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9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9)
“내 이름은 방풍이다. 편하게 대해도 괜찮겠지?”
녹림의 불 도끼.
방풍은 머리가 희끗희끗한데도 온몸의 근육이 바위처럼 부풀어 있는 사내였다.
키는 그리 크지 않은데 어깨가 떡 벌어졌고 손가락은 두껍고 짧다.
차돌바위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 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두 눈은 장익덕처럼 부리부리했고, 손등과 팔등에는 잔뜩 성이 난 근육에서 힘줄이 꿈틀거렸다.
조서인은 그가 등에 차고 있는 커다란 쌍날 전부(戰斧)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무림의 까마득한 후배인데 당연히 편히 대해 주셔야죠.”
“예의를 아는 친구구만.”
정작 먼저 말을 놓겠다고 한 방풍은 겸연쩍은 듯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요즘 것들은 녹림채에 있다고 하면 예의도 안 차리는 놈들이 많더라고. 너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기 이분은 녹림수로맹의 부표파자님이시다. 인사드리도록 해.”
방풍의 소개를 받으며 반백의 수염이 성성한 건장한 노인이 다가왔다.
백경채의 채주 백경.
흰 고래라는 별명답게 그는 덩치가 매우 큰 노인이었다.
키나 덩치만 봐선 장강용왕만큼 크지만, 느낌이 좀 다르다.
추묵환이 건장하고 균형 있는 체형이라면, 백경은 넓은 어깨와 굵은 팔뚝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차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방풍을 좀 더 크게 확대해 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반갑네. 백경일세.”
“녹림수로맹을 이끌고 계시는 부표파자님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조서인입니다.”
조서인이 또 한 번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하자 백경과 주변에 있던 용왕수호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끌다니. 나는 용왕님을 대신해서 잠시 맡았을 뿐일세.”
“마을에 있을 때 추 어르신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으십니다. 본인께서 이렇게 느긋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녹림수로맹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부표파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입버릇처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정말로 그렇게 말하셨는가?”
백경은 추묵환이 해사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간 문 쪽을 흘깃 쳐다봤다.
“예.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허어, 그것 참.”
백경은 눈빛이 강렬하고 인상이 험악해서 성질이 보통이 아닐 것 같은 외모였으나 조서인에게만은 달랐다.
그는 군자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법이지. 그렇게 믿어 주신다니 기분이 좋군. 우리 녹림수로맹은 조 공자를 환영하네.”
마치 가족처럼 따스하게 받아 주는 모습에 조서인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잠깐만. 백 형. 왜 공대를 하고 그러는 거요? 그럼 편하게 반말하겠다고 한 내가 이상해지지 않소?”
“조용히 해라, 자라 같은 놈아. 너랑 나는 입장이 다르다.”
백경은 조서인을 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로 방풍을 대했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한 대 쥐어박았을 것처럼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방풍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맛을 쩍쩍 다시더니 되물었다.
“입장이라니. 백 형과 내가 도대체 뭐가 다른 거요?”
“그런 게 있다.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
“아니, 알아야 나도 다시 공대를 하든가, 계속 반말을 하든가 할 거 아뇨?”
“이런 한심한 놈이 있나. 그걸 하나하나 다 물어봐야 해?”
백경은 맹수 같은 두 눈을 부릅떴다.
녹림의 불 도끼라 불리는 방풍이 그런 걸로 겁먹을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도 백경에게는 차마 맞받아치진 못하고 어깨만 으쓱했다.
그러자 백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파리같이 머리가 텅 빈 놈아. 잘 들어라. 용왕께서 손자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잖냐. 그럼 나는 부표파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거다.”
“그런 거요? 그럼 나는?”
“네놈이 반말을 하든 공대를 하든 그건 조 공자와 협의해서 알아서 해.”
“그렇소?”
방풍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조서인에게 선언했다.
“난 계속 반말할 거다. 듣기 싫냐?”
“그럴 리가요. 추 어르신과 상관없이 부디 저를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그럼 됐네.”
방풍은 이제 더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런데 손 모양이 이상했다.
두툼한 손바닥 위로 왼손의 중지와 약지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이거 왜 잘렸는지 궁금하냐?”
방풍은 조서인의 시선을 느낀 듯 씩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한 이삼 년 전쯤에 교어채가 불바다가 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저 와룡 놈이랑 조사하러 갔다가……. 미친놈을 만났어.”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미 다들 아는 이야기인 듯 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방풍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심각한 이야기라는 것을 조서인은 직감했다.
힐끗 옆을 보자 제갈륜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학검과 천풍검법을 귀신같이 잘 쓰는 놈이었다. 내공도 무지막지하게 강해서 삼 갑자는 되는 것 같더군. 강기를 숨 쉬듯이 뿜어내면서 칼질을 해 대는데, 와아, 내가 참, 결국 한 초식을 놓쳐서 그놈 칼이 여기 내 가슴을 뚫었다.”
방풍은 지금도 만져진다면서 자신의 두툼한 대흉근을 툭툭 두드렸다.
“허.”
듣기만 해도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학검과 천풍검법이라니.
팔파일방 중 하나인 청성파의 절기가 아닌가.
‘청성파의 무공이면 백검회구나. 백검회의 사람과 겨룬 거야.’
백검회가 화산과 청성의 무공을 사용하는 건 강호 무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화부 방풍이라고 하면 녹림수로맹의 고수들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와 겨룰 정도면 무공을 제대로 익힌 ‘한 자리 수’ 일원이 분명했다.
“여기 왼손 중지랑 약지는 그때 잘린 것이야. 내가 가슴이 찔렸을 때 맨손으로 그놈 칼을 딱 붙잡고, 불 도끼로 그놈 어깨를 찍어 버렸거든.”
“그 사람은 죽었겠군요?”
“안 죽었다. 내가 분명히 어깨뼈랑 쇄골은 물론이고 갈비뼈까지 아작 냈는데, 멀쩡히 살아남았어.”
“예?”
어깨에 쇄골, 거기에 갈비뼈까지 부러졌다면 폐와 내장까지 충격이 전달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살아남았다니.
“명이 긴가 봅니다.”
“길어도 보통 긴 게 아니지. 내 불 도끼 맛을 보고도 살아남은 놈은 강호 무림 전체에 몇 놈이 없거든.”
방풍이 주먹을 꽉 쥐어 보이자, 통나무 같은 팔뚝 위로 험악할 정도의 힘줄과 근육이 불끈거리며 튀어나왔다.
보기만 해도 신뢰가 생겨난다.
강해 보이는 외모가 왠지 모를 신빙성을 주었다.
‘그런데 방 대협 얼굴이 왠지 씁쓸해 보이시네.’
그사이, 슬쩍 곁으로 다가온 제갈륜이 첨언을 했다.
“조 공자, 여기 계신 방 형의 절기인 폭렬부공(爆裂斧功)은 그 파괴력에 있어서는 팔파일방의 절기 못지않소. 그런데 그걸 직격으로 맞았는데도 그자는 길길이 날뛰면서 가까이 다가가면 우릴 죽여 버릴 기세였다오. 마치 상처 입은 맹금 같았지.”
제갈륜은 그때만 생각해도 오싹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서 양패구상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그대로 방 형을 억지로 부축해서 도망쳤소. 호방한 방 형에게는 미안할 따름이오.”
제갈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풍에 대한 미안함을 표했다.
‘방풍 대협의 자존심을 지켜 주려는 거구나.’
방풍의 성격상 한번 싸우면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안 그래도 부상을 입긴 했어도 둘 다 살아 있다는 게 이상하다 싶었었다.
“…….”
방풍의 얼굴이 침중하다.
때론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할 일이 있다.
조서인은 오히려 감탄하듯 말했다.
“적이지만 투지가 대단한 자로군요.”
“광인이오. 하지만 그런 걸 다 덮을 만큼 강했지.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강해졌소.”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고요?”
“아마 조 공자도 그의 별호를 들은 적이 있을 거요. 이제 세상은 그를 흉신광검이라 부르오.”
“……!”
조서인은 눈을 크게 뜨며 방풍을 바라봤다.
흉신광검이라면 지금 백검회의 최고수인 일검이 아닌가.
“그것 참……, 으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깝지.”
방풍은 잠시 침묵하다가 툭 던지듯이 대답했다.
“참으로 아까운 일 아니냐? 그때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놈 대가리를 쪼갰어야 했는데, 흐흐, 그럼 우리 맹도들이 수백이나 죽지는 않았을 텐데.”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방풍은 실성한 듯이 웃었다.
“날 따르던 놈들은 지난번 싸움으로 다 죽었어. 술병 들고 매번 도망 다니던 종삼이, 백경채 대문을 지키던 동만이. 다 그놈 칼에 죽었어.”
으득―.
조서인은 보았다.
이를 악무는 방풍의 두 눈에서 활활 타고 있는 후회와 증오의 불길을.
“그…….”
조서인은 뭐라 위로의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달변가가 아닐뿐더러, 그 어떤 선의의 위로를 한다 해도 방풍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한때의 실수로 철천지원수를 죽일 수 있었던 천고의 기회를 놓쳐 버린 그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아깝다. 아까워. 지금도 자다 가도 그때 생각이 나면 도끼를 손에 쥐고 벌떡 일어난다. 내가 죽일 놈이야. 그때 딱 한 치만 손목을 옆으로 꺾었어도. 불 도끼를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비스듬히 꺾었어도, 지금 이렇게 싸움이 길어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방풍은 지금도 눈앞에 흉신광검이 있는 것처럼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비스듬히 꺾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몇 번이고 부여잡는다.
그는 과거의 증오 속에 사로잡혀 자신을 태우고 있었다.
“꼬마야. 흉신광검이 나타나면 너는 나서지 마라. 내가 그놈 잡을 거다. 온몸이 너덜너덜하게 찢기는 한이 있어도 그놈 대가리에 도끼를 박아 넣는 건 나야. 알겠냐? 아무 관계도 없는 네가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니야. 알았어?”
말은 거칠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가슴이 아픈 건 방풍일 게 분명했다.
조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방풍은 단순한 성격으로 보였었다.
그저 싸움만을 쫓는 호걸이라 생각했거늘.
그런데 그는 장강용왕 추묵환이 조서인에게 이곳을 부탁한 속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의 늙은 생강은 맵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나. 속이 깊은 분이었어.’
추묵환은 그가 없는 동안 흉신광검이 나타날 것을 대비해 조서인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방풍은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
자신이 나설 것이라고.
오랜 복수는 자신의 목숨을 지전(紙錢)처럼 태우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직접 갚을 거라고 말이다.
“저는…….”
조서인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는 사이, 옆에 있던 백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 지겹지도 않나. 수백 번도 더 들은 이야기를 주책스럽게 또 꺼내고 앉았어? 흰머리가 나니까 치매라도 온 거야? 옛일은 다 잊어버렸어?”
“백 형.”
“이 자라 대가리 같은 새끼야. 네 맘 알았으니 닥치고 저리 가 있어! 용왕께서 조 공자에게 이곳을 지켜 달라 부탁했거늘, 네깟 놈이 뭐라고 여기에 중언부언 지껄인단 말이냐? 엉?”
백경이 추상같이 추궁하니 방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으음.”
“거 참.”
용왕수호대와 제갈륜, 육지생도 서로 민망해져서 괜히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백경은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조 공자는 너무 담아 두지 마시게. 싸움이 길어지면 원한도 늘어나는 법이지. 저 친구가 한이 많아서 그런 게야.”
“이미 잊었습니다.”
“호탕하군. 마음에 들어. 와룡. 조 공자에게 백경채를 안내해 주고 쉴 곳을 내주어라.”
제갈륜은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서인은 제갈륜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대전 안의 사람들을 한 번 살펴보았다.
모두가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전의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백경채.
그 내부에선 미묘한 패배감이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