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8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8)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이 무능한 신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왔으니 이젠 함께 싸워야지.”
추묵환은 그저 제갈륜이 본분을 다하길 기대할 뿐이다.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쿵!
제갈륜은 백경채가 떨쳐 울리도록 머리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신 제갈륜, 반드시! 백검회를 일망타진하여 저희 맹을 건드린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믿음직하군.”
추묵환은 제갈륜을 단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일까.
제갈륜의 어깨가 떨린다.
주변에 도열한 용왕수호대 또한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그런 제갈륜을 보고 있었다.
쿨럭쿨럭.
가래 섞인 기침을 토해 낸 추묵환의 시선이 이번에는 제갈륜의 뒤에 서 있는 조서인에게로 향했다.
“맹의 군사가 손님을 데리고 왔군.”
깊은 한숨과 함께 추묵환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기세가 변한다.
무형기를 흔들지도, 패력을 뿜은 것도 아닌데.
추묵환이 상체를 세우자 상처 입은 대호(大虎)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웅장한 존재감이 절로 생겨났다.
“이놈아. 네가 왜 여길 왔느냐.”
“어르신.”
조서인은 안타까운 마음에 목소리가 떨렸다.
상처를 입었어도 맹수는 맹수다.
조서인을 바라보는 호안(虎眼)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평범한 사람이 앞에 선다면 벌벌 떨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할 박력이 넘친다.
그럼에도 왜 이리 마음이 짠하고 쓰라린지.
조서인의 눈빛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네가 올 줄 알았다면 서찰을 보내지도 않았다.”
갑작스러운 용왕의 분노에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치신 건 괜찮으세요?”
“난 멀쩡하다.”
“이렇게 다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더 빨리 나왔을 텐데요.”
“내가 서찰을 쓴 건 널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예. 압니다. 그런데 검선께선 지금 구양세가로 돌아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검선.
모래알처럼 많은 강호의 강자들 중 최고의 고수를 한 손에 꼽자면 늘 등장하는 인물이다.
“거, 검선?”
“으음.”
제갈륜과 육지생이 눈을 부릅뜬 채 당황했다.
장내의 공기가 급변했다.
양옆에 시립해 있는 용왕수호대들도 깜짝 놀라 조서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렇다고 네가 온단 말이냐? 네가 검선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야?”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서찰을 태사…… 으음, 검선 어르신께 다시 보내면 너무 늦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부님께 허락을 맡고 급히 달려가 여기 계신 두 분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 촌장이 허락해 줬다고?”
“예. 시험을 통과해서 허가를 받았습니다.”
“…….”
“이렇게 다치실 줄 알았더라면 더 빨리 올 걸 그랬습니다.”
조서인은 안타까움에 입을 꾹 다물었다.
추묵환은 무거운 얼굴로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돌아가라.”
“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을로 돌아가서 무공이나 마저 수련하란 말이다.”
“그렇게 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왜?”
“사부님과 약속하고 왔습니다. 반드시 어르신을 돕고, 무사히 다시 모시고 가겠다고요.”
싸움을 앞두고 손이 하나라도 더 많아야 할 상황에 추묵환이 왜 돌아가라고 하겠는가?
조서인을 아껴서 하는 말임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한번 발을 담그면 늪처럼 깊이 빠져 버리는 곳이 무림이기에, 추묵환은 조서인이 녹림수로맹의 은원에 엮이는 것을 크게 경계한 것이다.
‘괜찮아요, 어르신. 저는 녹림수로맹을 도울 겁니다.’
조서인은 지지 않기 위해 추묵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용왕수호대가 경직된 모습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고, 무릎을 꿇고 있던 제갈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서인을 대신 변호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조서인 공자는 저희를 구해 주었습니다. 놀랄만한 무공으로 야조탑의 특급 살수 청조를 물러나게 만들고 저와 형님을 이곳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야조탑의 특급 살수를 쫓아 버렸다는 부분에서 용왕수호대의 눈빛이 바뀌었다.
조서인에 대해 감탄한 듯한, 조금은 시험하는 듯한 도전적인 시선들이 많아졌다.
“장강을 일통한 용왕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륜이의 의형인 육지생이라고 합니다.”
“만박서생.”
“예, 그리도 불리지요. 용왕께서 서찰을 보내 주신 덕분에 조 공자가 저와 동생의 목숨을 구해 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용왕님의 덕이니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육지생은 말로 끝내는 게 아니라 제갈륜의 곁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대례를 올렸다.
“과례는 비례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 만박서생은 인사할 필요가 없네.”
“그렇지 않습니다. 용왕의 배려로 살아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일을 대대손손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과례는 비례라니까.”
“서생 소리 듣는 자로서 한 말씀 더 올리겠습니다. 저는 륜을 도와 이곳에서 백검회를 막는 데 머리를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지금 이곳엔 조 공자 같은 전력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참견이군. 열정은 고맙지만 지금 그대는 조용히 있기를 권고하네.”
추묵환은 제갈륜에게도 경고했다.
“와룡, 너도 조용히 있거라.”
“예.”
감히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할까.
제갈륜과 육지생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조서인.”
“예, 어르신.”
“이곳은 은자촌이 아니다. 보다시피 나는 너를 챙겨 주고 지켜 줄 여력이 되질 않는다. 자칫 잘못해서 나중에 촌장에게 면목 없는 꼴이 되고 싶지도 않다.”
“어르신, 저희 사부님을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조서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에게 챙겨져야 할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마을 할아버지가 상처를 입고 다치셨는데 매정하게 두고 가 버린다면 처음으로 사부님께 크게 욕을 들을 것 같습니다.”
“뭐라?”
추묵환이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마을 할아버지? 두고 가?”
“…….”
“쯧쯧, 고집 센 놈 같으니.”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다.”
추묵환은 피식 웃더니 꼿꼿했던 자세를 풀고 다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나른하게 분위기가 풀리면서, 추묵환은 다시 상처 입은 맹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못난 놈, 후회해도 모른다.”
“후회할 일 없을 것입니다.”
조서인은 이제야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더 일찍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돕겠습니다.”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거다. 네가 돕겠다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더덕 뽑기보다는 쉽겠지요.”
“못 본 사이에 말발도 늘었군.”
추묵환은 껄껄 웃으면서 뻣뻣하게 시립하고 있는 용왕수호대를 향해 소리쳤다.
“내 손자 같은 녀석이다. 적당히 잘해 주어라. 무공이 뛰어나니 깨나 도움이 될 거다.”
“존명!”
장강용왕의 손자 대우를 받는 청년이라는 점이 용왕수호대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뜨거운 시선이 쏟아진다.
상상했던 것보다 관심이 더 큰 듯 보여서 조서인은 조금 난감해했다.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 버리시다니. 많이 띄워 주시네.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어.’
밖에서 무공에 대해 인정받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추묵환은 나른하고 피로한 목소리로 현재의 상황을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싸움은 지금 이곳에 있는 용왕수호대와 백경채의 인원만으로 한다. 강 상류의 포골채와 무한 쪽에 있는 청산채가 도와주러 오기로 했는데, 시기가 맞을지는 모르겠군. 모두 합하면 한 오백 명 정도 되겠어.”
쿨럭쿨럭.
추묵환이 기침을 하자, 용왕수호대 복장의 마르고 키가 큰 사내가 황급히 따뜻한 찻물을 한 잔 따라서 추묵환에게 건넸다.
“고맙다. 반면에 백검회의 수는 대략 일천 명. 대부분 이류 정도의 실력이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가끔 청성파나 화산파의 무공을 쓰는 놈들 중에 일류나 절정에 다다른 놈들도 끼어 있으니 방심할 수는 없다.”
뭔가 시큼한 냄새가 난다 싶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제갈륜과 육지생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품에서 세필 붓과 종이를 꺼내 빠른 속도로 뭔가를 적어 내리고 있었다.
조서인의 눈에는 그들의 어깨너머로 쓰인 글씨가 보였다.
백경채의 구조라든지, 취해야 하는 전술.
성채 벽에 어떻게 보초를 세울지 의견까지 써 내려가는 모습은, 그들이 왜 이곳에서 ‘군사’라고 불리는지에 대한 설명문과도 같았다.
“오는 동안 소문을 들은 것은 없느냐?”
“예?”
“객잔 같은 곳. 무림 정세에 대해 떠드는 자들이 있었을 텐데?”
“…….”
“들은 게 있군.”
추묵환은 지그시 바라봤다.
그저 가만히 쳐다볼 뿐인데 말 없는 압박감이 조서인을 짓눌렀다.
“사실, 흉신광검과 양패구상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군.”
추묵환이 씁쓸하게 웃자, 주변에서 왁자지껄한 변명이 쏟아졌다.
“용왕께서 삼첨양인도를 뒤늦게 쓰셔서 그렇습니다!”
“비겁한 놈. 가슴이 뚫려 놓고도 간신히 기습해서 겨우 자그마한 상처를 하나 남겨두고 생색을 내다니.”
“그놈은 이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놈의 상처에 비하면 용왕께선 찰과상을 입으신 것입니다.”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은 하나같이 추묵환을 감싸 주고 있었다.
감히 그들의 신을 욕보인 자.
백검회의 흉신광검이 얼마나 미움받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럴 때 도련님이 계셨다면…….”
“어허.”
추묵환에게 찻물을 주었던 마른 체구의 중년인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해사(海蛇). 쓸데없는 소리 마라.”
“하지만 용왕님.”
“이미 떠난 놈을 이야기해서 무얼 해.”
얼핏 담담해 보이지만, 추묵환의 눈빛에서도 씁쓸한 기색이 스치는 것을 조서인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서인아.”
“예, 어르신.”
“나이가 든다는 건 서러운 일이다. 상처가 잘 낫지 않는다. 옛날 같으면 이 정도 상처는 술 한 잔 마시고 자면 나았는데 말이지.”
추묵환은 선홍빛으로 물든 붕대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혹시 상처가 덧나지는 않을까 싶어 보는 사람이 다 움찔거리게 되는 모습이었지만, 추묵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사흘이다. 요혈을 긁힌 것만 좀 처치하고, 운기조식을 하면 나을 것이야.”
“의원은 있는지요?”
“여기에 있는 해사가 의원이다. 상처를 꿰매서 조개처럼 다물게 만드는 데는 최고지.”
씩 웃는 추묵환과 그 옆에서 걱정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는 해사 사이에는 오랜 세월 이어진 전우애가 느껴졌다.
“약재는 충분합니다. 용왕께서는 사흘 이상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 알았다.”
추묵환은 해사에게 손을 내저은 뒤 조서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사흘간 이곳을 지켜다오. 여기에 있는 백경채주, 화부 방풍, 용왕수호대로 충분할 테지만, 전력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만약의 경우가 온다면 힘을 보태 주면 고맙겠다.”
조서인은 추묵환의 속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흉신광검이 나타나면 막아 달라는 뜻이구나. 그 외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으니 충분할 것이고. 추 어르신과 양패구상……. 흉신광검, 얼마나 강한 자일까?’
조서인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흉신광검이 얼마나 강하든, 그는 장기린보다 강할 수 없고, 장소호보다 뛰어날 리가 없었다.
조서인은 자신감을 갖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는 조서인을 보며, 녹림수로맹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