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70화 (499/686)

15권 19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19)

“그게 무슨 소리야?”

“자, 읽어 봐.”

백설지에게 서찰을 넘겨받은 곽도엽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혹시 한 글자라도 놓친 게 없는지 종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래? 그런 거구만. 그런데 함정일지도 모르지. 이걸 어떻게 믿어?”

금정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백설지는 정면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짐짓 모르는 척 곽도엽에게 되물었다.

“그래? 네 생각엔 우릴 속이려는 것 같아?”

“이상하지 않냐? 저 아미파의 비구니나 사천당가나 전부 한통속인데, 왜 우리한테 사천당가의 계획을 말해 주냔 말이야.”

“그건 그러네. 왜 그런 거지?”

“우리가 이 소식을 듣고 저 위로 올라가면 거기에 함정을 파 뒀을지도 모르지. 아까 네가 진주언가랑 싸울 때도 아미파가 뒤를 노려서 백 대인이 나섰잖아?”

“네 말이 맞아. 의심스럽네.”

백설지가 의심스럽다고 말하자, 백설천이 곧바로 공격을 가할 것처럼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금정이 움찔 몸을 떨며 백설천을 극도로 경계했다.

백설천의 소매에는 아직도 아미파의 복호승들이 흘린 피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원망과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백설천을 노려보았지만, 먼저 손을 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우린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금정은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그럼? 왜 우리에게 이런 걸 알려 주는데?”

“……우리가 거기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을 텐데.”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우린 아미파를 안 믿을 거고, 지금 너를 살려 보낼 필요도 없을 텐데?”

백설지는 금정의 말투를 따라 했다.

얇은 죽립 너머로 그녀의 두 눈에서 붉은색 기운이 넘실넘실 흔들렸다.

제대로 알려 주지 않으면 너를 죽인다.

백설지의 말은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큭.”

금정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레 말했다.

“사천당가와 우린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흐음?”

“너희 왕진의 개들이 사천 땅을 헤집어 놓을 때, 사천당가는 그들과 손을 잡아서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야.”

“아아, 그런 거구나.”

“우린 너희에게 사매들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희가 사천당문을 공격한 다음의 일이다.”

백설지는 곽도엽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가만히 생각을 거듭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計)군.”

“손자병법?”

“그래. 손자병법 제삼(三)계. 우릴 써서 사천당가를 치겠다는 거지. 그 대상이 우리가 아니라 지들이랑 같은 정파의 일원이라는 건 좀 웃기지만.”

“비겁하네.”

백설지는 속내를 감추는 성격이 아니었다.

칼로 찌르듯 직설적인 표현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금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난 할 말을 다 했다.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금정은 마음을 정한 듯 결연한 표정이 되었다.

주먹을 거머쥐고 단호하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공격한다면 죽을 때까지 항전할 것이라는 기세가 느껴졌다.

“알았어.”

백설지는 순순히 그녀를 보내 주었다.

“가 봐. 믿든 말든, 그건 우리가 고민해 볼게.”

백설지의 대답이 의외였던 걸까?

금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왜, 왜? 날 죽이지 않는 건가?”

“왜? 죽고 싶어?”

“그건…….”

“우리가 널 왜 죽여야 되는데?”

“……적이니까.”

“그래? 그래도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 정보를 가지고 알려 주러 온 것 아니었어?”

“…….”

“그 말을 믿는다면, 지금 너를 죽이면 안 되지. 안 그래?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줬다며?”

백설지의 목소리엔 확신이 있었다.

그녀가 명확한 기준을 세웠기 때문이다.

선(善)이나 악(惡)과 같은 추상적이고 부정확한 기준이 아니라, 백설지가 스스로 정한 명확한 선이다.

“우릴 죽이려고 덤비는 놈들은 우리도 죽일 거야. 파벌 같은 건 상관없어.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린 살기 위해 싸우고 있을 뿐이니까.”

금정은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굳어졌다.

“우린…… 우리는…….”

“듣기 싫어. 가 봐.”

“…….”

“전장에서 마주치면 죽일 거야.”

백설지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젓자 금정은 그제야 쓸쓸히 몸을 돌려 떠나갔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죽음을 각오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욱 비참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이거 우리끼리 의견을 모아 봐야겠네.”

백설지는 마치 더러운 걸 만지듯이 서찰을 다뤘다. 금정이 주고 간 서찰을 손가락 두 개로 들고 그 안에 적힌 글자들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 보았다.

“서찰을 보면 악의가 느껴지긴 한데.”

“악의? 종이에서 그런 게 느껴진다고? 너 무당이냐?”

“무슨 소리야.”

곽도엽의 빈정거림을 백설지는 익숙하게 받아넘겼다.

“적혀 있는 말투가 그렇다는 거야. 내용에 우리가 사천당가를 좀 처리해 줬으면 하는 음습한 뜻이 숨어 있잖아.”

“멸진사태의 솜씨겠지. 무공은 강하지만 과격하고 꼴통이라던데.”

곽도엽의 말투는 신랄했다.

백설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 생각엔, 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무슨 근거로?”

곽도엽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백설지의 말에도 딴지를 걸었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도 말을 바꾸지 않았잖아. 오히려 믿지 않으면 너희가 손해라는 식으로 배짱도 부렸고.”

“그 정도로는 근거로 들기 부족한데. 저놈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한테 거짓 정보를 주려는 것일 수도 있지. 정파 놈들이 원래 그런 걸 잘하잖냐. 자신의 희생으로 모두를 살린다거나, 그런 ‘숭고한 일’을 해서 문파의 이름을 빛낸다던가.”

곽도엽은 경멸하듯이 말했다.

“그렇긴 하지. 근데 그런 거였으면 좀 더 우리가 그 말을 믿을 수 있도록 이런저런 근거를 댄다던가,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즉, 우리가 믿을 수 있게 노력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더욱 믿음을 줬다?”

“응, 바로 그거지.”

곽도엽은 이해가 빠른 사람이었다.

백설지의 말뜻을 알아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저 위선적인 아미파 년들의 말대로 움직이는 건 내키지가 않아.”

곽도엽은 아무래도 아미파에 대한 인상이 매우 나쁜 것처럼 보였다.

“위선적이든 진실되든 우리랑은 상관없잖아. 실리적으로 봐야지.”

“으음.”

“이 서찰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사천당가가 우리한테 독술을 펼치기 전에 미리 쳐 버리는 것도 좋잖아. 어쩌면 일이 수월해질 수도 있어.”

“하긴 수풀 속에 숨은 뱀은 가장 먼저 솎아내야겠지. 그런데 저 병신들은 우리의 전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는 것 같던데? 그러니까 아미파 따위가 백 대인한테 덤벼든 거 아냐?”

곽도엽이 백설천을 힐끔 쳐다봤지만, 그는 곽도엽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해?”

“장소를 알면 친다. 사천당문. 내가 다 죽이겠다.”

백설천은 동네 인근에 산책 나가듯 편안하게 답했다.

“사천당문을 다 죽이면…….”

“다 죽이면?”

“그럼 네가 편하게 지나갈 수 있겠지.”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줘서.”

“…….”

백설천은 말이 없었지만, 그가 기분이 좋다는 사실은 그의 몸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무형기로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백설천의 무형기는 마치 커다란 개의 꼬리와도 같다.

기분이 좋아지면 마음의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보기보다 단순한 사내인 것이다.

“크흠.”

심지어 곽도엽마저 그 사실을 알아채고 웃음을 꾹 참았다.

“그런데 이게 함정일 가능성도 포기할 순 없잖아? 다 같이 갔다가 함정이었으면 어떻게 해? 그럼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아예 없어지는 건데.”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흩어지자고?”

“응.”

백설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녀의 오라버니인 백설천이 지금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난 오라버니만 위로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천당가한테?”

곽도엽은 크게 놀란 듯 백설지와 백설천을 번갈아 쳐다봤다.

“으음, 분명 비사문 당금오도 저분한테는 안 될 것 같긴 한데……. 이보시오, 백 대인, 혹시 독공을 상대할 줄 아시오?”

백설천은 늘 그랬듯 곽도엽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백설지가 나섰다.

“오라버니, 독공과 싸울 수 있어?”

“독은, 내게 의미 없다.”

“그렇구나. 그럼 더 안심이네.”

백설지는 마음이 놓였다.

독이 의미 없다니.

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이야기인가.

“씨불, 내 말에는 대답도 안 해 주고…….”

“야, 우리 오라버니한테 말조심해.”

“젠장, 가족 없는 놈은 서러워서 원.”

곽도엽은 과장된 몸짓으로 툴툴거렸다.

“잘됐어. 우린 이곳에서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면서 적들의 동태를 살피자. 오라버니가 사천당문을 먼저 공격하고 돌아오면, 그때는 아미파와 진주언가가 쳐들어와도 각각 상대하면 돼.”

“만약 저쪽이 함정이 맞았다면?”

“오라버니는 알아서 뚫고 나올 거야. 난 알아. 그동안은 우리 때문에 싸울 때 방해가 되어서 오히려 제대로 못 싸운 거야. 아마 혼자 가면 제 실력을 발휘할걸?”

“……!”

백설지는 백설천의 어깨가 움찔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죽립 너머로 비치는 푸른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떻게 알았지?”

“뻔하지, 내 오라버니인데.”

“으음. 설지. 과연, 모르는 게 없다.”

“그 정도는 아냐. 그리고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면 알잖아. 지켜보니까 어때? 진주언가나 아미파에 내 상대가 될 만한 강자가 있었어?”

백설천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없다.”

“그렇지?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혹시 함정이라서 우릴 먼저 공격하거나 해도 내가 이길 테니까.”

백설지는 당당했다.

오만함이 아니라 자신감.

그녀는 정말로 진주언가든 아미파든, 그녀에게 덤벼들면 모조리 박살 내서 이길 자신이 충만했다.

“그런가.”

백설천은 백설지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다치지, 마라.”

“걱정 마. 북해에서처럼 하자.”

“북해. 그때처럼.”

백설천과 백설지는 서로를 보며 교감했다.

백설천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망설임이 없다.

한시라도 빨리 사천당문을 싹 다 정리하고, 백설지의 곁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잘 다녀와.”

백설지는 그런 백설천의 등 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혼기를 지닌 두 사람.

그들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순간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는 마지막 순간이 될 거라고는.

***

소호는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서 손바닥으로 명치 부근을 꾹꾹 눌렀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는 이곳 태행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계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만약 상대가 정말로 사흉이라면 무림 십대고수 수준을 뛰어넘는 무인이 필요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당가의 비사문과 진주언가의 붕산철권, 그리고 아미파의 멸진사태로 전력은 충분할까요?”

소호가 자신의 ‘천무삼보’로 그들을 평가해 본 결과, 비사문 당금오는 무림 십대고수의 아래가 아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당금오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해야 할 듯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호는 백설지의 곁에 있는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신수 중에서도 독보적인 힘.

소호는 솔직히, 당가와 진주언가, 아미파가 전력을 다해 달려든다 해도 정말로 그를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허헛.”

계현은 기꺼운 듯 웃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 시주는 늘 나를 놀라게 하는군. 아미타불, 하지만 걱정 마시게. 부처님의 은덕인지 모든 게 준비되었다오. 전력은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야.”

“대체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

소호는 곰곰이 생각을 떠올려 봐도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파 쪽이 열세였다.

사천당가에 정말로 엄청난 비기가 숨겨져 있는 그런 일이 아니라면, 백설지의 오라버니가 당하는 모습은 상상도 되질 않았다.

그런데 계현은 전력은 충분하다고 했다.

그건 그들 세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전력이 숨어 있다는 뜻일까.

“모르겠다. 우선, 할 일을 해야지.”

소호는 세 개의 관도가 하나로 합쳐지는 삼거리의 중심에 나와 있었다.

옥척협곡의 중심을 채우고 있는 강물이 잔잔하고 맑았다.

“거의 다 왔네.”

갈래로 갈라진 관도 끝에서 예상했던 두 개의 무리가 점점 가까운 장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미파와 진주언가.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 두 개의 세력이 소호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준비.”

소호는 붉은색 깃발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