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2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2)
대철이는 울었다.
그 큰 몸으로 조서인을 부둥켜안고는 훌쩍거리면서 등을 팡팡 두드렸다.
조서인은 컥컥거리면서도 애써 웃으면서 대철이를 달래 주었다.
고작 열네 살밖에 안 된 놈이 덩치는 곰만큼 크다.
물론 아버지인 대석을 생각하면 대철이도 그저 아직은 새끼 곰에 불과했지만, 평범한 체구인 조서인에게 있어서는 벌써 대철이의 품속에 쏙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체구가 컸다.
“형! 조, 조심해야 해요!”
“죽으러 가는 거 아니야, 대철아. 심부름만 잘 하고 올게.”
“나도 가, 가고 싶은데…….”
“네가 얼른 크……, 그래. 이미 좀 크긴 하지만, 아버님만큼 커야지. 그렇지?”
“야, 약속했어요! 나 잘 먹고 무, 무공 열심히 수련할 거예요?”
“요즘 뭐 배운다고 했지? 만력신공(萬力神功)?”
“천하만력신공!”
“그래. 그거 잘 익히고 있어. 형 얼른 다녀올게.”
조서인은 대철과 눈물의 이별을 한 뒤, 장기린과 광사로, 그리고 강운찬의 배웅을 받으며 은자촌을 떠났다.
철탑패웅 이태산이나 섬전검객 태성천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성치 않은 몸으로 흑신의 우문환의 치료를 받으며 패관 수련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선배들도 다녀오면 강해져 있을까?’
조서인은 기대되었다.
이번 무림행을 통해 자신도 성장할 것이다.
삼산을 내려가는 발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
조서인은 내심 고작 이 년 만에 뭐가 그리 변했겠냐고 생각했다.
물론 가끔 소문을 듣기는 했다.
천무련이 개파식을 했다던가.
왕진과 흑시군이 강호 무림에서 손을 뗀 것처럼 조용하다는 소문은 화전촌이나 다름없는 오지 산골의 풍운객잔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 년이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을 뿐이데 그사이에 뭐가 그리 바뀌었을까 싶었다.
그런데 웬걸?
삼산현의 아랫마을에 내려왔을 뿐인데 그 이 년간의 변화가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졌다.
“뭐가 이리 발전했어?”
조서인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굳어 버렸다.
고작 언덕 하나 너머에 화전촌이 있는 시골 마을이다.
이 년 전에 은자촌에 올라가기 전에 소호와 함께 들른 적이 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
행정 구역상 ‘현’이라는 명칭을 달고는 있지만, 삼산현은 깡촌이나 다름없는 외지였기에 그냥 농사 짓는 촌부들만 잔뜩 있던 마을이었다.
객잔도 마찬가지다. 손님이라고는 가끔 지나가던 행상인들 몇 명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커다란 객잔과 상회, 표국까지 들어서 있었다.
“풍운상회, 풍운표국, 풍운객잔……? 아니, 여기도 풍운객잔이 있어?”
조서인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던 걸까?
지나가던 행상인들 여러 명이 조서인을 보며 웃고, 수군거리면서 지나갔다.
“으음.”
조서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뜨거워서 똑바로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크게 마음먹고 나온 무림행인데, 어째 시작부터 뭔가가 비틀린 기분이다.
조서인은 몸을 숨기듯이 재빨리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소면 한 그릇 주세요!”
객잔 안으로 들어오니 삼산현 ‘풍운객잔’은 여러모로 은자촌에 있는 풍운객잔과 비슷한 면이 많은 곳이었다.
특히 객잔의 벽이 그렇다.
목조 벽을 하나 세우고, 그 겉면을 커다란 대죽(大竹)을 반으로 쪼개서 주르륵 늘어놓았다는 점이 똑같았다.
객잔은 장사가 잘되는 듯 비어 있는 탁자가 몇 개 없었다.
무림인들이 꽤 많다는 점이 특이했다.
허리에 검이나 도를 찬 사람들.
예전 같았으면 흑시군이 두려워 무기를 차고 나오지 않았을 사람들인데, 이 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누가 봐도 ‘무림인’ 같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조서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별로 닿지 않는 구석의 탁자로 향했다.
소면을 기다리길 잠시.
점소이가 올 줄 알았는데, 그보다 앞서서 탁자에 다가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조 공자님. 저는 흑서(黑鼠)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조서인은 괜스레 만지작거리던 젓가락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회색 두건을 쓴 왜소한 체격의 남자였다.
그는 사십 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는데,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작았고, 코는 심한 매부리코였다.
거기에 앞니 두 개가 입술 밖으로 툭 튀어나오기까지 하니 자신이 소개한 이름처럼 겉모습은 영락없는 ‘쥐’를 닮아 있었다.
“저를 아세요?”
조서인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러믄요. 잘 알지요. 저 윗마을에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긴 한데…….”
“대인께서 전서를 보내셨습니다. 도와드리라고요.”
“대인이라고 하시면…….”
“공자님의 사부님이시죠? 장 대인이요.”
“아!”
흑서는 사람이 좋은 건지 비굴한 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공손한 웃음을 지었다.
허리를 연신 낮추면서 양손을 비비기까지 했다.
“부디 제가 틀렸다고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공자님을 만나기 위해 저 윗마을에서 삼산현으로 내려오는 열 군데 길목에 부하들을 깔아뒀었거든요. 만약 그놈들이 일을 잘못했다면 제가 혼쭐을 내야 합니다.”
“아! 그분들이 그분들이었구나.”
조서인은 하산하는 길에 느껴지던 시선과 기척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흑서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조서인은 거기까진 알아채지 못했다.
“정말로 그분을 사부님으로 모시고 계셨군요. 그분의 제자를 뵙다니. 영광입니다.”
“아……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해서. 그리 말씀하시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공자님께서 기억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공자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예? 저를요? 어디서요?”
“예전에 하오문의 ‘전’ 하남 지부장과 습림관을 함께 통과하셨지요? 그때 먼발치에서 뵀습니다.”
“아! 미미 할아버지의 제자분!”
“맞습니다요.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백린탄을 찾고, 백단장이라는 곳에 가서 호광이라는 도호를 지닌 기이한 술법을 쓰는 도사를 만나고.
그러고 나오자마자 은위군의 술책에 휘말려 싸웠던 온갖 모험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때였구나. 저는 공진표 하남 지부장님은 기억해요. 그때 저를 보셨어요? 근데 왜 저는 기억이 안 나지?”
“말씀드렸듯이 먼발치에서 봤을 뿐이니까요.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하오문의 하남 지부장 흑서라고합니다.”
“조서인입니다. 새로운 하남 지부장이 되셨구나. 그럼 공진표 하남…… 아니지, 전 하남 지부장님은 어디로 가셨어요?”
“하오문의 부문주가 되었습니다.”
흑서는 처음으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직급이 올라가신 거군요. 그런데 사부님께서 도움을 청하셨다고 했죠?”
“청하셨다니요. 제가 감히 도울 수 있어 영광인 일입니다. 공자님께서도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희 하오문에 말씀하시면 됩니다.”
“에이, 그래도 그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흑서는 매사에 조심스러운 남자였다.
장기린의 이름이 나오자 손을 내저으며 극도로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로 괜찮으니 언제든 필요한 걸 말씀하시면 됩니다.”
“으음, 일단 마음은 감사히 받을게요.”
“듣던 것보다 더 선한 분이시군요. 훌륭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급하게 찾아온 이유는 전해 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혹시 일이 급하게 돌아가나요?”
조서인은 흑서가 마음이 급한 것을 알아챘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흑서는 장기린이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추묵환이 보낸 서찰에 관해 도우라는 일이었을 텐데, 그런데 하남 지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조서인이 은자촌에서 내려오자마자 직접 찾아왔다.
일이 생각보다 더 급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을 것이다.
“정확하십니다. 아직 강호 무림에 소문은 많이 돌지 않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장강 하류에서 상류까지 온 중원을 관통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원……이라고요?”
“예. 중원 전체의 일입니다. 아마 공자님의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암중에서 움직이는 중일 겁니다.”
흑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말하듯 지금 이 순간에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조서인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동안 암중에서 움직이던 백검회의 세력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합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새로운 ‘일검’이라 불리는 청계라는 자는, 과거 사흉이라 불리던 자들만큼이나 엄청난 흉명(凶名)을 쌓아 가고 있지요.”
“청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 마을에 계속 계셨으니 모르실 만도 합니다. 녹림채든 수로채든 가리지 않고 혼자서 수백 명을 죽이고 다닙니다. 하남의 녹향문, 호북의 옥계검문. 전부 그자 하나에게 당했습니다. 심지어 기분이 나쁘면 후촌은 물론이고……, 아무 죄 없는 보통 민초들도 죽일 때가 있다더군요. 참으로 잔인한 자입니다. 강호에선 이미 흉신광검(凶神狂劍)이라 부릅니다.”
“뭐라고요?”
조서인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되물었다.
“그런 짓을 하고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가 있어요?”
“강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님.”
흑서의 안색이 침울했다.
“강해도 너무 강합니다. 그동안 분노에 차서 검을 든 협사들이 얼마나 많이 그자에게 당했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공자님.”
“그렇게 강해요……?”
“예. 세간에선 이미 무림 십대고수는 물론이고, 흉신광검을 무림오존과 동격으로 놓아야 한다는 말까지 하고 있지요.”
조서인은 미간을 좁혔다.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일개인의 잔악한 행패를 막지 못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해지겠는가.
적어도 조서인이 믿는 ‘무림 강호’란 그래선 안 되는 곳이었다.
“으음, 제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나서야죠. 혼자의 힘으로 부족하다면, 무림맹이, 그리고 팔파일방이 나서야 하잖아요?”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자가 워낙 신출귀몰한 데다, 지금은 백검회가 녹림수로맹과 전쟁을 치르고 있으니 다른 문파들은 끼어들기가 난감한 상황입니다.”
“아…….”
“녹림수로맹은 저희 하오문과 비슷한 점이 많지요. 무림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나, ‘정도’는 아닙니다. 때로는 무림인이라기보다는 민초들을 괴롭히는 적으로 여겨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위험한 상황에 팔파일방의 도움을 받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흑서는 무표정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진한 아픔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녹림수로맹이 분투하고는 있으나, 백검회로 인해 처참한 꼴을 많이 당했습니다. 애초에 불리한 싸움이었습니다. 백검회는 드러나질 않았고, 반면에 녹림수로맹은 각 지역에 퍼져 있는 산채와 수채들을 모조리 철수시키지 않는 다음에야 각개격파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겠네요. 하지만 추 어르신은 백경채에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그쪽도 심각한 상황 같긴 했습니다만. 장강용왕께서 그리 판단하셨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흑서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백경채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요? 추 어르신께서는 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녹림수로맹의 와룡. 제갈륜이 만박서생과 함께 쫓기고 있습니다. 그를 구해 주시면 됩니다. 장소는 여기에 있고, 마차는 지금 밖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이다.
장소가 적혀 있는 서찰을 받아 든 조서인은 자신이 소면을 먹을 시간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그럼 바로 가야겠네요.”
“배웅하겠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소호는…….”
“예?”
“상황이 이런데, 천무련은 가만히 있던가요?”
흑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