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76화 (505/686)

15권 25화

제33장 무이이심(無貳爾心) (25)

소호의 답은 간결했고 많은 뜻을 품고 있었다.

“역시.”

당연한 일이지만 백설천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백설지의 시신을 다시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내려놓았다.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 백설천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새하얀 양손으로 소호를 후려치고 있었다.

꽈아앙!

폭풍 같은 경력이 사방을 휘몰아쳤다.

분노한 백설천의 힘은 일대 종사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움직임, 호흡, 사위를 뒤흔드는 막강한 기파까지.

흠잡을 것 하나 없는 무공에 진퇴를 숨 쉬듯 자유롭게 조절하는 섬세함까지 갖췄다.

소호는 힘을 다 해소하지 못해 발이 땅속으로 반쯤 파묻혔다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소호는 바쁘게 양손을 휘둘렀다.

‘굉장한 힘. 막강해. 그리고 이 장법, 형태는 설지 선배랑 똑같은데, 힘의 수준이 다르다.’

터엉!

땅을 박차고 달려드는 모습은 들소처럼 육중한데, 손끝의 각도를 이리저리 변화시키며 틈을 노리는 모습은 뱀처럼 영리했다.

파앙! 텅!

소호는 백설천의 손목을 손날로 쳐 냈다.

팟! 퍼퍼퍽! 터엉!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초근접 난타전이 벌어졌다.

소호의 몸에 장법을 꽂아 넣으려는 백설천과, 그런 백설천의 공격을 중간에 끊어 버리는 소호의 대결이다.

퍼퍼퍼퍽! 투웅!

두 사람은 고작 세 걸음 정도의 반경 안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아래로 한 치, 왼쪽 아래 사각에서 일격,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추장.’

소호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두 사람이 손속을 겨룰 때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공기가 뻥뻥 터져 나갔다.

고오오오―.

중원의 무공은 일격 필살보다는 겨루면 겨룰수록 점점 상대를 옭아매고 제압하는 형태의 무공이 많다.

두 사람 사이에서 초식이 거듭될수록 막강한 힘이 응축되고 있었다.

쌓이고, 쌓이고, 쌓였다.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 치열한 공방 속에서 두 사람의 발이 닿을 때마다 단단한 땅바닥이 두부처럼 으깨졌다.

‘힘에서 밀려. 초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지금까진 섬세한 기술로 버텼으나, 경합을 거듭할수록 혈도에 가해지는 타격이 커졌다.

손발이 저릿저릿했다.

상대방의 머리카락 한 올, 얼굴에 난 솜털 하나까지 보일 정도로 상대에게 극도로 집중했다.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가 절정에 달했다.

후우우웅―.

보이지 않는 공기가 백설천의 양손을 향해 쑥 빨려 들어갔다.

거인이 사람 몸만 한 입으로 숨을 들이켜는 듯했다.

백설천은 양손을 모았다.

쿠웅!

푸른색.

온몸에 시퍼런 한기를 두른 그가 양쪽 발을 땅에 강하게 박아 넣는다.

“빙백.”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위를 밀어내듯, 백설천은 양손을 나란히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신장.”

화아아악―!

소호는 그 순간 눈앞에서 온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는 듯한 광경을 보았다.

산사태가 밀려오는 것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는가.

지금 소호가 그러했다.

다만 밀려오는 것은 흙이 아니라 새하얀 서리이자 눈보라다.

‘피해야……!’

생각과 동시에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소호는 마치 야생동물처럼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등이 굽는다. 온몸이 긴장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상황을 파악하고, 결론은 순식간에 내려졌다.

‘못 피한다.’

소호는 양팔로 주요 요혈들을 가렸다.

빙백신장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고, 범위가 넓었다.

소호의 신법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퍼어엉!

소호는 양팔을 가슴 앞에서 교차한 자세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나갔다.

물수제비처럼 땅바닥을 한 번 튕긴 소호가 길게 족적을 남겼다.

“큭.”

신음이 절로 나온다.

저릿저릿한 팔.

내부는 진탕되어 핏물을 토할 것 같다.

그뿐인가?

빙백신기에 얻어맞은 부위에서부터 하얗게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흡.”

빠르게 치솟은 빙백신기가 소호의 전신을 덮었다.

소호의 부족한 내공으로는 온몸을 덮친 빙백신기를 쉽게 해소할 수 없었다.

푹 젖은 천을 눈밭에 던져 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소호의 짙은 눈썹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코로 내쉰 숨결이 버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중에서 얼어붙는다.

찰나의 순간 만에 소호는 살아 있는 얼음조각상이 되고 말았다.

“둘러싸라!”

소호가 빙백신장을 얻어맞고 얼어붙자, 언주명은 위기를 느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치며 백설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미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선장을 들고 달려드는 기세가 사납다.

강호 무림의 이름 있는 문파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사흉 중 최강이라 불렸던 궁기 백설천이었다.

그는 그들의 저지를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으악!”

금정 사태가 표설천운장을 끝까지 전개하지 못하고 일 수 만에 왼손이 꽁꽁 얼어붙은 채 쓰러졌다.

아미파의 항마진은 견고했으나, 백설천을 상대로는 호랑이를 나뭇가지로 가둬 둔 것처럼 위태로웠다.

백설천이 장법을 쓸 때마다 진형이 휘청거렸다.

그들의 선두에 선 이.

언주명이 아미파와 전혀 다른 무공을 사용하며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한몫을 한다.

언주명은 강인했으나 위대한 무인은 아니었다.

애초에 무림오존 수준의 무공이 아니라면 백설천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놈!”

붕산철권은 위맹한 권격을 연이어 뻗어 냈으나, 백설천에게는 크게 통하지 못했다.

애꿎은 주변의 땅바닥만 수십 번 파헤쳤을 뿐,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한 채 번번이 밀려났다.

하지만 계속해서 밀리던 언주명이 두 눈에서 기광을 번뜩였다.

오랜 무림 강호의 경험으로, 위기에서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잡았다!”

왼손으로는 백설천의 손목을 밀어낸다. 강한 우측 진각과 함께 내뻗은 주먹이 처음으로 백설천의 가슴을 제대로 두드렸다.

뻐어억!

붕산철권.

언주명의 전력을 다한 일권이면 산도 무너뜨린다는 말은 허세가 아니다.

사람만 한 바위도 일권에 박살 낼 수 있기에 붕산철권이란 명성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일권을 맞은 백설천.

잠시 멈칫했을 뿐.

그는 내부가 진탕되거나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다만 발밑이 움푹 들어가더니, 이내 더욱 큰 힘을 담아 또 한 번 빙백신장을 내뻗었다.

뻐어어억!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언주명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육참골단(肉斬骨斷).

언주명이 허점을 간파한 듯 보였으나, 오히려 백설천이 살을 내주고 뼈를 자르는 기회를 준 셈이 되어 버렸다.

백설천이 소호 때처럼 내력을 모아서 타격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근거리에서 맞았기에 오히려 그 위력은 언주명을 순식간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쿠왁!”

언주명이 피를 토했다.

비척거리며 물러나는 그의 가슴이 새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이런 괴물이……!”

백설천은 언주명을 더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목표는 오직 소호였기 때문이다.

다시금 목표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하는 백설천은 주변을 둘러싼 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아미파의 비구니들.

진주언가의 무인들.

모두가 주춤주춤 물러나며 견제할 뿐 백설천을 직접 막을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백설천은 악귀 같은 패력을 내뿜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을 둘러싼 무인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됐습니다. 길을 열어 주세요.”

그런 그들을 구원하는 자.

장소호였다.

금정 사태와 언주명.

아미파와 진주언가가 만들어 낸 시간이 소호에게 큰 기회가 되었다.

파삭―.

몸을 움직일 때마다 꽁꽁 얼었던 몸에서 얼음 가루가 흘러내렸다.

소호는 검지와 중지를 세워 검결지를 만들고, 그걸로 가슴을 빠르게 찌르기 시작했다.

일곱 번의 점혈.

혈도의 위치뿐만 아니라 찔러 넣는 깊이도 각각 다르지만, 소호는 자신이 봤던 해혈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간단하지만 철저하게 소호의 중단전과 임맥의 흐름을 막고 있던 칠점법이 차례차례 해제되었다.

음교에서 중완, 유문, 거궐, 중문까지.

복부와 가슴에서 거대한 장강의 흐름을 막고 있던 일곱 개의 수문(水門)이 하나씩 열려 간다.

우우웅―.

소호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얼음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소호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메말라 있던 혈도에 막강한 내력이 몰려들었다. 진기는 살아났다.

야생마처럼 거칠고 강인한 진기가 임독양맥을 정신없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온몸에 핏줄이 돋았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꿈틀대는 근육.

신체를 구성하는 근육 하나하나가 새로 생명을 얻은 듯 힘이 넘쳤다.

가슴에 남아있던 집혼기의 잔해.

그리고 백설지로부터 건네받은 집혼기에서 흘러나온 힘이 하나로 결합하는 순간이다.

우드득―.

콰득―.

몸에서 기괴한 소리가 났다.

반박귀진.

환골탈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소호의 몸은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화아아악―.

소호는 눈을 떴다.

강인한 눈빛.

황금색 서기가 어린 두 눈이 살기로 가득 찬 백설천을 마주 본다.

툭.

소호는 발끝을 세워 땅을 박찼다.

온몸이 가벼웠다.

그야말로 깃털 같다.

가볍게 땅을 찼을 뿐인데, 온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쒜에에엑―.

소호는 그 속도를 그대로 살려, 오른쪽 정권을 그대로 백설천에게 찔러 넣었다.

꽈아아아앙!

두 사람이 격돌하는 순간 차가운 바람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백설천은 소호의 정권을 양손 장타로 막은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빛이 흔들린다.

그가 끌어 올린 빙백신기가 소호의 정권 일격을 맞고 흩어져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무슨. 짓. 을 했나?”

아까까지만 해도 소호는 백설천을 상대하기에 힘이 부족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막강해진 힘.

집혼기에서 무한하게 흘러나오는 진기가 소호에게 무신(武神)과도 같은 자신감을 주었다.

터어엉!

콰앙!

철포삼, 소림오권.

일격 일격이 모두 필살이다.

엄청난 힘이 두 사람의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역장을 형성했다.

후우웅―.

백설천의 빙백신장이 또다시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인다.

소호는 펄쩍 뛰어올라 그런 백설천의 품 안으로 쇄도했다.

가볍게 쥔 양손 주먹을 아래로 내리치는 일격.

소림오권 중 호권의 일격이 백설천의 쌍장을 정면으로 맞상대한 것이다.

터어어엉!

이번엔 소호는 튕겨 나가지 않았다.

그뿐인가?

소호의 양손에 붉은색 강기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더 이상 백설천의 빙백신기에 얼어붙지도 않았다.

“그 힘!”

도철의 용생강기를 알아본 백설천이 더욱 살기를 뿜어냈다.

훅― 하고 끼쳐 드는 패력.

파스스―.

양손을 얼음처럼 꽁꽁 얼린 백설천이 믿을 수 없이 강맹한 장력을 날려 댔다.

뻐억―!

소호의 주먹이 튕겨진다.

막강한 무신의 힘으로도 백설천을 제압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나 강한가?

어째서 백설천의 육신은 이토록 강인한가?

‘사천당가에 독을 뒤집어쓴 상태인데도 이 정도인가? 지금껏 만났던 사흉들보다도 훨씬 강해.’

백설천이 허리를 반 바퀴 회전시키자 새하얀 강기가 손바닥 모양으로 날아왔다.

장강(掌罡).

강호 무림 역사상 몇 번 등장하지도 않았던 장강이 모습을 보였다.

새하얀 장강은 소호의 몸을 파리처럼 짓뭉개 버릴 것처럼 강했다.

소호는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크게 회전하는 몸.

가슴 앞에서 양팔을 타원형으로 교차시키며 태극권을 전개했다.

우우웅―.

몸에 스치기라도 하면 일격에 목숨을 잃을 필살 초이기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장강의 힘은 강했지만, 지금의 소호는 더욱 강했다.

콰아아앙!

소호의 태극권에 방향이 틀어진 장강이 바닥을 내리쳤다. 땅바닥은 화탄처럼 터져 나갔다.

박살 난 흙덩어리들이 소호의 기파에 날려 흩어진다.

‘지금!’

소호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콰앙!

진각을 강하게 밟고.

쒜에에엑―!

소호의 우수가 불꽃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왼손으론 방금 장강을 흩뿌렸던 백설천의 손을 밀어내고, 만들어 낸 가슴의 공간에 우권을 찔러 넣는다.

뻐어억!

붕산철권 언주명이 때렸던 것과 똑같이 가슴의 일격이다.

백설천의 등 뒤로 바람이 훅― 하고 밀려 나가 사방에 힘의 파편을 흩뿌렸다.

백설천은 언주명의 권격은 무시했었지만, 소호의 것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움푹 들어간 가슴.

내력이 엉망이 되어 기파가 흐트러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백설천은 아픔을 호소하진 않았으나, 입가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빛도 흔들린다.

백설천은 혼란에 빠진 듯 보였다.

소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릉―.

허리에 차고 있던 매화검을 뽑아 들고 검법을 전개했다.

긴 나뭇가지 끝에서 매화꽃이 만발하듯.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매화난만(梅花爛漫)의 한 수가 백설천의 가슴을 베어 냈다.

푸확―!

탁하게 흐려진 핏물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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