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72화 (501/686)

15권 21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21)

표설천운장을 펼쳤던 복호승은 장법을 전개하기 위해 팔을 뻗은 자세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뻣뻣하게 굳은 몸.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고, 입에서는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넘쳤다.

쩌저적!

복호승의 손끝에서부터 새하얀 서리가 끼더니, 그녀가 바닥을 나뒹굴 때쯤에는 이미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으악!”

“윽!”

양옆에서 빙백신장의 여파에 휩쓸린 자들조차 몸에 달라붙는 서리를 떼어내기 위해 손으로 자신의 몸을 마구 두드려 댔다.

확― 하고 서늘한 기운이 주변을 잠식했다.

“후우우.”

백설지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온다.

화창한 햇볕이 피부를 태울 듯 내리쬐고 있었으나, 그녀의 주변만큼은 한겨울의 빙산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디서 사술을!”

분기탱천한 멸진사태가 몸소 나서서 백설지에게 달려들었다.

짜르릉―.

묘한 방울 소리와 함께 멸진사태의 선장이 강맹한 기세를 품고 날아들었다.

“번천!”

번천육합공(飜天六合功).

육 합의 묘리로 퇴로를 차단하고, 하늘을 뒤집듯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막강한 봉술이다.

아미파의 절기가 백설지의 빙백신기를 묵직하게 밀어냈다.

‘빈틈이 없네. 잠시 호흡을 고르자.’

백설지는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확실히 나이와 경험은 무시할 수 없다. 멸진사태의 무공은 완성되어 있었다.

보법, 호흡, 무형기의 견제.

모든 것의 균형이 적절했다.

‘하지만, 그래도 완벽한 건 아냐.’

억지로 반격할 틈을 찾는 것은 무리지만, 공격을 피하고 막아 내기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터엉!

백설지는 태극권의 묘리를 살려 선장을 밀어냈다.

백설지는 금계독립의 자세로 한쪽 다리만을 세운 채 손끝으로 선장을 쳐 냈다.

푸확!

방향이 비틀린 번천육합공이 애꿎은 허공을 후려쳤다.

펑, 하고 터져 나간 공기가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핫!”

백설지는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충격을 해소하고, 차분하게 몸을 다시 낮췄다.

그 자세에 빈틈은 없다.

멸진사태의 눈꼬리가 표독스럽게 치솟았다.

“감히! 악적 주제에 무당의 무공을!”

무당의 태극권을 알아보았는가.

멸진사태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백설지는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녀가 익힌 빙백신공은 오랜 세월 이어진 북해의 신공이었다.

순식간에 거친 마음이 가라앉고 온몸에 빙백신기가 휘돈다.

백설지의 움직임이 민활해지니 정작 당황한 것은 멸진사태다.

“이년……!”

으르렁거리는 듯한 위협.

멸진사태는 양손으로 잡고 있던 선장을 한 손으로 잡더니, 갑자기 왼손으로는 장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퍼어엉!

수십 개의 장영이 허공을 수놓았다.

멸진사태의 장력에 얻어맞은 노송 한 그루가 솔잎을 사방으로 털어내더니,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지며 쩍! 하니 쪼개졌다.

‘위력이 엄청나네.’

백설지도 내공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거늘.

확실히 아미파의 최고수를 자처하는 자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피슉―.

쪼개진 소나무에서 날아든 뾰족한 조각들이 백설지의 죽립을 스치고 지나갔다.

격렬한 움직임을 이기지 못하고, 안 그래도 흔들거리던 죽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와 푸른색 보석 같은 눈동자가 왼쪽만 드러났다.

“색목인?”

멸진사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웃었다.

“근본도 없는. 그럴 줄 알았다.”

손속이 더욱 잔혹해진 것은 기분 탓일까.

백설지는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음을 느꼈다.

사방을 잠식한 장영 사이로 번천육합공이 묵직하게 밀고 들어왔다.

백설지는 땅을 박찼다.

파라라락―.

소매가 떨리고, 그나마 일부가 남아 있던 죽립이 완전히 벗겨졌다.

백설지는 땅에 내려서는 과정에서 양쪽에서 달려드는 복호승들의 공격을 받았다.

터텅!

퍼퍼펑!

“으악!”

“윽!”

절정을 넘어선 초절정 무인들의 대결이다.

아무리 진법을 구성하는 복호승 정예 무인이라 해도 끼어들 곳이 있고 끼어들어선 안 되는 곳이 있는 법.

백설지가 가볍게 뿌리친 일 장에 두 명의 복호승이 울컥 각혈을 토해 내며 튕겨 나간다.

쒜에에엑―!

멸진사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선장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백설지는 양손을 모았다.

손바닥 밑 장저를 붙이고, 손가락으로 짐승의 이빨을 형상화했다.

“용생.”

백설지의 두 눈에서 혈광이 치솟았다.

새하얗고 긴 손가락에 짐승의 발톱이 자라나듯 새빨간 강기가 뒤덮인다.

“흡!”

아미파 모두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헛숨을 삼키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영락없이 겁에 질린 모습.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공포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갈!”

이 순간, 오직 멸진사태만이 강력한 의지로 공포를 이겨 냈다.

그녀는 전신에 은은한 회백색의 불광보조(佛光普照)를 두르고 왼손으로 기묘한 수인을 맺었다.

순식간에 다섯 종류의 손 모양이 반복적으로 교차했다.

멸진사태가 수인을 마쳤을 때 그녀의 왼손에는 불광보조의 빛이 진하게 모여 있었다.

꼿꼿하게 세운 손바닥 위로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올라탄 듯 보였다.

쩌어어엉!

“……!”

백설지의 용아와 멸진사태의 왼손이 어느 한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허공에서 강맹하게 충돌했다.

주변의 복호승들이 귀를 틀어막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촤아악―!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멸진사태의 손등 위로 열 줄기의 자상이 새겨졌다.

깊지는 않다.

피륙의 상처.

피가 좀 흐르긴 하지만, 근맥이 다칠 정도는 아니었다.

“후하핫!”

멸진사태는 희열에 차서 웃었다.

뒤로 튕겨져서 바닥에 길게 족적을 남겼음에도, 그녀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줄 알았지. 그 힘이 사악한 힘일 줄 알고 있었다! 불심 가득한 불광보조와 항룡모니인(降龍牟尼印)에 막히다니. 이년! 너는 마공을 익힌 마인이 분명하다!”

멸진사태는 선장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녀는 양손으로 수인을 맺고 한층 더 불광보조에 집중했다.

회백색 빛이 점점 은은한 황색을 띄기 시작했다.

터어엉!

멸진사태는 땅을 강하게 박차고 뛰쳐 올랐다.

강하고 묵직한 기세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멸진사태의 특기였다.

‘신수의 힘은 불광에 제압되는 건가? 확실히, 반탄력이 다르긴 했어.’

백설지는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마공이야?”

백설지는 유능제강(柔能制剛)에 능하다.

그녀는 용아를 풀지 않은 채 빙백신공을 한층 더 끌어 올렸다.

유함이 강함을 제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함이 전혀 없는 유함은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

빙백신기를 토대로 한 강력한 내공.

그리고 손끝으로 그려 내는 태극의 문양!

피이잉―.

백설지의 좌수가 허공에 부드러운 반원을 그렸다.

서로가 서로를 극도로 의식하는 상황.

마치 멈춰 있는 듯했던 백설지의 손끝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며시 흔들렸다.

아니.

흔들리는가 싶더니 작게 원을 그리고, 팔목은 그와는 반대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멸진사태는 그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초절정 고수의 감각조차 혼란시키는 손놀림이다.

후우웅―.

백설지가 자신의 눈앞에서 그려 낸 커다란 타원형의 투로 속에 멸진사태의 항룡모니인의 장력이 갇혔다.

꿈틀거리는 막강한 힘이 갈 곳을 잃고 요동치다가 펑! 하고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백설지의 긴 머리카락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끊임없이 손끝으로 원을 그렸다.

멸진사태는 계속해서 장력을 쳐 내고 있었다.

땅이 터져 나가고, 애꿎은 노송이 뿌리를 드러냈다.

복호승들은 두 사람의 힘의 파편에 얻어맞지 않기 위해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멀리 떨어졌다.

일순간에 수십 합을 겨룬 두 사람은 서로의 무공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항룡모니인은 강력하지만 투로가 단순하여 백설지를 제압할 수 없다.

그 사실은 백설지도 알고 멸진사태도 알고 있었다.

변화를 준 건 멸진사태가 먼저였다.

파파파파팡―.

멸진사태는 몸을 비스듬히 꺾으며 손바닥의 움직임을 변화시켰다.

표설천운장이다.

허공에서 눈이 내리듯, 수십 개의 장영이 사방을 혼란스럽게 채우는 그 순간.

쩌엉!

“……!”

백설지는 바로 그 순간 움직였다.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수십 개의 장영을 헤치고 올라간 백설지의 용아가 멸진사태의 양손을 붙잡았다.

“흡!”

멸진사태는 경악하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

힘으로야 약해도, 자신이 무공의 깊이에 있어 약관의 여인 따위에게 지겠냐는 오만함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별거 아니야.’

백설지는 명경지수처럼 차분했다.

그녀가 무산학관에서 매일같이 만나 추수로 손놀림을 훈련한 상대가 누구던가?

천무공자.

장소호.

세상에 모르는 무공이 없으며, 한 번 본 무공은 두 번째엔 익히고, 세 번째엔 조문을 파훼한다는 인재다.

그런 장소호와 육 년을 매일같이 함께 단련했다.

장법 대결.

손놀림을 겨루는 추수.

이제 백설지는 달인이라 할 경지에 올랐다.

이미 몇 번이나 봐 온 아미파의 표설천운장은 누더기 천처럼 허점투성이로 보일 뿐이다.

터엉!

백설지는 자신의 용아에 잡힌 멸진사태의 손에서 반탄력을 느꼈다.

단단한 쇳덩이를 잡은 듯한 감각.

용아 강기를 강맹하게 밀어내는 척력(斥力)이다.

후우우―.

백설지는 양발을 땅에 단단히 내딛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전신을 휘도는 빙백신기.

그 모든 힘이 그녀의 손바닥 노궁혈을 통해 뿜어져 나갔다.

“백룡아(白龍牙).”

화아아아악―!

항룡모니인의 불광보조가 집혼기의 힘은 막아 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빙백신기는 아니었다.

멸진사태의 팔에 새겨졌던 상처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폭풍처럼 온몸을 휩쓴 빙백신기가 멸진사태의 몸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쿠학!”

멸진사태는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다가 피를 토했다.

극한의 빙백신기가 폐부까지 파고든 상황이다.

주름진 얼굴에서 생기가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파랗게 질린 채 덜덜 떨리는 입술.

그나마 물러나면서도 끝까지 백설지를 경계했지만 이미 승부는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져 있었다.

“이, 이럴 리가…….”

“늙은 비구니.”

백설지는 차갑게 웃었다.

“너무 오만했어.”

콰직!

백설지의 용아가 멸진사태의 복부를 꿰뚫었다.

“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멸진사태를 바닥에 쓰러뜨린 뒤 빙백신기를 뿜어 그녀의 우반신을 땅바닥에 얼려서 붙여 버렸다.

“세, 세상에!”

“사숙을 구해라!”

놀란 복호승들이 벌 떼처럼 달려든다.

백설지는 싸늘하게 눈을 빛내며 그들을 맞이했다.

“덤벼드는 자는 다 죽일 거야.”

백설지의 경고를 귀 담아 듣는 자는 아무도 없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복호승들을 보며, 백설지의 양손에서 용아가 번뜩였다.

“끄으……, 죽여라……! 이년……, 아미를……, 복호승을 죽였으니……. 너도 편히 죽진……, 못할 것이다……!”

멸진사태는 복부가 뚫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로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초절정을 넘어선 무인다운 끈질긴 생명력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독한 단점이 되었다.

“후우, 어차피 사람은 편히 죽지 못해.”

백설지는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사방이 피바다였다.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달려든 복호승들은 애초에 백설지의 삼 초식을 버티기도 힘든 자들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멸진사태뿐.

두근!

“윽.”

갑자기 많은 혼백의 힘을 집어삼킨 집혼기가 뜨거운 기운을 피처럼 울컥울컥 뿜어대고 있었다.

백설지의 두 눈에 혈광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이건 왜……?”

그때였다.

마치 하늘조차 당황한 것처럼 강한 바람이 주변의 수풀을 뒤흔들었다.

백설지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쪽으로 향했다.

멸진사태가 있는 쪽이 아니다.

정반대.

본래대로라면 가파른 절벽밖에 없어야 할 방향에서, 홀연히 나타난 한 사내가 백설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

백설지는 길고양이처럼 극도로 그 사내를 경계했다.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다.

멸진사태나 아미파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공의 경지가 읽히지 않는 수준.

그녀의 오라버니, 백설천을 적으로 마주한 것 같은 압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육모담.”

거구의 사내.

넝마처럼 허름한 옷을 입은 야인(野人)이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얹으며 나직하게 물어 왔다.

“묻겠다. 너는 신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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