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20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20)
옥척협곡을 올라가는 외길은 좁고 협소했다.
소호가 서 있는 곳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외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작은 언덕 너머에 백설지와 그 일행이 있을 것이다.
원래 비사문 당금오의 계획은 이러했다.
사천당가에서 백설지 일행에게 독공을 펼치고 나면, 당가의 신호수가 언덕 위로 올라와 깃발을 흔들 것이다.
소호가 할 일은 그 신호를 진주언가와 아미파를 향해 전달해 주는 일.
지금 당장 공격하라는 정보를 전달해서, 진주언가와 아미파가 퇴로를 차단하고 달려들게 만드는 역할이었다.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소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그의 손에 들린 붉은색 깃발이 의미 없이 펄럭였다.
‘뭔가 이상한데. 왜 아무도 안 올라와 있지?’
원래대로라면 사천당가의 사람이 올라와 있어야 할 장소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호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해질 녘이 다가오는 지금쯤이면 독공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 상황을 알릴 녹풍대 한 명이 소호에게 신호를 줘야 했다.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뭔가 일이 잘못되었구나!’
소호는 다급한 마음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는 진주언가와 아미파를 바라보았다.
진주언가는 붕산철권 언주명을 가장 앞세운 채 위풍당당하게 걸어왔고, 아미파 쪽은 금정을 앞세운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잠깐, 멸진사태는?’
가장 성격이 급한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미파의 인원도 본래보다 훨씬 적어 보였다.
“이런.”
때마침 건너 쪽 언덕에 미리 올라가 있던 대미미가 소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손바닥을 최대한 펼친 채 양손을 허공에서 좌우로 흔든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신호다.
소호는 진주언가와 아미파 사이의 거리를 살폈다.
“잠깐, 조금만 더. 더……. 조금만……. 지금!”
소호는 깃발을 아래로 내리쳤다.
휙―.
깃발이 떨어졌다.
진주언가와 아미파가 막 서로를 보며 인사를 나누려는 찰나 깃발이 떨어졌다.
그들은 깜짝 놀라더니, 허둥지둥하다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주언가의 비호잠영보와 아미파의 신행미종보가 동시에 펼쳐졌다.
마치 벌집에 돌을 던진 것처럼, 순식간에 훨훨 날아오른 무인들이 매서운 기세로 협로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
그 순간 소호의 반대쪽 언덕 위에서 바위가 쪼개지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진주언가와 아미파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위를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소호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협곡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발밑이 흔들린다.
소호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반대쪽 언덕에서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커다란 돌멩이들과 수만 근의 흙더미가 해일처럼 밀려 내려왔다.
압도적인 자연의 힘은 보는 사람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의 상황이 그랬다.
태행산의 한쪽 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광경은 그 누가 보더라도 압도될 만큼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 시작을 미미가 했다는 게 더 놀랍지만.’
소호가 대미미에게 가능한지 묻고 부탁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비탈면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지.
분명 가능할 거라고 믿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그 광경을 직접 눈앞에서 보니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길만 막으면 된다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상상 이상의 결과다.
대체 무엇을 했을까?
바위를 뽑아서 던졌을까?
아니면 발을 굴렀는데 비탈이 무너지기 시작한 걸까?
‘대단하다, 미미야. 정말 잘했어.’
소호가 바라던 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옥척협곡의 입구는 완전히 막혔다.
산사태가 한 번 일어나면서 끝난 게 아니라, 토사가 무너져 내리고, 그걸로 인해 주변의 비탈길도 모두 위험한 사지(死地)로 변해 버린 것이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소호는 백설지 일행이 있을 만한 곳으로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쳤다.
길은 막았지만, 앞으로 백설지 일행을 구해 내서 사천당가까지 피하려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간다.’
소호는 마치 한 마리 새처럼 협곡 위를 달려나갔다.
***
“소저, 소저는 정말로 사람이오?”
방금 전에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한 패원강은 그야말로 기함(氣陷)하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장담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수많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놀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이다.
꾸우웅―.
“뭐라고요?”
대미미는 어깨 위로 뽑아 들었던 거대한 나무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것은 거대한 노송이었다.
두께는 성인 남성 세 사람이 양팔을 최대한 벌려도 모자랄 만큼 두꺼웠고, 노송에서 뽑혀 나온 뿌리 하나만 해도 한 사람의 몸통만큼 굵었다.
그녀가 노송을 내려놓자, 머리 위에서 솔방울과 솔잎이 우수수 쏟아졌다.
노송의 주름진 껍질에 한 쌍의 손자국이 선명했다.
대미미는 얼굴에 묻은 솔잎들을 투박하게 털어내며 말했다.
“미안해. 근데 너를 뽑는 것밖에 방법이 없더라.”
노송에게 말을 거는 괴력의 여인이라니.
패원강은 멍하니 굳어진 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대미미는 발로 땅을 툭툭 차서 커다란 구멍을 만들더니, 거기에 나무뿌리를 반쯤 도로 심어 놓는 기적까지 선보였다.
“자아. 이 정도면. 어어?”
대미미가 나무를 고정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자, 갑자기 지반이 흔들렸다.
우르릉―.
모두가 숨도 멈춘 채 굳어 있길 잠시.
흙더미가 옆으로 우수수 밀려 내려갔다.
대미미가 붙잡고 있던 나무만 무사했을 뿐, 그 옆의 지반이 통째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으아악!”
“산사태다!”
“피해! 피해라!”
멀리 떨어진 아래쪽에서 울려 퍼진 비명 소리가 언덕 위까지 전해졌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패원강은 물론이고 대미미도 아무런 말이 없다.
그녀는 잠시 굳어 있다가, 나무를 조심스레 세워 둔 채 뒤로 물러났다.
“으음, 이 정도면 됐겠죠?”
패원강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괘, 괜찮을 것 같소.”
“왜 그렇게 굳어 있어요?”
“그런 걸 보면 누구나……, 으음, 소저, 소저는 놀랍소. 정말 나랑 같은 사람이 맞소? 혹시 항우의 후예인 거요?”
“항우요? 저는 대씨예요.”
“대씨……, 대씨 중에 누가 유명했었지……?”
“나는 우리 아버지밖에 몰라요. 그보다 이제 여긴 다 됐으니까 다음 장소로 가요.”
“거기서도 지금처럼 소저가 산사태를 일으킬 것이오?”
“왜요? 패 소협이 하게요?”
“원래는 그러려 했는데, 나보다 소저가 낫소. 소저가 하는 게 좋겠소.”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이런 말은 처음인데.”
패원강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내가 무용지물로 느껴지게 만든 건 소저가 처음이오.”
“그래요? 천무련에서 계속 그러면 안 되는데.”
패원강은 나름 극찬을 한 건데, 대미미의 반응은 그저 천무련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소저는 대단하다는 이야기요. 아름드리 노송을 그냥 두 손으로 뽑더니 지반을 탈탈 털어 버릴 줄을 그 누가 상상이나…….”
“됐어요. 일단 가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눈에 띌지도 몰라요.”
졸지에 말문이 막혀 버린 패원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대미미는 그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저 멀리 소호가 날 듯이 협곡을 달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빠르네.’
백설지를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소호.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지만, 대미미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다음 장소로 묵묵히 이동했다.
***
“온다.”
두툼한 천을 바닥에 깔고 조용히 앉아 있던 백설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양손과 양팔을 조금씩 비틀어서 온몸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후우.”
호흡을 한 번 내뱉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극한의 빙백신기가 순식간에 대주천을 이루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숨결이 허공에 뿌연 입김을 만들어 냈다.
보석처럼 푸른 두 개의 눈동자가 강한 빛으로 번뜩였다.
고오오―.
백설지는 견고한 무형기를 온몸에 두른 채 한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멀리 협곡 너머, 가파른 돌 비탈길을 달려 비조처럼 날아드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휘리리릭―.
회색의 승복을 입은 비구니들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려앉았다.
선두에 서 있는 멸진사태를 시작으로, 그녀가 함께 온 스무 명의 복호승들은 아미파에서도 최정예의 무인들이다.
짤랑―.
그녀들이 들고 있는 선장에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멸진사태의 눈빛이 얼음보다도 싸늘했다.
“역시 자리를 비웠군.”
마치 백설천이 없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백설지는 피식 웃었다.
“역시 찾아왔네.”
“호오,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더냐?”
“아까 왔던 비구니는 솔직했어. 그런데 죄지은 것 같은 분위기였어.”
멸진사태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금정, 이 못난 것.”
“왜 그 사람을 욕해?”
“뭐라?”
“못난 건 당신이잖아, 늙은이. 차도살인지계를 써 놓고, 그것도 모자라 빈집을 털어먹으려고 들어온 도둑.”
백설지는 하체를 살짝 굽혔다.
무게중심을 낮추고, 유연하게 뻗은 양손으로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백설지는 전투를 준비한 뒤, 도발하듯 멸진사태를 비웃었다.
“오라버니가 어지간히 무서웠나 봐?”
“이년.”
쿵.
멸진사태가 선장으로 땅을 내리찍자, 바닥에 있던 돌멩이가 쩍― 하니 갈라졌다.
“곧 죽어 나자빠질 것이 입만 살았구나.”
“내가 아는 비구니는 다 착했는데.”
“우리도 너 같은 악인이 상대가 아니었다면 선하게 대했으리라.”
“거짓말이잖아.”
백설지는 혀를 찼다.
“보면 알아. 고집불통, 욕심쟁이, 비겁자.”
“흥, 더는 말을 섞을 필요가 없겠군.”
멸진사태의 수신호에 따라 스무 명의 복호승들이 백설지의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복마진을 펼쳐라!”
“예!”
아미파의 복호승들은 확실히 멸진사태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육, 육, 팔.
도합 스물이 되는 세 개의 조로 나뉜 그들은,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갔다.
짤랑― 짤랑―.
그들의 선장에 달린 방울들이 묘한 소리를 내며 백설지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시끄럽네.”
백설지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대각선 방향 풀숲에서 날아든 단도가 복호승 한 명의 등에 꽂혔다.
“아악!”
그 복호승은 온 신경을 백설지에게 쏟고 있었던 터라, 의외의 기습을 피하지 못했다.
풀숲 사이로 죽립을 쓰고 허리가 꼽추처럼 굽은 인영이 언뜻 나타났다가 다시 몸을 숨겼다.
피슉―.
또다시 단도가 날아왔지만, 이번엔 대비하고 있었던 터라 복호승이 단도를 쳐서 튕겨 냈다.
“방수가 있었나! 너희 둘은 저놈을 쫓아라!”
멸진사태가 고른 두 사람이 곽도엽을 쫓아 몸을 날렸다.
파라락―.
경지에 오른 신행미종보였다.
한 쌍의 학처럼 날 듯이 움직인 그들이 풀숲으로 파고들었다.
후우웅―.
백설지가 움직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시 복마진 진형이 흐트러진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린 것이다.
신형을 뽑아 올리는 동작은 느릿했는데, 백설지는 한순간에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허공에 원형을 그리는 태극의 투로.
터엉!
복호승 한 명이 선장을 붙잡은 채 뒤로 튕겨 나갔다.
아미파도 장법을 논하자면 어디 가서 빠지는 문파가 아니다.
대복마불장(大伏魔佛杖), 녹옥장(綠玉掌), 불광보조장(佛光普照掌), 표설천운장(飄雪穿雲掌)까지.
아미파를 유명하게 만든 무공 중에는 적수공권에서 펼치는 화려하고 미려한 장법도 수없이 많았다.
파라라락―.
아니나 다를까.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던 복호승은 자신의 장기인 표설천운장을 펼쳐 허공에 수많은 장영(掌影)을 만들어 냈다.
하나하나가 위협적인 모습.
그중에 하나라도 몸에 닿는다면, 제아무리 백설지라도 버티기 힘들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우우웅―.
백설지의 눈이 번뜩였다.
붉은색 기운이 일렁인다.
마치 꽃을 피우듯 그녀는 양손을 반 바퀴 회전했다.
그리고 나란히 세워서 양손을 뻗은 장타 일수.
“빙백신장.”
뻐어엉!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곧바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