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4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4)
제갈륜은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만박서생 육지생과는 달리 제갈륜은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었다.
단도술로는 제법 일절이란 평가를 받는 팔각비도(八角飛刀)를 익혔고, 녹림수로맹의 ‘와룡’이란 별호를 얻을 때까지 온갖 협잡과 암살 시도, 수많은 사선을 뛰어넘은 정예이기도 했다.
‘못 이겨. 이자, 무서운 실력자다. 암행만 한다고 해서 정면 싸움은 못할 줄 알았거늘. 이 정도의 무공을 감추고 있었다니.’
역설적이게도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싸울 수 없을 때가 있다.
차라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덤벼들 수 있으면 좋을 것을.
신법이니 간극이니, 투로니.
무공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들을 잘 알고 있으니, 그 어떤 점에서도 자신이 뛰어넘을 수 없는 수준의 고수를 만나면 한 번 난장을 피워 덤벼들 틈조차 노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커다란 구렁이 앞에 선 개구리.
지금 제갈륜의 꼴이 그러했다.
‘그렇다고 입으로까지 질 수는 없지.’
제갈륜은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배려라니. 가증스러운 이야기다. 야조탑의 특급 살수 중에서도 청조(靑鳥)가 최고라던데, 실력은 몰라도 성품만큼은 악독하기 짝이 없군.”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당연! 편히 보내 줄 테니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처자빠졌네. 그게 무슨 개 콧구멍 같은 소리야?”
제갈륜은 녹림도답게 걸쭉한 입담을 선보였다.
격장지계에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좋으련만.
상대방인 청조는 그저 목석처럼 무표정할 뿐이었다.
제갈륜의 어떠한 말도 그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말 잘했다! 륜! 우습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않느냐.”
그런데 의외의 활로는 육지생에게서 나왔다.
“그분이 그러던가? 날 죽이라고?”
육지생은 당당하게 물었다.
비록 체력이 없는 약골 서생이라 달리기만 하고도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 대쪽 같은 성정만큼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분의 권위? 감히 주변 사람들이 의심할 생각조차 못하는 그분의 인품?”
육지생은 비웃었다.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하기나 하던가?”
“말을 조심하시오.”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특급 살수 청조가 불쾌한 내심을 드러냈다.
‘그분’에 대한 충성심은 청조의 신앙과도 같았다.
“뭘 어떻게 조심할까? 명명백백한 사실을 모른 척 묻어 두면 조심하는 건가?”
“나무만 볼 줄 알고 숲을 보지 못하는 자가 잘난 척 나서는 모습은 꼴불견일 뿐이오.”
“후훗! 말 잘했다! 대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기에 신의를 어기고 이런 짓까지 하는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그분’의 성향인가? 그렇다면 무림 군웅들의 생각과 많이 다른데?”
“당신을 믿고 받아 준 호의를 배신으로 되갚은 자에게 신의에 대한 설교는 듣고 싶지 않군.”
스릉―.
“헛.”
청조는 대체 언제, 어디서 뽑은 건지도 모를 장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평범한 청강검이지만, 잘 갈려서 옷깃만 스쳐도 잘려 나갈 것 같은 예기가 느껴졌다.
제갈륜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청조의 검끝이 그의 미간을 겨누자 단도를 잡고 있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권고하겠소. 제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으시오. 그럼 수면향으로 재운 뒤 고통없이 보내 주겠소.”
“아, 왜 자꾸 개도 아니면서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제갈륜은 청조를 향해 단도를 겨눴다.
“너 같으면 그렇게 하겠냐? 무공이 나보다 높은 자가 나타나면 그저 고통 안 받길 원하면서 싸워 보지도 않고 순순히 목숨을 내줘?”
“살수들은 그렇게 하오.”
“우린 살수가 아냐!”
제갈륜은 자부심을 담아 외쳤다.
“녹림수로맹의 하나뿐인 군사이자, 장강용왕의 의지를 받드는 와룡이 나다! 그리고 세상 이치에 통달해 온 무림 강호의 세태를 꿰뚫어본다는 만박서생이 이곳에 있다!”
제갈륜은 자세를 낮추고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기세를 끌어 올렸다.
“우린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끝까지 발버둥 칠 테니 죽일 테면 죽여 봐!”
“그런가.”
청조는 제갈륜과 육지생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겠소.”
“잠깐!”
육지생은 손을 들어 올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가지만 대답해 주게. 그분이 진짜로, 날 죽이라고 명령했나?”
“그분은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소.”
“그럼 수하들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건가?”
“나는 도구요. 그분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행할 뿐.”
“그렇군. 륜!”
육지생이 소리치는 순간 제갈륜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단검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따앙!
“……!”
단검의 칼날이 뚝― 하고 부러지는 것과 동시에 샛노란 불꽃이 터져 나왔다.
예상 밖으로 일이 흘러가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나, 제갈륜이든 육지생이든. 본래는 어떤 상황에서도 비장의 구명절초 정도는 준비하는 사람들이었다.
제갈륜이 비싼 돈을 주고 준비해 둔 한 수.
뻥 뚫린 칼날 속에 인(燐)과 화약을 채워 놓은 섬도(閃刀)였다.
불꽃은 퍽! 하고 튀어오르자마자 수십 개의 불꽃으로 분열하여 일시적으로 더욱 밝은 빛을 발광시켰다.
눈을 뜨고 보았다면 일순간 눈이 멀어 버릴 정도의 광량이었다.
타타탁!
빛이 터져 나올 것을 미리 알고 눈을 감았던 제갈륜만이 불꽃이 그치는 순간에 맞춰서 눈을 떴다.
그러고는 육지생을 냅다 들어 어깨에 걸친 뒤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쒜에에엑―!
“헙.”
제갈륜은 무시무시한 파공음에 놀라 황급히 몸을 꺾었지만, 전부 피하지는 못하고 입고 있던 가죽 갑옷의 등허리 부분이 길게 쭉― 찢어지고 말았다.
그는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무두질을 수도 없이 반복해 정성들여 만든 가죽 갑옷일진데, 청조의 칼 끝에 걸리니 종이처럼 잘려 나간 것이다.
‘불꽃을 봤으면 맹인이나 다름 없을 텐데 어찌 쫓아온단 말인가?’
제갈륜은 힐끗 뒤를 보고는 두 눈이 왕밤처럼 커지고 말았다.
청조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보지도 않고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살수들은 밤중에 움직이기 위해 평소에도 눈을 가리고 사는 수련을 한다더니, 진짜인가 싶었다.
길이 평탄한 것도 아니다.
나무 뿌리, 울퉁불퉁한 바위.
발이 걸려 넘어질 온갖 장애물들이 있는데도, 청조는 마치 발에 눈이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쏜살같이 쫓아왔다.
“이런 미친!”
제갈륜은 감탄과 경악을 담아 소리치며 칼날이 반만 남은 섬도를 뒤로 집어 던졌다.
노리는 곳은 상대방의 목울대.
잘만 맞으면 일격에 상대방을 무력화시킬 요혈이다.
따아앙!
청조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소리만 듣고도 날아오는 단도를 쳐 냈다.
그뿐인가?
넓은 소맷자락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제갈륜을 쫓아왔다.
이제 다 따라잡혔다 싶은 순간, 제갈륜의 몸이 뒤로 휘청 끌려갔다.
누군가 그를 붙잡은 게 아니다.
갑자기 어깨에 업고 있던 육지생이 무거워진 것이다.
“헛?”
당황해서 돌아보니 육지생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사람의 키만 한 가시나무 가지를 붙잡고 있었다.
평생 붓만 잡던 손인데 힘이 어디에 있겠는가.
손 가죽이 찢어지고 피가 나는데도 육지생은 가시나무 가지를 끝가지 잡고 늘어졌다.
그러다 청조가 제갈륜의 등을 노리고 검을 내뻗는 순간, 기가 막힌 시점에 나뭇가지를 놓아 버렸다.
촤아악―!
치명상은 아니다.
피부에 생채기가 긁힐 뿐이니 아파 봤자 그저 따끔할 정도다.
하지만 청조가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의 효과는 대단했다.
청조는 의심도 많고 매사에 조심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갑자기 함정처럼 날아오는 가시나무 가지에 몸통을 얻어맞자, 대경하여 뒤로 펄쩍 물러나 사방을 경계했다.
그사이 계속 달리고 있던 제갈륜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제갈륜은 울창한 수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나갔다.
“형님, 손은 괜찮소?”
“으음, 괘, 괜찮다.”
육지생은 전혀 괜찮은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제갈륜은 다시 묻지 않았다.
“섬도에 당하면 보통 얼마나 버티나?”
“길어야 반각 아니겠소?”
“짧구나.”
두 사람의 도주극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제는 슬슬 멀리 태호가 보일 정도가 되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도 끝을 맞이했다.
비조처럼 날아든 청조는 그들의 예상보다 더 빠른 시간에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청조는 처음에 나타났을 때처럼 여유롭지 못했다.
두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눈이 새빨갛다.
심지어 양손과 목덜미엔 가시나무에 긁힌 생채기도 길게 그어져있었다.
“놀랐소. 사방의 퇴로를 다 틀어막았다고 생각했건만. 역시 지자(智者)들에겐 방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배우는군.”
청조가 든 검이 점점 다가온다.
두 번의 방심은 없다.
섬뜩한 살기를 피워 내는 청조는 제갈륜이 소매 속에 손이라도 넣는 순간 손목을 잘라 버릴 것 같은 살벌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제갈륜은 탄식했다.
“형님, 진인사대천명이라더니. 이제 진짜로 끝인가 보오.”
“그래. 어차피 이제 슬슬 나도 속이 울렁거리던 참이었다.”
제갈륜이 어깨에 메고 있던 육지생을 내려놓자,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태호가 있는 방향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청조가 육지생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금룡표국에 맡긴 호표 의뢰를 기대하는 거라면 포기하시오.”
“그걸 어찌?”
“우리의 적이 된 순간부터, 당신에 대해 모든 걸 조사했으니까.”
육지생은 진심으로 놀랐다.
다른 건 몰라도 금룡표국에 몰래 의뢰한 것까지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무섭구나. 그 군사의 통찰력은 대체 어디까지 꿰뚫어 보는 건가?”
“그 또한 그분의 인덕이라 하겠소.”
“하하핫.”
육지생은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뚝 그치고, 날카롭게 되물었다.
“금룡표국은 어찌되었지? 내 의뢰를 받아 준 사람들을 죽이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그저 바쁠 것이오. 그곳을 찾는 사람도 많고, 큰 의뢰가 밀려들어서 바쁠 테지.”
“뭐……?”
“이쪽이 악인이라 믿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소.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오.”
청조는 확신을 갖고 있는 듯했다.
천하에 모르는 게 없다고 소문난 만박서생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당했구나. 이리도 빨리 결단을 내리고 나를 칠 거라 생각지 못한 나의 패배다.”
청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제갈륜은 허리춤에서 또 다른 단도를 뽑았지만, 승산은 희박했다.
“그래도 최후까지 저항해 봐야지.”
제갈륜은 팔각비도를 시전하기 위해 몸을 낮췄다.
그 순간이었다.
두두두두두―.
히히힝―!
태호쪽에서 마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게 보일 지경이다.
“설마!”
육지생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마차를 살폈고, 이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강남 최대의 표국이라 불리는 금룡표국은 금룡이라 적힌 표기를 늘 달고 움직인다.
그런데 마차에는 금룡표국의 표기가 달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하늘이 주신 기회인 것은 분명했다.
그 순간까지도 청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제갈륜이 버럭 소리쳤다.
“형님! 그 마차를 세우시오!”
“안다!”
육지생은 황급히 마차를 향해 달려가며 양손을 내저었다.
청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 마차에 누가 타고 있든 청조에게는 귀찮은 일이 될 것임에 분명했다.
내려지는 결론은 하나였다.
청조는 비조처럼 날아올랐다.
쒜에에엑―.
“흡!”
따다당!
제갈륜의 팔각비도는 청조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여덟 번의 공격이 청조의 일 수에 튕겨져 나갔다.
청조는 능수능란했다.
제갈륜에게 시간을 빼앗기느니, 검끝으로 제갈륜의 공격을 가볍게 무력화시키면서, 본래의 목표인 육지생을 노리는 것에 집중했다.
제갈륜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으나 청조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옆으로 피하는 듯 싶더니, 더 빠른 속도로 육지생의 등을 향해 칼을 날린다.
쒜에에엑―!
육지생은 돌아보지도 못했다.
그는 마차를 보며 양팔을 휘둘렀다.
급격히 가까워진 마차.
육지생의 등에 칼을 찌르는 청조.
그 순간 마차에서 은빛 섬광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