨리 가자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우웅―.
백설천이 말도 없이 한쪽을 바라보며 진기를 끌어 올렸다.
일렁거리는 무형기.
백설천의 양손에 막강한 빙백신기가 모여들었다.
“어?”
백설지는 백설천보다 한발 늦게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챘다.
한 사람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회색의 옷을 입은 비구니.
금정이다.
백설지는 그녀가 땅을 박차고 달려오는 모습이 굉장히 안정적이라고 느꼈다.
상체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다리만 경쾌하게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파라락―.
일정 거리 안에 다가온 그녀는 소매를 펄럭이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백설천이 한 발 앞으로 나선다.
그가 한 발 다가가자, 금정은 움찔하며 백설천을 경계했다.
“전해줄 것이 있어 왔다.”
금정은 대정선공(大靜禪功)의 내력을 담아 서찰을 던졌다.
쉬이익―.
원래대로라면 펄럭거리며 땅바닥에 떨어져야 할 종이 한 장이 마치 암기처럼 쏘아졌다.
턱―.
백설천은 날아온 서찰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손으로 잡아챘다.
금정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설천은 서찰을 펼쳐 눈으로 쭉 읽고, 그다음엔 금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죽립을 쓰고 있었지만, 집요하고 냉철한 눈길이 금정에게도 느껴졌다.
금정은 불편한 기색으로 손을 움찔거렸다.
당장이라도 기수식을 취하고 싸움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싸울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금정은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당가가 독공으로 공격할 거라고? 협곡 위에서?”
백설천이 건네준 서찰을 읽은 백설지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