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5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5)
쒜에에엑!
육지생의 등을 꿰뚫으려던 청조의 칼날이 황급히 방향을 바꿔 전면을 차단했다.
마차에서 날아온 건 한 자루의 창이었다.
길이는 팔 척.
마름모꼴 창날에서 긴 창대까지 전부 재질이 똑같았다.
창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품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고 공간을 찢는다.
따아앙!
청조의 청강검이 은빛 섬광을 가로막자마자 반으로 뚝 부러져서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컥.”
튕겨 나간 것은 검날뿐이 아니었다.
검의 주인인 청조 역시도 창에 실린 힘을 다 받아 내지 못하고 몸이 직각으로 꺾이며 뒤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아무리 기습이었다고 한들 내공의 차이가 명확했다.
야조탑의 특급살수를 일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자.
육지생과 제갈륜 모두 화살을 맞은 참새처럼 벙 쪄서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도대체 어떤 고수가 있어서, 두 사람을 어린아이처럼 갖고 놀던 야조탑의 특급 살수를, 아무리 기습이라고 한들 이렇게 간단히 뒤로 날려 버린단 말인가.
콰드드득―.
청조는 뒤로 일 장이나 밀려난 뒤에야 제자리에 멈춰 설 수 있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내뱉는 그의 두 눈이 시뻘겋다.
섬도에 잠시 눈이 멀고, 가시나무에 얼굴이 긁혀도 차분했건만, 지금만큼은 그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육지생으로부터 멀어진 건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제갈륜으로부터도 세 걸음 이상 떨어진 곳까지 바닥에 길게 그의 족적이 남았다.
우우웅―.
청조를 때리고 아래로 처박힌 창은 단단한 땅바닥을 진흙처럼 깊숙이 꿰뚫은 채 창대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몸을 숨긴 한 마리의 용과 같았다.
그사이 마차가 도착하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의 청년이 내려섰다.
생각보다 젊은 외모에 육지생과 제갈륜이 모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 가장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당신은?”
야조탑의 특급 살수.
청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마차에서 내린 청년은 평범한 촌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갈색 무명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한 모든 것이 특별했다.
잘 단련된 체구에, 팔다리는 길쭉하여 창술을 쓰기에 적합한 체형이다.
얼굴은 미남은 아니지만 피부가 맑고 해사했으며, 두 눈에서는 올곧은 심성을 증명하듯 정광이 뿜어져 나왔다.
“저를 아십니까?”
청년은 도리어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있다는 것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청조는 합죽이가 된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체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우리를 살려 주시오! 우리는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소이다!”
바로 그때, 육지생이 한발 앞서 행동했다. 그는 체면 불구하고 털썩 무릎까지 꿇었다.
청년은 조금 당황하면서 급히 물었다.
“실례지만, 두 분께서 만박서생과 와룡이란 별호를 가지신 게 맞습니까?”
“내가 만박서생이오!”
“나는 와룡이라 불리고 있소.”
청년은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는 몸가짐을 바로한 채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제 이름은 조서인입니다. 추 어르신의 서찰을 받고 두 분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 순간 육지생과 제갈륜은 환호성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청년 조서인의 등장.
그걸로 두 사람의 명운이 뒤바뀐 것이다.
***
‘휴, 다행이다. 늦지 않았어.’
조서인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마차를 타고 출발할 때 보였던 흑서의 초조한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심지어 하오문에서 붙여 준 마부는 마차를 심하게 거칠게 몰았다.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마차가 통통 튀는 것은 물론이고, 비스듬히 굴곡진 곡선로를 주행하면서도 속도를 낮추지 않아 마차가 반쯤 뒤집힐 뻔한 건 예사였다.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이렇게 달릴 리가 없는 일이다.
앞을 가로막는 건 뭐든 치고 지나가 버릴 기세로 달리는 마차 속에서 조서인은 혹시 늦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으음, 본 적은 없는데. 날 분명히 아는 것 같아.’
조서인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야조탑의 특급 살수인 청조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그가 지켜야 할 육지생과 제갈륜을 해하려 했던 실력 좋은 검사이기에, 잔뜩 경계하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뿐이었다.
“추 어르신이라면? 설마 우리가 생각하는 그분……?”
“장강에서 용왕이라는 별호로도 불리신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장강용왕 추묵환의 서찰을 받고 구하러 왔다는 사실이 두 사람에게는 의미가 깊은 듯했다.
제갈륜과 육지생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감격에 젖어 눈시울이 젖어 들기까지 했다.
‘추 어르신이 자신들을 챙긴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운 거구나.’
조서인은 추묵환과 장기린을 바꿔서 생각해 본 뒤,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낙일창……!”
반면에 청조는 조서인의 이름을 듣자 완전히 확신한 듯 신음을 흘렸다.
심지어 무산학관 안에서 자그마한 명성을 얻었던 별호까지 부르면서 말이다.
“아까도 물었습니다만, 검객께서는 저를 아십니까?”
조서인은 성큼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조서인이 바닥에 박힌 창을 뽑아서 창날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동안에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다만 홀로 중얼거리면서 끝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하나……, 그분께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으음…….”
청조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죽이고자 했던 육지생과 조서인을 번갈아 응시하면 신음을 흘렸다.
마치 거대한 벽에 부딪친 것처럼 당황하고 있을 뿐, 살기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랑 적대하지 않으려는 듯한 분위기인데. 무슨 연유가 있는 걸까?’
그 모습은 도리어 조서인을 당황시켰다.
“조 공자, 호북 무림에서 유명한 말이 있소. 일견청조(一見靑鳥) 필견사(必見死)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소?”
육지생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청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강호 경험이 일천한지라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파랑새의 조각상을 보면 반드시 죽음과 만나게 된다는 뜻이오. 저자는 야조탑의 특급 살수로 그동안 무림 강호에서 수많은 피를 본 자요. 언제나 살행이 끝나면 파랑새의 조각상을 던져 놓고 갔지. 이름도 파랑새라는 뜻의 청조요.”
“알겠습니다. 일단 일어나시지요.”
조서인은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되물었다.
“저 검객이 살수로서 명성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만박서생을 노리고 있는 겁니까?”
“그렇소. 저자가 그토록 숭배하는 ‘그분’을 위한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오.”
그분이 언급되자 청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는 마음의 결심이 선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조서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낙일창, 그대는 이 일에 정말 끼어들 것이오?”
위협이라기보다는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그리고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란 경고도 느껴졌다.
“제가 알지 못하는 묘한 뜻이 있는 듯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대는 이 일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오. 다른 누구보다도 그대는 안 되는 거요.”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소. 나도 그렇고, 만박서생도 그렇소. 입을 놀리기는 쉬우나,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는 것은 천지신명이 나서도 불가능한 일이지.”
“…….”
“낙일창의 무위가 내 예상을 뛰어넘으니, 그대가 여기서 나를 막아선다면 어차피 지금 내 목적은 이루기란 요원해졌소. 하지만 해가 지면 밤이 오는 법이며, 밤은 야조(夜鳥)가 날기 좋은 시간이오.”
일견청조 필견사.
호북 무림을 떨쳐 울리던 명성은 청조의 집요한 일처리 덕분에 생겨난 것이었다.
청조는 그 말을 하면서 부러진 청강검 조각과 손잡이를 자신의 검집에 다시 집어넣었다.
비록 부러진 검일지언정, 그가 검병을 잡고 있으니 서늘한 기세가 감돌았다.
비록 조서인과의 첫 만남에서 제법 손해를 보긴 했으나, 그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절정의 검객인 것이다.
“또다시 가볍지 않은 말이군요. 계속 만박서생을 노릴 거란 뜻입니까?”
“내가 지금껏 목표한 살행을 이루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뿐이었소.”
“그게 두 번이 될 수도 있지요.”
“낙일창.”
청조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분명한 호의를 갖고 말하겠소. 이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만박서생, 저자가 알고 있는 게 모두 진실은 아니며, 이 일에 끼어들면 그대는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오.”
조서인은 미간을 좁혔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당황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은자촌에서 지내면서 조서인도 사람 보는 눈이 제법 생겼다. 청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말투와 분위기만 봐서는 정말로 조서인을 염려해서 말하는 듯 했던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수가, 나를 걱정해 준다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데 청조의 분위기를 보면 분명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면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알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오.”
“대체…….”
“한 번만 눈을 감으면 되는 이야기요. 낙일창, 그대가 일각, 아니, 반각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저자는 이미 죽어 있겠지. 저자가 벌인 일, 신뢰를 배신한 사건을 생각하면 당연한 업보요. 그게 본래 이루어질 일이었소. 강호의 은원이자 순리라는 말이오.”
“…….”
“마차에 다시 타시오. 그러면 이 모든 일은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나고, 없었던 일이 될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떠나면 되는 일.”
조서인이 입을 꾹 다물고 고민했다.
그 모습에 조서인이 자신들을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던 것일까?
갑자기 만박서생 육지생은 조서인과 청조를 번갈아 응시하며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초조해져서 다시 무릎을 꿇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조서인은 들고 있던 창대의 끝으로 땅을 쿵! 하고 두드리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나 조서인은 만박서생과 장강와룡을 구해 낼 것입니다.”
“낙일창!”
“서찰을 보내신 장강용왕 추묵환 어르신은, 사사로이는 내게 무공의 묘리를 깨우쳐 주신 스승과 같은 존재이며, 공적으로는 사부님의 가족입니다. 그런 분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데 목숨을 걸어 마땅합니다.”
후회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순리에 안 맞든, 아직 알지 못하는 배경이 있든,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 반드시 이뤄야 할 일.
그게 천도(天道)이며 도리(道理)인 이상, 고민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맞서 싸우지 않는 자를 일방적으로 죽이는 일은 무(武)가 아닙니다. 그걸 두고 봐서도 안 됩니다. 난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후웅―.
마음을 한 번 굳히면 돌아보지 않는다.
조서인의 두 눈이 강력한 신념을 담아 불꽃처럼 타올랐다.
정면을 겨눈 창끝은, 그의 확고한 마음처럼 미동조차 없이 고요했다.
“만박서생을 계속 죽이고자 한다면, 내 창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청조는 할 말을 잃은 듯 석상처럼 굳은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면서 위험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나는 경고할 만큼 했소. ……그대는 후회하게 될 것이오.”
청조는 검병에서 손을 뗀 뒤 몸을 돌려 성큼성큼 멀어졌다.
그의 걸음은 가벼운 듯하면서도 매우 빨라서 순식간에 숲속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흐어…….”
“육 형.”
청조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만박서생 육지생이 휘청거렸다. 그가 다리가 풀려 쓰려지려는 것을 제갈륜이 황급히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자세를 가다듬은 뒤, 정식으로 조서인을 향해 포권을 취해 인사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소. 장강에서 와룡이라 불리는 제갈륜이오. 조 공자 덕분에 목숨을 구했소. 이 구명지은은 잊지 않을 것이오.”
“마, 만박서생이라 불리는, 육지생이외다. 나도 조 공자의 은혜를 잊지 않겠소.”
두 사람은 호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조서인을 바라보았다.
초췌하고 기가 다 빠진 모습이지만, 하늘이 도왔다고 여기는 듯 눈빛만큼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특히 장강용왕이 스승님 같은 존재이자 사부의 가족이라 말한 이후, 제갈륜의 눈빛이 뜨거울 정도였다.
“제가 한 일은 창을 한 번 던진 게 전부이니 은혜랄 것도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우리가 조 공자의 의기 덕분에 살아난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오.”
“아닙니다. 그보다, 제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합니다.”
조서인은 진중한 얼굴로 육지생을 바라보았다.
“저자가 말한 ‘신뢰를 배신한 사건’이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