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80화 (509/686)

16권 3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3)

“그건…….”

흑서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이 보였다.

“으음, 지금 천무련은 매우 바쁩니다. 개파식 이후에 승승장구하여 이제는 무림맹의 맹주령을 이어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분수령에 있지요. 아마 지금 녹림을 돕는다는 건 천무련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을 것입니다. 흑시군의 잔당들과, 그들과 영합했던 흑도 문파들을 각지에서 쓸어버리는 일만 해도 정신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흑서는 천무련의 상황을 열렬히 변호해 주고 있었다.

조서인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점 사라져 갔다.

“천무련이 지금의 이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닙니까?”

“예? 그건, 예. 모를 리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녹림수로맹이 백검회에게 밀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천무련이, 아니, 소호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고요? 추 어르신이 백경채에 있는 것도 알고 있는데?”

“…….”

“지금 그런 이야기인 거죠?”

조서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흑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침묵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

시끌벅적한 객잔 안에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공간에만 단단한 벽이 쳐져 있는 듯했다.

흑서의 좁은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공자님, 저는, 으음, 이 일에 대해서는…….”

흑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조서인의 침묵이 그를 숨 막히게 만든 탓이다.

심즉검(心卽劍) 검즉심(劍卽心)이라.

조서인이 느끼는 격렬한 감정이 곧 눈에 보일 정도의 무형기가 되어 흑서를 짓뭉개고 있었다.

지난 이 년간 조서인은 불철주야 노력했다.

영기로 가득 찬 삼산의 정기를 받으며, 뛰어난 스승에게 최고의 무공을 익혔다.

순박한 성정?

물론 그대로다.

하지만 호부에 견자 없다고 하지 않던가.

검선, 불요신승, 장강용왕, 그리고 붉은 악귀 장기린.

보고 배운 이름이 그와 같다.

조서인이 그저 침묵을 지키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공의 조예가 그리 깊지 않은 흑서로서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깊은 충격에 휩싸였다.

조서인은 부지불식간에 은자촌 거인들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흑서는 고민하다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공자님. 그저 장강용왕은 천무련에 손을 벌리지 않았고……, 천무련 또한 녹림수로맹과 손을 잡지 않았을 뿐이지요. 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뿐입니다.”

강렬했던 조서인의 눈빛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다시 처음에 만났을 때와 똑같이 순박하고 어리숙해 보이던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흑서는 깊은 물속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잘못 알았을 겁니다.”

“예?”

“소호는 정의로운 친구입니다. 그리고 마을의 어르신들과 혈연 이상의 깊은 친분을 맺고 있어요. 소호가 추 어르신이 곤경에 처한 사실을 알았다면, 이 일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조서인은 자신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예, 그렇군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흑서는 그저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동조할 뿐, 조서인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조서인은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화풀이를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사부인 장기린의 부탁을 들어주러 왔을 뿐인데, 거기다 한참 어린 자신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춘 사람을 괜히 곤란하게 만든 셈이다.

“죄송합니다. 괜한 걸 물어서 곤란하게 만들어 드렸습니다.”

조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저 말 몇 마디 답해 드린 게 전부인 것을요. 저는 개의치 않으니 공자께서도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흑서는 당황해서 마주 일어나 조서인보다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저는 마차를 타고 기다리면 되는 거죠?”

“예, 예. 제가 바로 모시겠습니다. 마차는 바로 앞에 있습니다.”

조서인은 흑서를 따라 객잔 밖으로 나서며 힐끗 머리 위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풍운객잔.

풍운이란 본래 변화를 뜻하는 이름이다.

비가 내리든 눈이 내리든, 이 땅에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온 세상을 주유하는 바람과 구름이 아니던가.

조서인은 자신의 앞날에 뭔가 커다란 변화가 닥쳐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과 함께, 그는 남경 인근의 태호를 향해 달려갔다.

***

사사삭―.

바람에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고, 몸집이 가벼운 고양이가 낙엽을 밟는 소리 같기도 했다.

태호 인근의 수림(樹林) 사이를 뛰어가던 두 사람은 그 작은 소리만 듣고도 재빨리 몸을 낮추고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헉. 헉.”

“형님.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단전에 힘을 주십쇼. 억지로라도 숨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흡.”

숨을 너무 가쁘게 쉬면 과호흡이 오고, 체력이 약한 자는 죽음에까지 이를 수도 있는 법이다.

다행히 만박서생(萬博書生) 육지생은 그 별호만큼이나 이해력이 빠른 사내였다.

제갈륜이 숨소리를 낮추라는 목적을 알아채고는 얼굴이 노랗게 변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숨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깡 마른 몸.

무공이라고는 일초 반식도 모르는 천생 학사지만 그래도 고집스럽게 노력하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헐떡이던 숨이 차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그래. 잘하고 있소, 형님.”

“습, 습. 후우. 후우.”

“이러고 있으니 우리 같이 예헌서원에 다닐 때가 생각나지 않소?”

“후우, 후우, 그, 후우, 월병 사건?”

옛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육지생은 숨을 가다듬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반색했다.

“하핫, 맞소. 내가 스승님이 방에 숨겨 두고 아껴 드시던 월병이 먹고 싶어서 몇 개 훔쳤다가 들킨 일이 있었지요. 내가 냅다 도망가는데 괜히 형님이 나랑 엮여 가지고 졸지에 같이 도망치지 않았소?”

“후우. 난 서원 앞을 쓸다가, 후우, 뭣도 모르고 같이 뛰었지.”

“생각해 보면 난 태생부터 도적놈이었던 것 같소. 가져선 안 될 걸 누가 곳간에 숨겨 두면 그렇게 배알이 꼬일 수가 없어. 성정이 이 모양이니 어차피 벼슬을 얻어도 큰일 냈을 놈이오.”

“후우, 나는 네가 진사가 될 줄 알았다.”

“누가 할 소릴. 나는 형님이야말로 진사는 물론이고 장원 급제 할 줄 알았어.”

명의 과거 제도에는 네 개의 시험이 있었다.

원시에 합격하면 수재.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

회시에 합격하면 공사.

이 중에 회시 합격자들 사이에서 전시를 치러 등위를 매기면 비로소 진사이며, 이때 일등을 한 최고의 진사가 바로 장원(狀元)이다.

향시 합격자인 거인만 해도 한 성(城)에 몇 명 안 되는 수준이니 그들 중에서 경쟁을 치러 진사가 되는 일은 그야말로 바늘구멍에 소가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가 회시 정도는 당연히 통과해서 진사가 될 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한 성을 넘어서 나라 전체에 손꼽히는 인재라고 확신했다는 뜻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형님은 회시도 합격했으면서 왜 벼슬에 오르지 않았소?”

“관직을 살 돈이 없었다.”

“그깟 매관할 돈. 형님 정도면 내주겠다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개천에서 승천하기도 전에 목에 목줄부터 걸라고?”

“승천해서 끊어 버리면 되지.”

“집채만 한 코끼리도 어릴 때부터 묶어 두면 주눅이 들어서 손가락만 한 새끼줄도 못 끊는 법이다. 나중에 어떤 곤욕을 치르려고 목에 줄부터 걸어?”

“형님이 어디 미련하게 그럴 사람인가?”

“후후, 네가 그랬지? 가져선 안 될 걸 누가 곳간에 숨겨 두면 배알이 꼬여서 참을 수가 없다고?”

육지생은 약간의 씁쓸함을 담아, 하지만 솔직하게 웃었다.

“나도 그렇다.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심사가 뒤틀려서 참을 수가 없다. 반골이지. 나야말로 관직에 올랐으면 하극상이나 저질렀을 놈이다.”

무공을 익혀 절정의 경지에 이르면 무형기가 생긴다.

학문도 마찬가지.

일정 이상의 경지를 넘어선 자에게는 타고난 그릇이랄까. 지식의 깊이에서 나오는 기세가 있었다.

육지생은 관직에 오른 관료는 아니나, 어린 시절부터 지켜온 대쪽 같은 신념은 여전했다.

제갈륜은 오랜만에 만나는 의형이 여전히 뛰어나다는 사실에 웃음을 터뜨렸다.

“후우, 그러고 보면 그때 먹은 월병은 맛있었다.”

“뭐요? 하핫, 그렇지. 훔친 월병을 나누니 참으로 맛있지 않았소?”

“네 말대로라면 나도 큰일 날 놈이다. 훔친 장물을 거리낌 없이 나눠 먹었으니, 관직에 올랐다면 도적놈들 월병을 빼앗아 먹지 않았겠느냐.”

“하핫, 지당한 말씀이오. 우리 두 사람이 진사가 안 되어서 나라를 살렸군.”

“그러게 말이다. 나라가 그 공을 알아줘야 할 텐데.”

와룡 제갈륜과 만박서생 육지생.

명문 예헌서원에서도 손꼽히던 인재들이 지금은 둘 다 험난한 무림 강호에 한 발을 딛고 있으니, 사람의 앞날은 참으로 모르는 일이었다.

수풀에 반쯤 드러누운 채 숨을 고르던 육지생은 불쑥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륜아. 이쯤 하면 됐다. 여기까지지?”

“역시 형님은 속일 수가 없소.”

“넌 일이 성공할 것 같으면 긴장하고, 실패할 게 확실하면 긴장을 풀지 않느냐?”

“참으로 놀랍소. 혹시 전생에 내 부모였던 것 아니오?”

“삼생의 연을 어찌 알까. 하지만 너 정도 되는 자식이 있었다면 실패한 인생은 아니었겠구나.”

한 달이 넘는 도주극이었다.

얇은 가죽 옷을 입고 사냥꾼 같은 복색을 한 제갈륜도, 문사건을 쓴 학사 차림을 한 육지생도 모두 초췌해서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사실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제대로 못 먹고, 못 자면서 하는 강행군은 사람을 영혼부터 갉아먹었다.

“백검회인가? 아니면 야조탑?”

“둘 다요. 그리고 그 둘은 힘을 합친 건 아니지만, 딱히 서로를 적대하지도 않으니 우리에겐 나쁜 일이오.”

“나 때문에 너까지 휩쓸렸구나.”

“반대지. 나를 위해 이것저것 자료를 들추다가 형님이 된서리를 맞은 것 아니오? 그런데 내가 그걸 나 몰라라 보고 있어서야 되겠소?”

“으음.”

“장강용왕께 죄송할 따름이오. 그 외엔 조금도 후회가 없소.”

제갈륜과 육지생은 서로를 보며 진한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럼 일어나 봅시다. 그래도 가는 데까진 가 봐야지.”

“그래. 일단 태호까지만 나가면 사람들이 있을 거다.”

육지생이 제갈륜의 손을 잡고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그 순간이었다.

바닥에 있는 잔가지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로도 끝이 아니라 바닥에 깔린 낙엽들을 버적버적 밟으면서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흡.”

제갈륜은 육지생의 손을 놓고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손바닥만 한 단검을 빼 들었다.

“누구냐?”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제갈륜의 목소리엔 살기가 가득했다.

육지생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가까이 다가오는 자는 한 명뿐이었다.

나이는 사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갈색의 피풍의로 몸을 감싸고 걸어오는데, 저잣거리에서 한 번 마주치더라도 다시 보면 알아보기 힘들 것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갖고 있었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체형.

동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기에 더 무섭다.

“애써 일어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일부러 다가왔소. 만박서생은 몸도 좋지 않은데 괜한 헛수고를 하지 마시오. 가만히 누워 있으면 수면 향으로 먼저 재운 뒤에 고통 없이 보내 드리겠소.”

“개소리.”

제갈륜은 쌍소리를 내뱉었다.

“야조탑의 특급 살수라더니. 이제는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갖고 노는 건가?”

“오해를 하는군.”

중년의 사내는 품에서 푸른색의 자그마한 새 모형을 꺼내 제갈륜의 발밑에 툭 떨어뜨렸다.

“나는 배려를 하는 거요. 어차피 그분을 적으로 삼아 공격한 이상, 만박서생은 살아날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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