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87화 (516/686)

16권 10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0)

거대한 성채가 한쪽 벽면을 장강에 담그고 있는 모습은, 마치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뭍으로 올라와 누워 있는 모습을 떠오르게 만든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장강 위로 백경채 성벽의 그림자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수로채의 대부분이 그렇듯, 백경채에도 배들을 자체적으로 접안시킬 수 있는 항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길쭉한 판자를 튼튼하게 고정해 놓고 홋줄을 감을 수 있는 나무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 두었다.

범선이 두 척.

작은 소선들이 스무 척이 넘게 줄지어 묶여 있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다.

제갈륜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성채 밖으로 나가 있는 배가 스무 척이 더 있고, 그들은 백경채에서 경종을 울리면 반각 안에 무장한 채로 달려온다고 말했다.

“그럼 수로로 기습할 수는 없겠군요?”

“물론이오.”

제갈륜은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장강에서 우리와 싸울 수 있는 건 대명수군 정도겠지. 그 외에는 어떠한 배도 감히 우리에게 적의를 드러낼 수 없소.”

“수로채 말고도 조운을 하는 선방(船房)들이 있지 않습니까? 만약 백검회 사람들이 그들의 배를 빌려서 뒤로 쳐들어오면요?”

“조 공자. 아무래도 한 마을에서 용왕님과 소탈하게 지내다 보니 장강용왕의 명성을 잘 실감하지 못하시는 듯하오.”

제갈륜은 빙긋 웃기까지 했다.

“장강용왕께서 이곳에 계시는데, 장강 사람들 중 감히 누가 적들에게 배를 빌려준단 말이오?”

“그런가요?”

“이곳 장강에서 장강용왕을 돕지 않을 자는 없소. 물론 걱정은 이해하오. 만약 배를 빼앗으려 한다면? 그러면 이곳 장강에 펼쳐져 있는 우리의 연락 체계로 일각 안에 알 수 있게 되지.”

“대단하네요.”

“이곳 장강에서 우리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소.”

제갈륜은 그 뒤로도 백경채의 성벽에 전투를 대비해 만들어 둔 해자와 쇠뇌, 그리고 어유(魚油) 같은 것들을 쭉 둘러보게 해 주었다.

백경채는 이미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된 곳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은 기습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오.”

“예? 그건 어째서입니까?”

“아마 조만간 보게 되겠지. 백검회의 일검은 별호처럼 광자(狂者)이니 상식으로 이해하려 하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오.”

제갈륜의 호언장담은 그리 오래지 않아 사실로 판명되었다.

백경채에 도착해 구조를 소개받은 바로 그 날.

해가 질 때쯤, 커다란 뿔피리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백검채로 다가왔다.

***

사람은 누구나 소리에 민감하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들과 비교하면 훨씬 부족한 능력이지만, 그래도 고요한 밤중에는 백 걸음 밖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단출한 침상 위에 짐을 풀고 있던 조서인은 고막으로 파고드는 큰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뛰쳐나갔다.

뿌우우우우―――.

웅장한 뿔피리 소리는 마치 짐승의 포효와 같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쭈뼛 돋고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조서인은 곧바로 몸을 튕겨 성채 위로 올라섰다.

이미 그곳에는 소식을 듣고 모여든 백경채의 인원들이 서로의 역할을 확인하고 있었다.

“쇠뇌를 장전해라! 어유에 불붙일 준비를 해! 신호를 할 때까지 먼저 시비를 걸지 마라!”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장강의 와룡 제갈륜이었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백경채의 채주이자 녹림수로맹의 부표파자인 백경이었다.

모여 있던 건장한 사내들이 백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백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모두가 제각각 부여받은 일을 하기 위해 바람처럼 흩어졌다.

“부표파자님.”

“왔는가.”

백경은 간단히 인사만 받아 준 뒤 곧바로 용왕수호대를 이끌고 성채의 입구로 향했다.

조서인은 제갈륜에게 급히 물었다.

“제갈 군사님, 백검회에서 벌써 쳐들어온 겁니까?”

“조 공자.”

제갈륜은 무거운 얼굴로 성채 밖을 노려보았다.

“아니길 바랬는데, 결국 예상대로 일찍 쳐들어오고 말았소.”

“저들입니까?”

“그렇소.”

어스름하게 그림자가 길어지는 초저녁.

수많은 인파를 배경 삼아, 새하얀 가면을 쓴 오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로 잰 듯 정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저자들이 백검회구나.’

잘 단련된 무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은 기묘한 압박감을 만들어 냈다.

새카만 무복에 허리에는 한 자루의 검을 차고, 얼굴에 쓴 가면에는 이마에 번호들이 적혀 있다.

신화 속 마졸들이 튀어나온 것 같다.

조서인은 그들 중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번호에 주목했다.

‘한 자릿수! 저자들이 백검회에서 손꼽히는 검객들이야. 삼, 칠, 구……. 그리고 가장 앞에 있는 저 사람이, 일검.’

눈에 띄게 키가 큰 장신.

칠 척은 될 것처럼 큰 키에 팔다리가 길어서 각다귀 같은 모양새였다.

평범하게 걷는데도 팔다리가 길어 흐느 거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저자가 대체 어떻게 벌써……!”

제갈륜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때앵― 때앵―.

경종이 울린다.

백경채에 있던 수백 명의 사내들이 모조리 뛰쳐나와 싸움을 준비했다.

그사이 백검회 측에서는 일검이 성큼성큼 다가와 백경채의 입구를 향해 소리쳤다.

“용왕은 어디 숨었지?”

얇고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대번에 백경채 내부에서 쌍욕들이 튀어나왔다.

“저런 처죽일.”

“뭐? 숨어? 여기가 어디라고!”

백경은 대번에 뛰쳐나가려는 사내들을 말리고 앞으로 나섰다.

“미친놈 하나를 상대하는 데 용왕께서 나오실 필요는 없지.”

“그래? 아직 상처가 안 나았구나?”

백검회의 일검.

흉신광검 청계는 허공에 칼을 휘두르듯 손을 까딱거렸다.

“하긴, 그때 손맛이 좀 있었지. 요혈을 벤 것 같더라고. 큰일이네. 그 늙은이 벌써 죽으면 안 되는데.”

낄낄거리면서 어깨를 떨며 웃는 청계에게선 일말의 품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광자(狂者).

그중에서도 질이 안 좋은 부류다.

청계는 멀리 떨어진 구경꾼들과 뒤에 서 있는 백검회 일원들을 보며 동조를 구하는 듯했지만, 모두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으득―.

감정을 꾹 누르고 있던 백경조차 격동하는 심정을 참아 내지 못했다.

눈빛에서 불이 활활 타다 못해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해왕십삼기에 당해서 끌려갔던 놈이, 어떻게 하루 만에 다시 나타났지?”

“왜긴 왜겠어. 상처가 얕았던 거지.”

청계는 조롱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새하얀 가면 사이로 붉은색의 기묘한 안광이 번뜩였다.

“다 죽어 가는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을까?”

“이놈.”

백경은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백경채에 와서, 장강의 용왕을 조롱하는가?”

“못할 건 또 뭐야. 불만이 있으면 지금 여기로 나와 보라 그래.”

청계가 장난스럽게 백경채의 성벽 위를 둘러보았다.

“안 나오네? 늙은이가 겁도 많은가 봐?”

“이……!”

백경이 결국 분기탱천하여 뭐라고 소리치려는 그 순간이었다.

“이 개잡놈아!”

성벽 위에서 펄쩍 뛰어내리는 인영이 있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체구의 장년인이 마치 투석기로 돌을 쏜 것처럼 청계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청계는 경극 배우처럼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뒤로 물러났다.

꽈아아앙!

땅이 움푹 패며 터져나간다.

마치 화탄이 터진 것처럼 강렬한 굉음이었다.

흙먼지 속에서 도끼를 뽑아 드는 자.

녹림의 불 도끼.

방풍이다.

“내가 오늘 네놈의 대가리를 쪼갤 것이다!”

버럭 소리치는 모습은 산중대호가 따로 없다.

방풍은 땅속에 깊이 박힌 자신의 쌍날대부를 뽑아 들고, 곧바로 청계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아! 방풍!”

백경이 급히 말리려 했지만, 방풍은 이미 싸움권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미묘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백경채의 사내들은 백경의 눈치를 보며 함부로 나설 수 없었고, 백검회의 인물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팔짱만 끼고 구경할 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쾅! 콰득! 콰꽈광!

방풍의 도끼질은 신들린 것처럼 강맹했다.

그가 수평으로 도끼를 휘두를 때는 태풍이 부는 듯했고, 수직으로 내리찍을 때는 여력을 견디지 못하고 땅이 퍽퍽 터져 나갔다.

방풍의 무공은 이 년 전보다 한층 진일보해 있었다.

폭렬부공의 강맹함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도끼를 내리친 뒤에 이어지는 동작들이 유연하게 진보했다.

일격을 내리치고, 그 뒤에 다시 도끼를 뽑아 올려 휘두르는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졌다.

청계는 어떤 생각에선지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비류보(飛流步)의 경공으로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같았다.

방풍이 만들어 내는 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 전권 내에서 이리저리 흐름을 타며 몸을 흔든다.

방풍은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전력을 다한 도끼질을 순식간에 서른 번이나 반복한 뒤에, 둔중하게 진각을 밟으면서 청계를 향해 점점 다가갔다.

까앙!

그러다 처음으로, 청계의 검과 도끼가 마주쳤다.

평범한 청강검과 바위도 부술 것 같은 쌍날 대부가 맞부딪쳤는데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났다.

까드득―.

“크……!”

방풍은 양발을 땅에 단단히 박아 넣고 전력을 쏟았다.

통나무 같은 팔뚝 위로 근육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는다.

청계가 수평으로 뻗고 있는 검에 붉은색 강기가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이 년 전에 내 어깨를 쪼갰던 늙은이잖아?”

청계의 가면에서 붉은빛이 점점 강해졌다.

휘리릭―.

청계가 검을 비스듬히 꺾어 방풍의 도끼를 바닥으로 미끄러뜨리는 것과 동시에 검끝으로 방풍의 어깨를 꾹 누르듯이 꿰뚫었다.

“풍!”

백경이 깜짝 놀라 소리친다.

방풍은 자신의 왼쪽 어깨가 찔렸음에도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꽂힌 도끼를 다시 뽑아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쳤다.

까가강!

이 년 전에는 통했던 동귀어진의 한 수.

하지만 지금의 청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어느새 방풍을 찔렀던 검을 회수해, 내리찍는 도끼의 칼날을 검끝으로 쳐 낸 것이다.

“손가락은 이미 잘렸잖아? 이번엔 뭐로 칼을 잡으려고?”

청계는 비웃는다.

“캬하앗!”

방풍은 굴하지 않는 사내였다.

똑같은 방식의 공방이 반복되는데도 물러나지 않는다.

강맹하게 도끼로 내리찍고, 자신의 공격 범위 안에 계속 청계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청계는 비류보를 써서 그런 방풍의 주변을 자유롭게 맴돌다가 검끝으로 빈틈을 찌를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풍의 몸에서 상처가 늘어났다.

찢기고 갈라진다.

야생 들소처럼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돌진하던 방풍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피투성이.

바닥엔 방풍의 몸에서 뿜어진 피로 흥건하다.

“킥킥.”

즐겁게 웃는 사람은 청계 한 사람뿐.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백경채의 사내들도, 다 같이 무거운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무림오존 수준이라더니……!”

“이럴 수가 있는 건가. 대체 어떤 기연을 얻었기에?”

“방풍이……! 녹림의 불 도끼 방풍이…….”

백 초식이 넘게 일방적인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청계가 입은 손해라곤 방풍의 손에 잡혔던 소맷자락이 조금 찢어진 것과, 무복의 바지 자락에 흙이 튀어 더러워진 정도에 불과했다.

쿵.

결국 방풍의 쌍날 대부가 바닥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숨을 씨근거리는 방풍.

어깨를 들썩거리는 그는, 육신이 죽어 감에도 눈빛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거기까지야?”

청계는 고개를 비스듬히 비틀며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벼락처럼 검을 찔렀다.

청풍검(淸風劍).

일풍기천(一風欺天).

본래는 맑고 고고한 품격이 감도는 청성의 무공이었으나, 청계가 사용하자 피바람이 불 듯 잔혹하기만 하다.

청계의 검끝이 방풍의 명문혈을 관통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방풍이 자신의 도끼로 최후의 일격을 위해 들어 올리는 순간.

청계가 그걸 알아차린 듯 검로를 바꿔 방풍의 목을 꿰뚫으려는 그 순간.

쒜에에엑――!

성벽 위에서 쏘아진 은빛 섬광이 방풍의 도끼와 청계의 검을 동시에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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