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6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6)
“그건…….”
육지생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고민하더니,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구명지은에 감사하오. 조 공자의 은혜는 내 이름을 걸고 결초보은 할 것이오. 그렇지만 이 일에 대해 함부로 발설할 수 없음을 부디 이해해 주시오.”
“저쪽에서 살수를 보낸 건 육 서생의 입을 막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저는 살수를 막았으니 이미 한배를 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말씀을 안 하시겠다고요?”
“그렇소. 구명지은을 입었기에, 더더욱 조 공자에게는 말할 수가 없소이다.”
육지생은 권력에 저항하는 낙향유생 같은 모습이었다.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지만 자존심과 결기만큼은 살아 있는 꼿꼿한 지자(智者)의 모습이다.
거기다 구명지은을 입었기에 말할 수 없다는 건, 복잡한 일에 조서인을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으음.”
조서인은 억지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고 들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청조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육지생이 알고 있는 게 다 진실은 아니며, 이 일을 파고들수록 조서인이 후회할 거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탓일까?
육지생도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는 듯했다. 빙판 위에서 걸음을 옮기듯, 한 걸음, 한 걸음을 주의 깊게 내디디려 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추 어르신을 도우러 온 것뿐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네.’
조서인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청조라는 살수가 저를 알아보고 충고하던 일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두 분께서 제게 말을 아끼시는 건 혹시 그 때문인지요?”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고 했소. 지혜가 뛰어난 자라 해도 천 가지 생각을 하면 한 가지 실책은 반드시 있는 법이니, 조심하다고 해서 나쁜 일은 아닐 것이오. 그 대상이 목숨을 구해 준 은공이라면 더욱 그렇소.”
“으음, 그렇긴 합니다만.”
“그 살수가 아무리 나를 죽이고 입을 막을 생각이었다 한들, 그 자리에서 조 공자에게 아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소. 그러니 그가 충고한 말은 틀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안 되는 일을 억지로 이어 붙여서 성사시키려 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조서인은 깔끔하게 털어버렸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저는 두 분을 오늘 처음 보았지만 살수의 의견까지 냉정하게 수용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냥 하시는 말씀은 아닐 것 같군요. 게다가 두 분께서 함부로 신뢰를 저버릴 분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알겠습니다.”
“그 또한 조심해야 하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오. 사람을 전적으로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소.”
“육 서생의 가르침은 가슴에 무겁게 새기겠습니다.”
조서인은 따뜻한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다.
“추 어르신께서 두 분을 구해 달라고 하셨으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는 두 분의 어려움을 모른 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 공자…….”
“마음이 바뀌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반드시 돕겠습니다.”
조서인은 순전한 호의와 협의 마음으로 이야기했고, 그 진심은 두 사람에게 전달된 듯했다.
두 사람이 감탄하며 허리를 숙였다.
“세상은 아직 낙일창의 진가를 모르는 듯하오. 순전한 협의를 반드시 기억하겠소. 고맙소, 조 공자.”
“고맙소, 조 공자.”
조서인은 마주 포권을 취하며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제 백경채로 모시겠습니다.”
***
호북 서릉협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객잔과 반점들이 많이 만들어져 있었다.
장강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이동하는 온갖 사람들의 흐름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생물의 혈관과 같다.
사람이 몸에 피가 흘러야 살 수 있듯, 나라에는 사람과 물건이 흘러가야 생명을 갖는 것이다.
객잔에서 목욕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육지생과 제갈륜은 딴 사람처럼 보였다.
제갈륜은 찢어진 가죽 갑옷을 벗어 버리고 육지생과 똑같은 문사복을 입었다.
깨끗한 옷을 입고, 충분한 잠을 자니 두 사람은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그동안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쫓기던 사람들이 이제야 여유를 되찾고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다.
두 사람은 객잔에서 주문한 만두를 입에 넣고는 천상의 맛을 느끼는 것처럼 잠시 지그시 눈을 감기까지 했다.
“사흘을 굶다가 먹으니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소, 형님.”
“사람이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공맹의 글자들을 수백, 수천 권 읽으면 뭐하나?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몰랐으니 원. 헛살았구나, 헛살았어.”
“갑자기 상황이 급변하니 당황해서 그랬던 거죠.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리가 실수한 게 꽤 많소.”
“말도 꺼내지 마라. 내 별호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만박서생이자 장강의 와룡이라 불리는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쫓기게 된 건 심히 부끄러운 사실이었다.
“이게 다 저쪽에 있는 책사 때문…….”
“크흠!”
“그래, 그래. 나중에 이야기하겠소.”
육지생이 제갈륜에게 눈치를 주는 모습을 보면서 조서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두 분의 안색이 좋아진 걸 보니 제가 기분이 좋습니다.”
“이게 다 은공 덕분이오. 조 공자가 우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맛있는 만두를 먹을 수 있었겠소?”
“더 드시겠습니까?”
“사양하지 않겠소.”
육지생은 보기보다 대식가였다.
체구가 크지 않고 팔다리도 나뭇가지처럼 가는데, 앉은자리에서 만두를 세 판이나 먹고도 모자란 듯 입맛을 쩝쩝거렸다.
“조 공자는 더 안 드시는 거요? 어제 우리 곁을 지켜 주며 불침번을 섰으니 더 잘 드셔야 하지 않겠소?”
“저는 한 판이면 충분합니다.”
조서인은 소식가가 아니었지만, 객잔에서 내준 만두는 한 판도 다 먹지 못하고 젓가락만 깨작거리고 있었다.
제갈륜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빙긋 웃었다.
“건장한 청년이 배가 안 고플 리는 없고. 입맛에 안 맞나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제가 있던 마을의 숙수님 실력이 워낙 뛰어나셔서.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째 편식하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조서인은 난감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만두피는 쓸데없이 두껍기만 하고 퍽퍽하며, 만두소에 들어간 고기에선 누린내가 진동을 한다.
적어도 만두를 한 입 베어 문 조서인이 느끼기엔 그랬다.
강운찬이 해 주던 만두는 이렇지 않았다.
만두피는 반죽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윤기가 흐르고 촉촉했다. 만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면 만두소에 신선한 돼지고기와 소채의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진하면서 상쾌한 육즙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건 덤이다.
‘소호가 밖에서 소면을 깨작거리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한 번 그 맛을 보니 예전처럼 돌아오기가 힘드네.’
이것이 문화의 힘이다.
상하기 직전의 음식도 아무렇게나 잘만 먹었었는데, 은자촌에서 이 년 넘게 생활하다가 내려오니 이젠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는 것이다.
“허어, 이 정도면 맛이 나쁘지 않은데, 그동안 얼마나 대단한 걸 먹고 살아온 것이오?”
“귀공자군, 귀공자야. 은공의 얼굴이 황자처럼 매끈할 때부터 알아봤지.”
“우리 때문에 이런 천한 것을 먹게 해서 미안하오.”
“이거 은공께 무례를 범했소.”
육지생과 제갈륜이 떠드는 말은 진심이 아니다.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하는 모습에서 서로의 거리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장난기가 느껴졌다. 그저 호의를 갖고 하는 농담이다.
“두 분께서 저를 놀리시는군요. 음식은 남기는 게 아니니 저는 이걸 다 먹어치울 것입니다.”
조서인이 남은 만두를 공격적으로 먹어 치우려 하자 육지생이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오. 은공을 곤란하게 해서야 우리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그런 뜻에서 식어 버린 만두를 내가 먹어 치워도 되겠소?”
입맛을 다시는 육지생은 아직도 식욕이 가득해 보였다.
조서인은 탄식했다.
저렇게 먹성이 좋은데 어찌 지금까지 저런 마른 몸을 유지했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만두도 더 추가하지요.”
“고맙소. 조 공자의 입맛에 안 맞는 만두를 치워 버리는 영광을 주다니. 이 또한 잊지 않겠소.”
“예, 예. 이 은혜를 꼭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조서인이 장단을 맞춰 주자 육지생과 제갈륜은 빙긋 웃었다.
조서인은 찻물로 입을 헹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릉협으로 향하는 길목은 언제나 표사와 상인 들로 넘쳐나지만, 오늘은 유난히 허리에 칼을 찬 사람들이 많은 듯 보였다.
인근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생각하는 사이, 제각각 제법 큰 칼을 찬 네 사람이 조서인의 바로 뒤에 있는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녹림수로맹이 이번에는 정말로 큰일이 날 것 같던데. 백검회의 힘이 심상치가 않아.”
“이미 장강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걸 누가 모르던가? 장강의 어부들이 요즘은 물고기가 잘 먹어서 통통해졌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던데.”
“무서운 이야기구만. 그래도 녹림수로맹은 끄떡도 안 해.”
“왜? 돈이 많아서?”
“그것도 그렇고.”
“이 세상에 영원한 왕조가 있던가?”
“위험한 말을 하는구만.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황실이나 팔파일방도 못한 걸 백검회가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장강용왕이 있다는 말이군.”
“그래. 전대의 고수이자, 팔파일방의 장문인들도 한 수 접어 준다는 절대자가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근데 그것도 이젠 바뀔 것 같아.”
“무슨 이야길 들은 겐가?”
“서릉협에서 백검회의 흉신광검이 장강용왕과 제대로 붙었다는군. 그런데 양패구상이란 소문이 돌아.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장강용왕이 큰 부상을 입었다던데?”
“아니, 그게 진짜인가? 장강용왕이 다쳤다고? 무림오존들과도 무예를 겨룬다던 그 장강용왕이?”
“그렇다네. 흉신광검도 물론 크게 다쳐서 백검회 무인들의 부축을 받아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한들 큰일이 아닌가?”
“허어,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더니. 시대가 바뀌는 건가?”
“우리가 장강 격변의 시기를 살고 있는 모양일세.”
“장강용왕이 다쳤다면 큰일이군. 백검회는 백린탄이라는 물건을 쓰면서 자결도 서슴지 않는다던데.”
“무서운 곳일세. 예전에 들었던 마교나 혈신교 말고 그런 곳은 처음이야.”
“만약 백검회가 녹림수로맹을 쓰러뜨리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들이 장강을 장악하겠지. 중원의 모든 교통로와 암중 협약들이 다 재편되는 거고.”
“큰일이군. 큰일이야.”
조서인은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니 그들도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주변에 귀를 기울여 보니 허리에 칼을 찬 자들은 다 비슷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장강이니, 용왕이니, 표물이나 상회에 대한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두 분, 식사를 마치셨으면 이만 출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서인의 말은 불감청이고소원이었다.
육지생과 제갈륜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게 좋겠소.”
“어서 갑시다. 아차, 남은 건 챙기고.”
육지생은 빠른 손놀림으로 남은 만두들을 입속에 챙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