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23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23)
소호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멸진사태.”
“처음부터…… 후훗, 의심스럽다고 생각했지……! 한패였어. 천무공자라는 자는 배신자다. 사흉의 잔당인 저 악적 년과 한패였다……!”
몸의 절반이 급하게 얼었다가 녹으면서 극심한 동상을 입은 멸진사태는 참혹한 몰골이었다.
그녀의 한쪽 눈은 시력을 잃고 허옇게 죽어 버렸다.
새카맣게 죽어 가는 피부가 당장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너덜거린다.
멸진사태는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아귀 같은 모습으로 소리쳤다.
“배신자! 이제부턴 내 말을 잘 들어라. 앞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네가 악적 년과 붙어먹은 배신자라는 것을 강호 무림에 다 알릴 것이야!”
소호는 잠시 고개를 돌려 멸진사태를 바라봤다.
멸진사태는 웃고 있다.
하나뿐인 눈을 교만과 아집으로 빛내면서, 마지막 순간에 역전의 동아줄을 잡은 그것처럼 희열에 차서 기뻐하고 있었다.
“당신 말을 들으라고?”
“그래! 이제 네 명성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야!”
“뭘 원하지?”
“오매검마 놈……! 그렇게 강하면서 훌쩍 떠나 버리다니. 잘됐다. 우리 아미파는 잃었던 명성을 찾아야겠어……!”
“명성?”
“이번 일. 다 우리 아미파의 공이다. 우리의 희생을 보아라. 쓰러진 사람들은 다 우리 아미파의 아이들이야!”
소호는 냉소를 머금었다.
백설지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는 점점 빛을 잃어 가는 가운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그렇군.”
“저년은 우리 아미파가 죽인 것이다. 너는 그저 마지막에 도착했을 뿐이야.”
“사흉을 쓰러뜨렸다는 명성을 얻고 싶나?”
“물론!”
“정파……. 정파란 무엇이지? 협과 도의를 지키는 게 정파 아니야? 명성을 좇는 게 정파야?”
“흥, 여전히 철없는 소리. 왕진 놈이 우리를 일깨워 주었다. 힘이 없는 정의는 아무것도 아니야. 신니께서 쓰러지면서 실추한 우리 아미파의 명예를, 이 내가 다시 세우는 게 우선이야!”
“그래?”
두근.
손에 잡혀 있던 집혼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박동한다.
“그래. 다들 그런 생각으로 설지 선배를 공격했겠지.”
소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
안광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툭.
그는 잠시 집혼기를 손에서 놓았다.
집혼기가 백설지의 몸 위로 떨어지기 전에, 그녀의 복부에 박혀 있는 매화검을 붙잡았다.
“어서 거기서 떨어져라. 내가 마무리할 것이다. 우리 아미파의 식구들을 참혹하게 죽인 년! 악적 년의 그 하얀 낯짝부터 짓이겨…… 컥?”
소호가 번개처럼 뽑아낸 육모담의 매화검이 멸진사태의 목을 관통했다.
피슉―.
나뭇가지 끝에서 꽃이 피어나듯, 소호의 검끝이 멸진사태의 목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방점을 찍었다.
매화검법.
소호의 매화낙섬(梅花落暹)은 단 하나의 흠도 없이 깨끗했다.
“매……, 매…… 크륵……?”
멸진사태는 소호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목을 더듬거렸다.
푸확―.
피가 뿜어진다.
멸진사태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하나뿐인 눈이 원망과 집착을 담아 끝까지 소호를 노려본다.
아미파에서 드높은 무명을 떨쳤던 한 명의 무인.
무림의 명숙인 멸진사태치고는 너무나 처절하고 초라한 최후였다.
“닥쳐.”
소호는 나직하게 말했다.
“평화롭게 보낼 수 있게. 좀 조용히 하란 말이야.”
소호는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 울컥 피가 솟아 나오는 백설지의 복부를 눌렀다.
지금 소호의 눈에는 오직 한 여인만 보일 뿐이다.
“후훗.”
백설지는 웃었다.
아무리 손바닥으로 압박해도 거세게 피가 나오고 있는데도, 그녀는 초연하게 웃었다.
“왜 울어……?”
“내가?”
“울지 마.”
마치 꺼져 가는 모닥불 같았다.
백설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소호는 손등으로 눈가를 훑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잘했어.”
“내가? 난 아무것도 잘하지 않았어.”
소호는 백설지처럼 담담할 수 없었다.
실패다.
이번 일은 변명의 여지없는 대실패였다.
“그때 괜히 보냈어. 천무련에 잡아 둘걸. 육모담이든 뭐든 만나지 말고 설지 선배나 붙잡을걸.”
“잘했……어. 내가 좀 더 강했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백설지는 다시 한 번 집혼기를 들어서 건네주려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툭― 하고 떨어지려는 집혼기를 소호가 그녀의 손과 함께 황급히 붙잡았다.
“네가 해.”
“뭐를?”
“신수……, 천무련…….”
백설지가 눈을 감는다.
“안 돼, 안 돼. 가지 마.”
소호는 백설지의 명문혈에 내공을 밀어 넣으려 했지만, 온몸에 퍼져 있던 빙백신기가 소호의 내공을 발작적으로 거부했다.
“읍.”
백설지가 울컥 피를 토해 냈다.
소호는 깜짝 놀라 내공을 거두었다.
“미, 미안. 설지 선배, 참아 보자. 버텨 봐. 집혼기가……. 집혼기가 치료해 줄지도 몰라.”
“괜찮아.”
백설지는 나직하게 말했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소호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소호는 백설지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녀도 힘을 줘서 마주 잡아 온다.
미약했지만, 소호는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
새하얀 얼굴.
아기처럼 쌔근거리던 숨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설지 선배?”
소호는 그 상태로 멍하니 있었다.
백설지의 얼굴은 평온했다.
미소마저 살짝 머금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어?”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는다.
피도 더 이상 흐르지 않았지만, 소호는 백설지의 상처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우르르릉―.
멀리서 또다시 산사태가 난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발밑이 흔들리자 이성이 조금 돌아왔다.
소호는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대미미와 패원강이 두 번째로 협곡을 무너뜨렸다.
도주해야 할 때다.
미리 생각해 둔 경로로 협곡을 넘어서 도망쳐야만 할 시점이었다.
“설지.”
이름을 부른 탓일까.
백설지와 소호가 마주 잡은 손 사이에 있는 집혼기가 두근두근 박동했다.
호명에 답하는 듯했다.
집혼기에 박힌 호안석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소호는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조심스레 집혼기를 벗겨 냈다.
목에 걸자 두근거리는 박동이 더욱 강해졌다.
“아…….”
때론 막연한 예감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소호는 깨달았다.
아직 그의 몸에 남아 있던 집혼기의 잔해.
거기에 백설지가 그동안 모은 혼백의 힘이 합쳐지자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집혼기가 필요로 하는 일만의 혼백이 모두 채워지고도 남아서 힘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아아.”
소호는 탄식했다.
어째서 이렇게 되는가.
칠점법으로 봉인했는데.
애써 집혼기를 가진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 했는데, 왜 이렇게 되는 것인가.
두두두두―.
소호는 일단의 무리가 그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느꼈다.
“설지 선배.”
소호는 나무에 기대어 잠든 것처럼 죽음을 맞이한 백설지를 가만히 바라봤다.
“육모담, 아미파……. 정파라는 자들 다 의미 없어. 말만 번지르르해. 똑같은 사람들이야. 이기적이고 얄팍해.”
소호는 목에 걸고 있던 집혼기를 옷 속으로 감췄다.
“내가 할게.”
눈앞에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소호는 화창했던 하늘에 뿌옇게 구름이 끼는 것을 느꼈다.
소호는 자신이 이뤄야 할 천명을 느꼈다.
백설지를 잃었다는 가슴 아픈 현실이 깨달음을 주었다.
그는 이 일을 교훈 삼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여기서 도망치는 것?
하수다.
어차피 나중에 무림 강호에서 문책당하고 의심받을 일이다.
진주언가, 아미파, 사천당가.
남은 자들을 다 죽이는 것?
쉽지 않다.
쉽지 않을뿐더러, 싸움의 흔적을 안 남길 수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이 위선적이고, 제각각 자기 문파의 명성만 떨치려는 멍청한 자들을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천무련을 무림 강호의 유일무이한 ‘깃발’로 만들 수 있을까.
“천무공자!”
산사태로 무너진 절벽을 넘어서 가장 먼저 도착한 자는 진주언가의 붕산철권 언주명이었다.
그는 소호의 등 뒤에 도착한 뒤, 헛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 일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소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여전히 백설지를 보고 있었다.
그사이에 다른 자들도 속속 도착했다.
진주언가의 무인들과 아미파의 금정 사태, 따로 떨어져 있던 복호승들까지 모두가 도착했다.
“이런 일이!”
그들 중 특히 아미파의 반응은 격렬했다.
“으허엉!”
“사숙! 사매!”
비구니들이 어찌나 격동했던지 불호를 내뱉는 것도 잊고 괴성을 내지를 정도다.
그들은 제각각 흩어져서 처참한 몰골인 시신들을 붙잡았다.
대부분 백설지의 막강한 내공에 내부가 망가졌거나, 꽁꽁 얼어붙은 채 신체가 망가진 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신들은 아미파 복호승들에게 있어선 평생을 함께하며 무공을 닦은 사형제들이었다. 무림 강호가 아무리 비정하다지만, 이런 처참한 시신들을 보면서까지 그들은 차분할 수 없었다.
“대체!”
“어째서! 어째서 이런 처참한 몰골이!”
멸진사태를 대신해 이들을 이끌던 금정이 불호를 내뱉었다.
“아미타불.”
그녀는 소호로부터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멸진사태의 시신 앞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멸진사태의 시신 역시도 처참했다.
반신이 무너지고, 목에는 구멍까지 뚫린 멸진사태의 모습을 금정은 쉽게 믿을 수 없는 듯했다.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금정은 무너지는 감정을 붙잡지 못하고 흐느꼈다.
“아미파의 천운이 다했구나. 모든 것을 잃었어.”
금정이 원망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웃기는군.”
하지만 여기 이 자리에 금정의 그러한 반응을 곱게 넘어가지 못하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아미파, 이 간사한 것들.”
언주명의 폭언에 금정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까부터 멸진사태가 왜 안 보이는가 싶었다. 이제 보니 아미파가 우릴 따돌렸구나! 당가의 가주가 함께 움직이라고 그토록 당부했거늘. 신의가 땅에 떨어졌다! 아미파는 못 믿을 자들이야! 어찌 자기들이 먼저 공을 세우려고 뒤통수를 친단 말인가!”
붕산철권 언주명은 자신의 생각을 담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온갖 복잡한 감정에 흐느끼던 금정이 도끼눈을 뜨며 언주명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까!”
“이런 상황일수록 일의 선후 관계는 명확히 해야 하는 법이다! 이딴 짓을 벌이니까 계획이 망가진 것이다. 그러니까 멸진사태도 그런 꼴로 죽어 나자빠진 거야!”
“말 다 하셨습니까?”
“멍청한 것들. 이딴 짓을 했으면 성공이라도 할 것이지!”
언주면은 성질을 부리듯 쾅! 하고 진각을 밟았다.
발을 한 번 굴렀을 뿐인데 지진이 난 것처럼 굉음이 터진다.
“큭.”
멸진사태가 있었다면 모를까.
금정으로서는 붕산철권을 상대하기엔 힘이 부족하다.
그녀가 신음만 흘리면서 참자, 언주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천무공자. 말해 봐라. 거기 있는 그 마녀는 자네가 쓰러뜨린 건가?”
소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묵묵히 몸을 돌려 그들을 마주하자, 모두가 달라진 그의 기백에 헛숨을 삼키며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언주명조차 잠시 말을 잃을 정도의 변화였다.
소호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서 있었을 뿐, 막강한 패력을 발산한 건 아니었다.
그저 몸에 두르고 있는 분위기.
시리도록 차가운 기백과 서늘한 시선이 주변의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평소엔 환하게 웃는 청년이었기에, 소호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었다.
“지금은, 그걸 논할 때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옵니다.”
“뭐?”
소호의 시선을 따라 모두가 옆을 올려다보았다.
비스듬한 경사 길의 위쪽.
본래대로라면 사천당가가 포위하며 내려와야 할 그 길로, 한 사내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