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24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24)
사내의 모습은 특이했다.
반백의 머리만 보면 노인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가 주름 하나 없는 젊은 청년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눈, 코, 입.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색은 창백했다.
백설지처럼 서역인의 백색 피부가 아닌, 마치 시체처럼 핏기가 없는 창백한 피부였다.
“나, 나왔다.”
“그자야……! 그때 마주쳤던 그자라고!”
금정 사태를 포함한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며 긴장했다.
그들은 호랑이를 만난 촌부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아미파는 지금 다가오고 있는 사내를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었다.
큰 피해를 입었던 기억.
심지어 상대방이 제대로 싸운 게 아니라 귀찮다는 듯이 뿌리칠 뿐이었는데도 압도당했었던 안 좋은 기억이다.
“쯧.”
붕산철권 언주명은 그런 아미파의 반응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약한 비구니들의 호들갑이라고 느꼈던 탓이다.
“저놈, 지독한 독을 뒤집어쓴 것 같은데. 설마 당가랑 싸운 건가?”
언주명은 발을 벌려서 자세를 조금 낮췄다.
옷을 녹일 정도의 당가지독이라면 극독이다.
그런 것을 견디고 이곳까지 온 인물이라면?
방심할 수 없다.
그는 다가오는 사내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언가!”
“예!”
“준비해라!”
언주명의 명령에 언가의 무인들이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 명령을 받은 사냥개처럼 눈빛이 흉흉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가 난다. 짜증이 나. 아미파. 진주언가. 하나같이 똑같아. 지금 이 상황에서까지 싸우다니.’
백설지를 잃었기 때문일까?
소호는 정신적으로 곤두서 있었다.
대충 넘길 수 있는 일에도 극심하게 화가 치밀었다.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분노한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에 첫 번째로 겪는 극심한 상실감이 소호를 각성시켰다.
가슴속의 울화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과 같았다.
세상의 풍진을 겪을수록 불꽃은 활활 타오른다. 숨을 쉴 때마다 불꽃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문파의 명성밖에 모르는 위선자들! 내가 왜 이런 자들이랑 같이 있는 거지? 이 사람들 때문에……. 이 사람들이 부른 육모담이 설지 선배를 죽였잖아?’
이제는 안다.
소림의 계현 대사가 왜 전력의 부족함은 없을 거라 했는지.
오매검마 육모담.
그자가 있으니 전력이 부족할 리가 없다.
팔파일방 중에 개방에서 육모담을 오매검마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들었었다.
이제 정파인 육모담은 없다고.
마인으로 취급하니 모든 무림의 공적이라고까지 소문이 돌지 않았던가.
그런데 뒤에선 이렇다.
정파의 명숙들과는 여전히 잘 지냈다는 소리다. 멀쩡히 잘 연락하면서 필요할 때는 이렇게 불러서 백설지를 죽이도록 시켰다.
위선적이다.
그렇기에 화가 난다.
그딴 것들이 백설지를 죽였기에.
소호의 반려가 되고 싶어 했던, 소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여인을 죽였기에.
‘바보 같은 놈이야, 나는.’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째서 죽었는가.
어째서.
자신은 그걸 막지 못했는가.
‘설지 선배……!’
소호가 속으로 백설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집혼기에서 전해지는 힘은 강해졌다.
소호의 몸이 꿈틀거렸다.
봉인되었던 혈맥이 들끓는다.
가슴에 잠들어 있던 혼백의 힘이 꿈틀거리며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흐으.”
한숨을 내쉬는 소호의 두 눈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그사이에 사천당가가 있던 방향에서 나타난 사내는 점점 가까워졌다.
“허?”
점입가경이라고 했던가.
소호는 그의 얼굴을 보자 폐부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황당하다.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그 복장.
그 체형.
몸속에 흐르는 기묘한 내공을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천무련에서 백설지의 오라버니라며 소개받았던 남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의 생김새가 소호에게 충격을 주었다.
산산조각 난 죽립 사이로 삐죽 나온 머리카락이 노인처럼 반백색이라도 상관없다.
눈꺼풀을 지그시 감은 맹인이 아니라 부릅뜬 눈으로 사방을 살핀다고 해도 관계없다.
다가오는 사내의 얼굴은 너무나 익숙했다.
소호가 잘 아는 얼굴이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얼굴이라고 해야 마땅했다.
‘역시 유준이었어.’
불패검 유준.
왕진이 키운 사흉 최강의 검객.
소호는 극렬한 분노와 아련한 반가움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아버지의 황실 진격을 가로막았던 유준이다.
죽었다고만 생각했다.
설령 살아남았다고 한들, 이 자리에서 백설지의 오라버니로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상해. 왜 설지 선배는 유준을 오라버니라고 불렀지? 도대체 왜?’
유준과 백설지가 혈연관계인가?
아니다.
그럴 리는 없었다.
소호는 무산학관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그들과 함께 지냈다.
유준과 백설지.
두 사람은 서로 친하기는커녕, 성격이 맞지 않았다. 공적인 일이 아니라면 일 년에 한 번이나마 대화를 나눌까 말까 할 정도다.
그렇다면 어째서 백설지는 유준을 오라버니라 부르고, 실제로 오라버니처럼 대했던 걸까.
의문에 찬 소호가 다가오는 백설천과 눈빛이 마주쳤다.
‘날 아는 눈빛은 아니야. 지금도 보면 알 수 있어. 유준이 아니야. 겉모습은 유준인데, 내면은 전혀 다른 사람인 거야.’
백설천은 소호와 스무 보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멈춰라! 너는 누구인가!”
붕산철권이란 별호답게 우렁찬 목소리였다.
언주명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언가의 사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언가의 무인들은 재빨리 움직여 백설천을 둘러쌌다.
으득.
언주명 또한 내공을 끌어 올리며 싸움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강하게 움켜쥔 두 주먹에서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아, 안 돼.”
백설천은 언주명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언주명이 움직였다.
붕산철권.
일권에 산을 무너뜨리는 강맹한 언가권이 백설천을 향해 포탄처럼 날아갔다.
터엉!
백설천은 그 주먹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옆으로 쳐 냈다.
좌수를 뻗는 모습.
마치 파리를 쳐 내듯 가벼운 손길에 언주명의 철권은 길을 잃고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강맹한 내력과 사량발천근에 대한 이해가 돋보이는 한 수였다.
원래 본능적인 대응에서 고수와 하수의 차이가 나는 법.
언주명의 승모근이 불끈 솟아올랐다.
“이놈!”
언주명은 진주언가의 가주로서 왕진이 득세하기 전의 강호 무림을 활보했던 고수이지 않던가.
남권북퇴라는 말이 있다.
남쪽은 권이 유명하고 북쪽은 발을 쓰는 퇴법이 유명하다는 소리다.
남권도 북퇴도 모두 포용한 진주언가에는 언가권뿐만 아니라 각법도 훌륭한 무공이 많이 있다.
쒜에엑―!
찰나의 순간에 세 번의 각법이 뻗어 나갔다.
마치 가늘고 질긴 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듯한 각법이었다.
파파팡!
발끝에 뭉친 경력이 폭음처럼 터져 나왔다.
후웅―.
하지만 백설천은 그 각법을 제대로 상대도 하지 않았다.
싸우려 들지 않고 상체만 옆으로 비틀면서 회피하더니, 손을 뻗어 언주명의 발끝을 손바닥으로 밀어쳤다.
뻐엉!
“……!”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언주명의 각법과 백설천의 장법이 부딪친 소리였다.
언주명이 입고 있던 무복의 바짓자락이 갈가리 찢기며 터져 나간다.
상처투성이.
온갖 흉터로 뒤덮인 두껍고 강인한 종아리가 드러났다.
언주명의 두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다시금 거머쥐는 주먹.
강맹한 권격이 날아갔지만, 백설천은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강하게 아래로 내리쳤다.
꽈앙!
“흡!”
언주명은 주먹을 땅바닥에 내리꽂은 셈이 되었다.
거센 폭음과 함께 땅바닥이 움푹 들어갔다.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언주명은 벌겋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들여다보았다.
파라락―.
싸움은 거기까지였다.
서로 간의 호흡이 교차된 그 순간.
백설천은 언주명을 상대도 하지 않고 위로 뛰어올랐다. 누더기 같은 피풍의가 허공에 흔들렸다.
그는 질풍 같은 기세로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이제 남은 것은 소호 한 사람뿐.
소호는 그를 막지 않고 한 걸음 옆으로 순순히 비켜섰다.
백설천은 소호를 힐끗 한 번 쳐다봤을 뿐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쓰러진 백설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설천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숨이 멎은 것 같은 얼굴이다.
그는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소매 아래 새하얀 손가락만 파르르 떨릴 뿐이다.
“아, 안 돼.”
그는 무너지듯 백설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동생……! 안 돼. 안 돼.”
한쪽 무릎을 꿇고 백설지를 끌어안는 그의 뒷모습이 애잔했다.
그는 안 된다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했다.
어눌한 말투.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정신이지만 그의 감정만큼은 진실했다.
‘정말로 오라버니였구나. 설지 선배를 아끼는 오라버니였어.’
소호는 사람의 상식을 벗어나는 괴이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쉽게 믿기 힘들 지경이다.
유준이 몸에 들어간 백설천이라니.
“설지……!”
그러다 백설천이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었다.
우웅―.
“윽.”
소호는 자신의 목에 걸린 집혼기를 붙잡고 신음했다.
어째서일까.
집혼기가 이름에 답하듯 웅웅 떨린 것이다.
그뿐인가?
기묘한 힘을 뿜어냈다.
소호의 심장이 두근― 강하게 박동했다.
“너.”
그 순간 백설천의 고개가 홱―하니 돌아갔다.
“너. 뭐냐?”
백설천의 시선이 소호에게로 고정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소호의 목에 걸려서 옷 속에 숨어 있는 집혼기다.
백설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호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이번엔 백설지의 상처를 살폈다.
“검.”
백설천의 시선이 이번엔 주변을 훑는다.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아미파 비구니들의 시신들은 무감각하게 지나쳤다.
부서지고, 깨지고, 일부가 얼어붙은 모습에서 백설지의 흔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금정이 수습하고 있던 멸진사태의 시신이다.
무릎을 꿇은 채 옆으로 픽 쓰러져 있는 멸진 사태의 목에 난 구멍.
백설천은 거기까지 본 뒤, 지금 이 순간에도 소호의 손에 들려 있는 매화검을 보았다.
“너다.”
백설천의 왼쪽 눈에서 푸른색 안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확신.
그리고 분노.
“내놔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백설천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화아아악―.
“……!”
소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백설천이 활활 타오르듯 뿜어낸 기세가 뜨거운 불길처럼 온몸에 훅― 하고 끼쳐 든다.
“헙.”
“흑.”
언주명은 물론이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무인들이 헛숨을 들이키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막강하다.
주변이 숨죽이고 있었다.
후우우웅―.
바람이 불어 나오고.
파스스―.
백설천의 발밑에서부터 시작된 새하얀 서리가 주변을 얼려 가고 있었다.
“너냐. 네가. 동생을 죽였나?”
백설천의 살기는 오로지 소호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힘.
그녀의 혼백.
그녀의 집혼기.
모든 것을 소호가 가져간 것 아니냐고 질책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결국 이렇게 되는 거였어.’
언주명, 금정, 수백의 무인들.
그리고 등 뒤에선 사천당가로 추측되는 의문의 인기척도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모인 이곳에서 온 세상이 소호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듯했다.
하늘을 흐리게 만들던 구름이 우르릉― 우레 소리를 냈다.
소호는 천명을 느꼈다.
백설지는 소호에게 집혼기를 직접 주었다.
그걸 어찌 설명할까.
자신은 육모담이 만들어서 건네준 이 상황에 휩쓸렸을 뿐이라고 말해야 할까?
모든 책임과 공은 육모담에게 돌리고 빠져나가라는 건가?
콰광!
번개가 친다.
소호의 머릿속에도 기억이 번뜩였다.
“네가 해.”
“뭐를?”
“신수……, 천무련…….”
소호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렇다. 내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