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7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7)
녹림수로맹은 특별한 방파였다.
강호 무림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에게 물으면 백이면 백, 녹림수로맹을 강대한 무림 문파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장강용왕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녹림 산채와 수로채의 지휘권을 통합시킨 뒤로는 가히 일국의 힘에 필적한다는 평을 받을 만큼 그 힘과 영향력이 강해졌다.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돈과 곡식이며.
그 돈과 곡식을 나르는 모든 유통로에 녹림수로맹이 끼어 있는 셈이었다.
표국에서 표행을 떠나려면 인근 산채들과 협약을 맺고 통행세를 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강에서는 어떤가?
장강에서 미곡을 실고 조운을 하게 되면 수로맹에 통행세를 내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만약 녹림수로맹이 정말로 악랄하게 민초들을 괴롭히는 악인들만 있었다면 진즉에 망했을 것이다.
물자를 운송하고 장사해서 먹고사는 상방이나 표국들 입장에서도 녹림수로맹과 잘 지내는 것이 좋았다.
세상은 험악하다.
비적들도 날뛰고, 때론 흑도 문파나 사교의 마졸들이 재산을 빼앗으려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오히려 험지의 터줏대감 같은 산채나 수로채가 있는 게 더 좋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뜨내기들이 돈을 뺏거나 악질 행위 하는 걸 매우 싫어하니까.
오히려 산적이나 수적들이 뜨내기 비적들을 막아 내는 역할도 수행하는 것이다.
동전 한 푼의 이문에도 예민하게 구는 상방이나 표국 들이 녹림수로맹과 적당하게 인사 겸 은전을 건네주고 산과 강을 안전하게 넘어 다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때론 고고한 정파의 협객들이 산적이나 수적 들을 다 죽이려 들 때가 있지만, 그건 정말로 뭘 모르고 하는 짓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도적을 죽이면 도적이 사라지는가?
독버섯처럼 머리를 쳐 내도 또 다른 머리가 자라나 그 자리를 채우는 게 도적 떼다.
설령 산채나 수채가 완전히 사라져도 문제다.
인적이 뜸한 곳에 산채나 수채 한두 개 없어진다고 그곳에 도적이 안 생길까?
상방이나 표국에서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관부의 학정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이 녹림수로맹의 규율도 없이 모조리 비적 떼가 되어 천지분간 못하고 여기저기서 도적질하기 시작할 때다.
그때는 정말로 방법이 없다.
코앞의 작은 언덕 하나 넘을 때도 비적 떼와 싸우느라 피를 봐야 한다.
먼 길을 떠날 때마다 수십 개의 이름 모를 비적 떼를 날마다 만나서 혈로를 뚫고 지나가는 게 일상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장사를 할까?
그 정도 난세라면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명태조 주원장도 난세에 기회를 잡은 홍건적 출신이지 않던가.
그게 바로 녹림수로맹이 일국에 준하는 가치를 가진 이유이며, 그런 가치를 만들어 냈기에 장강용왕은 장강의 신이 된 것이다.
추묵환은 각지에 퍼져 있는 녹림십팔채를 통일시켰다.
말이 십팔 채지, 그 밑에는 제각각 작은 산채를 수 개에서 수십 개까지 거느린 거대한 도적 떼다.
수채는 또 어떠한가?
장강의 상부에서 하부까지, 뱃심 두둑한 백경채에서부터 협로를 거슬러 올라가는 조운을 통괄하는 교룡채까지 모든 장강의 거친 사내들이 장강용왕을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악명 높은 염상이나, 강남의 거상들도 눈치를 보게 만드는 거대한 수채가 열여덟 개다.
대륙 어딜 가도 중규모 무림 문파와 일전을 벌여 볼 법한 산채와 수채가 총 삼십육 개나 존재하는 곳이 녹림수로맹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맹(盟)’이며, 이는 무림맹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천하의 황실조차 서로 소 닭 보듯 모른 체하며 현재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대한 집단.
그렇지만 또 한편으론, 모든 사람들에게 도적놈들 집단이라며 손가락질 받고 업신여겨지는 방파.
그런 곳이기에 녹림수로맹은 특별했다.
호북 인근.
장강 삼협 중 서릉협(西陵峽)은 삼협 중 가장 길었다. 무산의 동쪽에서 위아래로 나란히 뻗어 있는 산맥을 장강(長江)이 하나하나 차례로 통과하는 모양새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양쪽에 산세가 험한 바위산들이 마치 보표처럼 늘어서서 예를 표하니, 그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경관이 좋은 것치고는 사람은 그리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서릉협에 있는 것이라곤 고작 몇 개의 사원과 자그마한 취락들 뿐.
워낙 물살이 빠르고 물길이 가팔라서 배가 함부로 지나다닐 수 없으니 자연스레 통행하는 사람들도 줄어들지 않겠는가.
백경채는 바로 그 서릉협에 자리를 잡았다.
장강의 호걸들은 늘 말한다.
모든 수적들의 고향은 동정호라고.
하지만 그 동정호의 수적들을 길러내는 곳이 바로 서릉협의 흰 고래. 백경채다.
동정호에서 태어난 수적들 중에 무공에 재능 있는 자들을 고르고 골라 뽑은 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
수로십팔채 무력의 상징인 용왕수호대는 대부분 백경채 출신이다.
싸움, 잠영술, 배 다루는 법.
수로십팔채의 호걸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배우고 익히기에 천혜의 환경을 지닌 서릉협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장강용왕이 은거하면서 넘긴 맹주령을 백경채의 채주가 가지고 있다는 점도 큰 역할을 했다.
명실공히 작금의 수로맹의 중심.
그곳이 바로 백경채인 것이다.
“조 공자, 백경채에 거의 다 도착했소.”
마차 밖으로 계속 머리를 내놓고 주변을 살피던 제갈륜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제갈륜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사람처럼 손을 꿈지럭거리면 불안해했다.
백경채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해 보였는데, 이제는 겉으로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동요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만하지.’
조서인은 그가 왜 그런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은자촌이 불한당 같은 자들에게 포위되어 있다면 자신도 이성을 잃고 뛰쳐나갈 게 분명했다.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들립니다.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많소. 구경꾼들만 해도 수백이 넘는 듯하오.”
“강호의 호사가들은 정말로 대단하군요. 서릉협의 백경채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라 들었는데, 이런 곳까지 구경을 온단 말입니까?”
“싸움 구경이라면 불구덩이 속으로도 뛰어들 인간들이지.”
제갈륜은 냉소했다.
“적은 어떻습니까?”
“대놓고 모여 있지는 않는군.”
제갈륜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은 것 같은 적의가 가득했다.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딱히 출입을 막지는 않는 듯하오. 군중들과 선을 긋고 있을 뿐 전투를 준비하는 것 같지는 않소.”
“그럼 여기서 내리는 게 좋겠습니다.”
조서인은 마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웅장한 서릉협의 풍경이 시선을 압도했다.
마치 거인처럼 굽어보는 거대한 석산 사이로 장대하게 흘러가는 장강의 물길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릴 것처럼 시원하다.
배산임수.
명당보다는 좀 더 물에 가까운 자리에 커다란 성채가 지어져 있었다.
단단하고 튼튼한 돌로 성벽을 쌓고, 그 위를 커다란 통나무로 보강해 만든 성채다.
건장한 장한 다섯이 달라붙어야 겨우 열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성문 위에는 용사비등한 글씨체로 ‘백경(白鯨)’이라 적혀 있었다.
성채 주변에 수백 척의 협선들이 백만 대군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장관이다.
조서인은 백경채의 위용을 잠시 감상한 뒤, 성문까지 향하는 길목이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
사방에 널려 있는 부서진 병장기와 나무 파편들, 그리고 중간중간 포탄이라도 날아다닌 것처럼 움푹 팬 땅은 그야말로 전쟁이라도 치른 모양새였다.
“바닥을 온통 검게 물들인 게 설마 피입니까?”
“그런 듯하오.”
대답은 만박서생 육지생이 해 주었다.
제갈륜은 격정에 차서 대답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큰 싸움이 났다니……!”
제갈륜은 이런 싸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수로맹의 책사다.
육지생을 구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갔었지만, 그 사실에 큰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조서인은 서둘러 백경채로 향하는 제갈륜의 뒤를 쫓으면서 한편으론 인근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눈으로 훑었다.
‘구경꾼이 절반, 드러내지 않으면서 백경채를 포위하고 있는 자들이 절반.’
녹림수로맹과 백검회의 거대한 싸움을 지켜보고 싶은 강호의 호사가들이 절반, 조서인 일행을 경계하는 백검회의 무인들이 절반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조서인은 그들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키는 오 척 반 정도 될까.
체구는 보통이지만 소매가 없는 배자를 입고 있으니 극도로 단련된 강철 같은 두 팔이 다 드러나 있었다.
그는 척 보기에도 중원의 혈통이 아닌 듯한 커다란 말을 타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말은 보통의 말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크고 덩치도 한 배 반은 더 컸다.
말의 몸집이 어찌나 큰지, 건장한 사내가 올라탔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사람보다도 더 큰 짐을 등에 실었는데도 전혀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발굽 쪽에 덧신을 신은 것처럼 털이 많네. 신기한 종이다. 저런 말도 있구나. 그리고 언월도라니? 저 사람은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있는데 상당히 무거워 보여.’
말만 특이한 게 아니라, 사람도 특이했다.
자세히 보면 입고 있는 복색 또한 특이했다.
중화의 것은 아니고, 서역 비단길을 통해 넘어 온 것 같은 이국적인 색감의 천을 피풍의처럼 허리와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천축의 승려 같기도 하고, 비단길을 따라 온 이국의 상인 같기도 했다.
그는 커다란 삿갓을 쓰고 있었는데, 서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삿갓을 살짝 들추면서 눈이 마주쳤다.
오싹.
등골에서 소름이 타고 치솟는다.
극도의 경계심이 본능적으로 생겨났다.
“조 공자?”
조서인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는 육지생의 목소리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예, 가시죠.”
범상치 않은 남자였다.
인상적이지만, 아무리 봐도 백검회의 사람은 아닌 듯했다.
‘백검회는 다 비슷한 느낌에 가면을 쓰고 검을 쓰는 자들이니. 언월도를 든 저 사내는 백검회가 아니겠지.’
백검회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경계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제갈륜이 백경채의 입구를 지키던 거구의 사내들에게 인사를 하자 성문은 곧바로 열렸다.
조서인은 피로 물든 땅을 지나 마침내 제갈륜, 육지생과 함께 백경채의 성문을 넘어섰다.
***
백경채의 내부는 넓었다.
한쪽 벽면에 오백 명의 사내들이 거리를 두고 일렬로 설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황궁 못지않게 거대한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깨끗하게 정돈된 돌길이 백경채 내부의 태사의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제갈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던 조서인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백경채의 중심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태사의.
그 위에 산중대호 같은 한 사내가 비스듬히 앉아서 강대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신 제갈륜, 장강의 용왕이신 총표파자를 뵙습니다.”
제갈륜은 마치 황제를 배알하듯 지극한 예를 갖추며 태사의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녹림수로맹의 총표파자.
장강의 용왕.
‘추 어르신!’
조서인은 반가운 마음에 버럭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반가웠던 마음은 곧 걱정과 분노로 바뀌었다.
추묵환의 모습은 멀쩡하지 않았다.
나이를 잊게 만드는 거구와 강인한 육신은 갓 스무 살이 된 젊은이 못지않다.
오히려 듬직한 풍채와 강인하게 단련된 근육들이 더욱 패력을 내뿜었다.
추묵환은 상의를 입지 않은 채 호랑이 한 마리의 가죽만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다.
백발의 머리를 틀어 올려 묶어 두었으나 단정하지 않다.
비스듬히 앉아 의자에 기대어 있는 이유는 면포 붕대를 허리에 칭칭 감은 탓이다.
상처가 어찌나 깊은지, 두껍게 허리를 둘둘 감아둔 면포 너머로 선홍빛 액체가 점점이 배어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은 듯, 추묵환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거렸다.
‘이 무슨!’
조서인은 분노했다.
설마하고 있었는데, 흉신광검과 양패구상을 한 것 같다던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추묵환은 가족이다.
장기린을 사부로 모시고, 소호를 친우로 둔 조서인에게 은자촌은 또 하나의 고향이다.
추묵환은 조서인을 어떻게 대했던가?
은자촌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격의 없이 등짝을 두드리며 무공을 가르쳐 주던 어르신이 아니더냔 말이다.
그런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왔는가. 가족은 구했고?”
추묵환은 비스듬히 의자에 기댄 채로 제갈륜을 맞이했다.
“이 불충한…… 군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형님을 구해서…… 돌아왔나이다.”
“구했으면 됐다.”
울음을 참지 못한 제갈륜이 땅에 이마를 박으며 흐느끼자, 추묵환은 껄껄 웃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