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73화 (502/686)

15권 22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22)

육모담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백설지의 속내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천천히.

육모담의 시선이 백설지의 얼굴에서 가슴 부근으로 내려온다.

그는 옷 속에 감춰둔 집혼기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흠, 물을 필요도 없었군.”

육모담의 검이 뽑히는 소리는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스릉―.

연분홍빛의 매화검이 새벽안개처럼 서늘한 예기를 흘렸다.

‘하긴 당연히 알아보겠지. 내 눈에도 보여. 엄청나게 큰 나무 같은 무형기……! 무시무시한 힘이야. 사람을 얼마나 죽인 거지?’

백설지는 북경 자금성에서 마주쳤던 초월적인 강자를 떠올렸다.

무쌍귀 장기린.

그를 처음 봤을 때와 비견할 만한 충격이었다.

“이상한 일이군. 난 신수가 되려는 자가 사내인 줄 알았는데. 여인이었던가.”

육모담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냉정을 회복했다.

“잠깐……!”

백설지는 양 볼이 상기된 채 거칠게 들썩이던 숨을 가라앉혔다.

아직 ‘소화’가 다 되지 않았다.

방금 죽은 아미파의 혼백들이 집혼기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심혼을 뒤흔들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있나? 무엇이지? 설마 이런 상황에……, 신수가 아니라고 말할 작정인가?”

육모담은 돌같이 완고한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백설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지금 그녀의 주변에는 아미파 복호승들의 시신들이 늘어져 있다.

오늘 흘린 피만 따지더라도 무림 강호에선 살성(殺星)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도 할 말이 없을 터.

백설지는 자신이 더 이상 입을 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미 틀렸구나. 오라버니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

지금쯤 백설천은 사천당가와 싸우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가 돌아올 거라 믿는 건 어리석거나, 지나치게 낙천적인 사람일 것이다.

백설지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사냥꾼.

전사.

북해의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을 받으며 태어난 그녀는 눈앞의 난관을 스스로 헤쳐나갈 용기가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난 신수가 될 거야.”

우웅―.

호흡 한 번에 차가운 빙백신기가 강맹한 기세로 대주천을 이루었다.

“후우.”

입으로는 새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푸른색 눈동자를 빛내는 그녀의 기세는 결연하고 강직했다.

“허어.”

그에 대한 감탄인가.

육모담이 조금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보일 때였다.

땅바닥에 누워 있던 한 사람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면서 발작하듯 소리쳤다.

“오매검마! 아니, 오매검협!”

육모담은 백설지에게 검끝을 겨눈 채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뵙소. 멸진사태.”

“쿨럭, 크으, 마도에 빠졌다더니……! 헛소문이었구나. 바로 맞혔다! 저년이 바로 강호의 악적, 왕진의 신수다!”

내공은 흩어졌고, 빙백신기에 휩쓸린 우측 반신은 불구가 된 거나 마찬가지인 멸진사태였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것인지.

멸진사태는 째지는 목소리로 백설지의 죽음을 종용했다.

“찢어죽일 년이다……!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사술까지 쓴다. 당장 죽여야 해!”

“사람을 얼어붙게 만든다?”

육모담은 멸진사태의 말을 그리 신경 써서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건 북해의 무공이오. 극한의 설맥(雪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빙백신기를 몸에 받아들이는 무공이지. 중원의 기준으로는 기공(奇功)이긴 하나, 사술은 아닐 거요.”

“그,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저 시신들을 보아라. 우리 정파의 기둥. 복호승들을 저렇게나……! 저렇게나……!”

“됐소. 어차피 저 여인은 내가 마무리해야 할 일. 멸진사태는 물러나 있으시오.”

다소 거친 말투였으나, 육모담의 목소리엔 감히 따져 묻지 못하게 만드는 사나운 예기가 담겨 있었다.

“다시 소개하마. 난 육모담. 화산에서 검을 익혔다.”

육모담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고.

“통성명은 하고 싶지 않아. 당신도 신수잖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너는 신수가 될 수 없다.”

“왜?”

“이 길은 잘못되었어.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마지막 신수가 될 것이다.”

육모담은 굳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여인을 베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었으니, 이는 내가 처리해야 할 업보이기도 하다.”

휙―.

육모담이 검끝을 살짝 흔들었을 뿐인데, 온 사방에 매화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백설지는 대경하여 한 발자국을 물러났다.

눈앞에서 피어났던 매화꽃이 얼마나 생생한지, 그 냄새가 코끝에서 느껴지는 듯하지 않은가.

“악연은 여기서 끊겠다. 오라.”

선수에 대한 양보는 그나마 육모담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정파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인지.

“후우.”

백설지는 양손을 모았다.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와 싸워 살아남아야 하다니.

불합리하고 억울하다.

하지만 백설지는 하늘을 원망하진 않았다.

‘오라버니. 그냥 함께 있을 걸 그랬나 봐. 괜히 자만했네. 이런 자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정파 무림도 센가 봐.’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그녀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보며 자신의 천명이 이곳에 있음을 느꼈다.

문득 마지막으로 만나고 온 천무련의 청년이 떠올랐다.

‘소호.’

백설지는 이를 악물었다.

집혼기에서 나오는 모든 힘을 아낌없이 개방하며,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용생.”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돋아나는 용의 이빨.

한 마리의 용이 된 백설지와 화산의 거목이 이 순간 격렬하게 부딪쳤다.

***

파라락―.

바람에 떨리던 소매에서 소리가 잦아든다.

가파른 비탈길을 날 듯이 달려가던 소호는 본능적으로 속도를 늦췄다.

시야가 한 곳에 고정된다.

언덕 너머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소호가 익히 알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육 대협.”

소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매검마 육모담.

이곳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대체 왜? 왜 여기에 있지? 육 대협이 저쪽에서 오는 이유는 또 뭐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알 수 없는 예감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계획이 망가졌다.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 나가기가 힘들었다.

“왔나.”

육모담의 반응은 담담했다.

지친 얼굴이었다.

그는 속세를 초월한 듯한 허탈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허름한 피풍의가 갈기갈기 찢어져 바람에 흔들렸다.

“천무공자.”

소호에게 가까이 다가온 육모담은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도인가?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소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묵묵히 지나쳐 갔다.

“육 대협?”

소호는 그 순간 코를 찡그릴 정도로 강한 피 냄새를 맡았다.

불안했다.

술렁이는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아.”

육모담은 소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검을 두고 왔군. 이것도 인연일 것이니 그 검은 그대에게 주겠소.”

“육 대협,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천무공자, 무림 강호를 잘 부탁하오.”

육모담이 점점 멀어진다.

마치 모든 것을 끝낸 것처럼.

담담한 뒷모습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서 멀어졌다.

“설마.”

육모담은 무엇을 원했던가?

무엇을 성취했나?

어찌하여 그는 지금 소호에게 무림 강호를 부탁하는가?

“아냐. 설마.”

소호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다는 예감.

그의 가슴을 술렁이게 만드는 이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면 어서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소호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가 싶더니 언덕을 향해 전력으로 쏘아졌다.

아흔아홉 개의 좋은 일을 계획하면 무엇 하는가.

하나의 우연이 소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지 선배의 오라버니가 있잖아. 무시무시한 남자. 여기에 있는 정파 무림인 모두가 덤벼도 승부를 알 수 없는 그 괴물이 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거야?’

소호는 거세게 울리는 심장만큼이나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안 돼.”

소호는 언덕 꼭대기를 넘자마자 그가 향해야 할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주변은 마치 황군이 둘러싸고 포격이라도 퍼부은 것처럼 난장판이다.

돌덩어리나 다름없었던 땅바닥은 여기저기가 파헤쳐진 채 황갈색 속살을 드러냈고, 하늘을 가릴 만큼 무성했던 노송들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허공에 덩그러니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졌다.

거인들이 싸운 것 같은 난장판 속.

소호는 우뚝 멈춰섰다.

숨을 들이켜자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육모담에게서 나던 것과 비교할 수도 없게 진한 혈향에 코가 저릿저릿했다.

소호는 지금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음은 이미 거친 풍랑에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처럼 불안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다른 시신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비구니. 아미파.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설지 선배.”

목소리가 떨렸다.

소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앞에 주저앉았다.

울컥.

피투성이로 나무에 기대어 있던 백설지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녀가 쓰고 있던 죽립은 다 부서져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황금 같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 채 옆으로 흘러내렸다.

새하얀 얼굴.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이젠 예전처럼 총명하게 빛나지 않는다.

“소……호?”

떨리는 목소리.

그녀는 두 눈에 초점이 안 잡히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아…….”

소호는 목이 메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린아이였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설지의 모습은 처참했다.

어깨뼈가 보일 만큼 큰 상처를 입었고, 허벅지는 관통당했는지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상처는 복부의 관통상이다.

하얀 검신에 연분홍빛 매화 문양이 새겨진 검.

육모담의 것으로 보이는 매화검이 백설지의 복부를 관통한 채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이걸……, 이걸 어떻게 해야…….”

수백, 수천 개의 무공을 한눈에 익히고, 파훼할 줄 알면 무엇 하는가.

천무삼보라는 이름만 거창한 재능이 있으면 무엇을 하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소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전 상인이나 산골의 농민과 하등 다를 게 없는 그저 무력한 한 남자일 뿐이다.

“됐어. 괜찮아.”

백설지의 말이 소호를 따스하게 감싼다.

목소리에는 힘이 없지만,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그녀의 의지는 단단했다.

“구하러 왔어요. 저기, 협곡을 무너뜨리고 길을 막았는데……, 아미파랑 진주언가는 막았으니, 사천당문만 피해서 절벽을 넘어가려 했는데…….”

“괜찮아.”

“도대체 왜……, 선배 오라버니는 어디 간 거예요? 왜 여기서 육모담에게 당했어요? 대체 왜…….”

“내가 약했어.”

상처 입은 늑대처럼.

백설지는 약해져 있었으나 긍지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꼿꼿이 고개를 세운 그녀의 눈빛은 당당했다.

“졌어……. 그뿐이야.”

“설지 선배…….”

“이렇게 볼 줄은 몰랐어……, 마지막은……, 이렇게는…….”

백설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소호는 엉금엉금 기듯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짙은 혈 향 때문에 가려져 있던 연한 백합 향이 났다.

소호는 그 냄새를 맡자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철없던 열두 살 시절.

무공에 대해 상담하기 위해 처음 기숙사를 찾아갔던 때가 엊그제 같거늘.

얼음에 금이 간 것처럼 늘 미미하게 웃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서로 간에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네 아이를……, 갖고 싶었는데…….”

떨리는 입술.

긴 속눈썹 아래 푸른색 눈동자가 점점 빛을 잃어 간다.

“나는……, 나도…….”

소호는 정신없이 더듬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던 와중에 그의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피 묻은 손으로 건네주는 것.

분명히 차가운 금속일진데, 살아 있는 것처럼 온기가 있는 장신구가 소호의 손에 쥐어졌다.

두근.

소호는 그 물건이 손에 닿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약동하는 것을 느꼈다.

소름이 쭈뼛 돋는다.

가슴속에 뜨거운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깊은 격정이 소호의 심혼을 뒤흔들었다.

“네가 가져.”

백설지는 처연하게 웃었다.

이제는 필요없다는 듯이.

그녀가 목에 걸고 있던 집혼기를 소호의 손에 쥐어 준 것이다.

“나는…….”

소호가 울컥 목이 메왔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린다.

소호가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자,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한 사람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다 들었다…! 천무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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